朴正熙 前 大統領의 人生 歷程
일본군 장교의 박정희
박정희 선생님'박정희는 20세 되던 해인 1937년 3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
꼭 3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사진은 1939년 봄 학교 맞은 편 신사 자리에서
여(女)제자들과 함께 찍은 모습으로, 뒷줄 왼쪽 끝이 군관학교 시절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정순옥씨.
정순옥씨 제공 1940년 봄 어느날 그 해 보통학교를 갓 졸업한 정순옥(문경보통학교 26회 졸업생, 97년 당시 71세로 서울 강동구 거주함)씨는 한 살 아래인 사촌여동생(당시 문경보통학교 6학년)으로부터 분홍비단 손수건과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그가 동생에게서 건네받은 손수건은 문경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편지를 받아 겉봉의 발신자를 보니 '만주 신경 육군군관학교 제3구 4연대 박정희'라고 적혀 있었다.
낯익은 글씨에 반가운 이름이었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보통학교 6학년 때 1년간 자신을 가르쳤던 '박정희 선생님'이었다. 편지에는 조선말로 "처마 끝에 참새같이 짹짹이던 너희와도 이제 마지막이다. 어디로 갈 지 모르겠다. 씩씩하고 훌륭한 조선여성이 돼 주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박정희의 문경보통학교 여제자 정순옥씨.(97년 촬영) ⓒ 정운현 지난 97년 취재차 만났을 때 정씨는 반세기 가까이 전의 일을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주로 가신 뒤 박 선생님 한테서 평균 2개월에 한 통 꼴로 편지가 왔습니다.
한번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했다고 알려왔더군요. 또 더러 편지에 사진을 같이 부쳐오기도 했는데 한번은 칼을 든 사진도 보내왔었습니다. 군관학교에 가신 후 2년여 편지왕래가 있었는데 마지막 편지 때 쯤 '이제 본과는 일본으로 간다'고 쓰셨던 기억이 납니다." 문경보통학교에서 훈도(교사)로 근무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교사 박정희'는 왜 돌연 만주로 간 것일까?
그의 '만주행'은 박정희 개인의 역사는 물론 우리 현대사에서도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만주행이 없었다면 '군인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고, 또 이후의 '5.16'도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만주행에 대한 비밀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당사자인 박정희 그 자신이 밝힌 것은 생전에 비서관에게 한 마디 툭 던진 정도가 전부이며, 주변 사람들의 증언 역시 정연한 것은 아니다. 이제 그 진실의 모자이크를 하나씩 꿰맞춰 보자.
그간 나온 박정희 관련 연구서나 잡지 기사 가운데 박정희의 만주행을 언급하면서 자주 거론되는 단골메뉴는 '장발사건'이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그와 대구사범 동기생인 권상하(97년 당시 81세)씨의 증언에서 비롯됐다.
다음은 권씨의 증언 요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전의를 고양시키기 위해 교사들도 군인처럼 머리를 빡빡 깎게 했다. 복장도 국민복, 국민모에 각반까지 차고 다니게 했다.
그런데 그 시절 박정희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 해 가을 마침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장학사)이 박정희의 긴 머리를 보고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날 저녁 시학을 위해 교장 관사에서 연 연회에서 이것이 다시 논란이 됐고, 이튿날 교장이 그를 불러 간밤의 행동을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교장을 두들겨 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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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박정희'의 마지막 흔적 사진은 박정희가 (소화 15년)1940년 3월 31일부로 '의원 면 본관', 즉 본인의 희망으로 교사직에서 물러난 사실을 발령한 사령 원부.
문경군청 소장 권씨의 이같은 증언은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돼 있다. 우선 당시 일개 평교사가 일본인 시학과 교장에게 그같은 행동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교사 박정희'의 모습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을 살펴 봐도 그의 장발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반면 당시 장발은 그가 아니라 학생들이었다는 한 여제자의 증언이 있다. 박 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97년 당시 70세)씨가 그 증언자다.
머리가 긴 것은 박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습니다. 당시 동네에 바리캉이 한 두 개 뿐인데다 그걸 빌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주고 빌리기도 쉽지 않았구요. 그래서 제 때 머리를 깎지 못해 머리가 긴 학생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본인 교사들은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에게 벌을 세우곤 했습니다. 이런 일로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간에 언쟁이 더러 발생하곤 했습니다." '장발 사건'은 권씨가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과장됐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그를 만주로 이끈 것은 무엇인가.
필자와의 얘기 끝에 여제자 이씨가 실마리가 될만한 얘기 하나를 불쑥 꺼냈다. "어느 핸가 시학관이 학교로 시학을 온다고 연락이 와서 3학년 여학생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 정류소 앞에 도열해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시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가서 박 선생님을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 선생님은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박 선생님께서 졸업한 제자에게 돈을 빌려 김천서 하룻밤을 자고 만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1932년 봄 구미보통학교를 졸업(11회)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대구사범의 경우 당시 지방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대구-구미간을 열차로 오가던 박정희는 열찻간에서 당시 대구간호학교에 다니던 네 살 연상의 '누님'을 한 사람 알게 됐다.
두 사람은 당시 학생사회에서 유행하던 S-B(Sister-Brother, 누나-동생)사이가 되었다. 이들의 인연은 박정희가 교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주인공 주현숙(재미, 97년 당시 85세)씨를 취재한 한 전직 언론인의 증언을 들어보자.
"박 대통령은 문경 교사 시절 때도 '집(구미)보다 여기가 가깝다'며 토요일마다 예천 주여사 댁으로 놀러오곤 했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모두 결혼한 상태였는데 박 대통령은 '마누라가 미쁘다고(마음에 안든다고) 꼬집어대서 못살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답니다.
그런데 언젠가(1939년말) 한번은 박 대통령이 놀러와서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며 일본군가, 혁명가를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와서는 '누님, 내일이면 헤이다이상(군인)이 되러 갑니다. 술 좀 사주십시오' 해서 술을 사주었는데 그 다음날 예천역에서 만주로 간다며 떠났답니다."
앞에서 여제자 이씨가 언급한 '김천'은 어쩌면 '예천'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66년 1월 27일 경북 예천역 광장에서 열린 경북선(예천~점촌) 재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행사장에서 주씨를 만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재미교포인 주씨의 아들이 지난 97년 필자에게 보내온 바 있어 두 사람의 '인연'은 확인되고 있다.)
주씨의 증언을 살펴보면 그의 만주행에는 가정생활에 대한 불만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이 읽혀진다. 실지로 그는 첫 부인과 부부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문경에서 교사로 3년간을 보내면서 그가 부모형제와 처자가 있는 구미 본가를 찾은 적은 거의 없었다.
박정희가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 아들 임창발씨.(97년 촬영)
정운현 지난 97년 문경 현지취재 때 필자는 박정희가 교사 시절 2년여 동안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의 아들 임창발(97년 당시 78세)씨를 만났다. 그는 박 대통령보다 두 살 아래로 친구처럼 지냈다. 임씨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셔서 나팔을 부셨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면서 "방학 때도 고향에 안가시고 우리집에 머무셨고, 또 만주 군관학교 생도시절 휴가 때도 본가로 안가시고 우리집에 계시다가 가셨는데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만주행은 부인과의 불화로 인한 도피심리가 한 요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여제자 이씨와 '누님' 주씨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일본인에 대한 복수심이 단초가 됐고, 여기에 군인이 돼 출세하겠다는 야심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그는 터놓고 얘기를 나눴던 김종신(74, 부산문화방송 사장 역임) 비서관에게 "긴 칼 차고 싶어 (만주로) 갔지"라고 얘기한 바
있다. 여기서 박정희가 언급한 '긴 칼'은 권력의 상징어로 볼 수 있다.
즉 그는 당시 군국주의 하에서 최고의 권력집단이었던 군인을 평소 동경했고, 그래서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다는 얘기다. 그와 '긴 칼'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증언자는 앞에 등장했던 여제자 이씨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박 선생님이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누런색 군복에 빨간 견장, 붉은 군모, 그리고 에리(목 컬러)에는 별이 하나 그려져 있더군요.
그리고 칼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칼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박 선생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머리숙여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이 교사 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 장면을 보고 통쾌해 했습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그것이 개인적인 울분에서 기인한 것이든, 아니면 시대상황이 빚어낸 시대사적 산물이든 동기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만주행이 '교사 박정희'를 '군인 박정희'를 만들었고 이후 그가 '권력자 박정희'로 변신하는 하나의 단초가 됐다는 점이다. '군인 박정희'가 없었다면 '대통령 박정희'도 우리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주로 떠나기 직전 '교사 박정희' 1940년(소화 15년) 2월 7일 와다나베 경부 송별식 기념촬영 사진. 이 사진은 그가 만주행에 오르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붉은 원 안이 박정희 교사다. 당시 그의 머리칼은 짧고 단정한 편이다. "전사 소식 접하면 향 한 대 피워주게" 만주로 떠나는 박정희 교사 환송식 장면 1940년 2월 중순경 박정희는 만주행에 올랐다.
당시 (일본)군에 가는 사람에게는 모두 환송식을 해주는 관행이 있었다. 그 역시 군인이 되려 군관학교로 가는 길이니 이에 해당됐다. 당일 행사는 문경보통학교 바로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 자리였다. 마침 봄방학이어서 환송식 행사에는 몇몇 동료 교사와 학생 5~6명이 모습을 보였고, 주민들도 더러 참석했었다.
이들은 길 양 옆으로 도열해 만주로 가는 박 교사를 환송했다. 당시 전송식 행사장에 참석했던 오태구(문경보통 31회 졸업생, 97년 당시 69세)씨는 "학교에서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 참석자 일행이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가서 길가에 도열해 박 선생님을 전송했다"며 "당시 박 선생님은 붉은 글씨가 씌어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으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지켜준다는 센닌바리(千人針)을 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 교사는 환송 나온 동료교사들에게 "전사 소식을 접하면 향 한 대나 피워주게"라며 짧고도 비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훌쩍이는 어린 제자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섭섭해 하지 말아라. 긴 칼 차고 대장이 돼 돌아오겠다"고 위로했다.
국립현충원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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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朴正熙 大統領의 便紙 1978년 2월2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복을 제작하던주식회사 태흥 사장에게 보낸 감사 편지이다.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 코트 제작을 의뢰받은 주식회사 태흥의 權泰興(권태흥) 사장은 방한 바지를 함께 제작, 무료로 납품 했다.
이에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감사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서 朴(박)대통령은 버스 안내양들을 어린 나이에 가정형편이 불행하여 상급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는 이들 少女(소녀)」라고 썼다.
버스 안내양들의 입장을 이보다 더 가슴깊이 사무치게 대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급 노동자의 삶을 대통령이 챙기는 이런 모습이 當代(당대)엔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 지지 않았다. 홀아비가 된 朴(박) 대통령 주변을 둘러싼 권력의 장막이 이를 막고 있었고 밖에서는 유신 철폐를 외치는 야당과 재야 인사 들의 외침에 가려져 있었다. 朴대통령이 權泰興 사장에게 버스 안내양들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시하는 문장들마다 마치 대통령이 안내양을 친딸처럼 여기는 마음씨가 곳곳에 배어있다.
仰賀且祝(앙하차축)하나이다.
昨年(작년) 年末(년말)과 今般(금반) 舊正(구정)에 際(제)하여 서울과 全國(전국) 에서 勤務(근무) 하는 뻐쓰 案內孃(안내양)들을 위하여 따뜻하고 品位(품위)있는 防寒(방한)코드와 바지를 製造(제조)하여주시고 特(특)히 바지는 貴社(귀사)에서 無料(무료)로 膳賜(선사)까지 하여 주셔서 感謝不已(감사불이)하는 바입니다.
어린 나이에 家庭形便(가정형편)이 不許(불허)하여 上級學校(상급학교)에 進學(진학)도 못하고 職業戰線(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國民(국민)들에게 奉仕(봉사)하고 있는 이들 少女(소녀)들에게 조고마한 선물 하나씩을 보내어 그들의 勞苦(로고)를 慰勞(위로)하고
激勵(격려) 할까 하는 뜻에서 貴社(귀사)에게 付託(부탁)을 하였든 것인데 貴下(귀하)께서 그 趣旨(취지)를 忖度(촌탁)하시고 誠心(성심)껏 協調(협조)하여 주신 데 대하여 眞心 (진심)으로 感謝(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 物品(물품)을 받는 案內孃(안내양)들도 이것을 알게 되면 眞心(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보다 더 誠實(성실)한 마음가짐으로 自己(자기)들이 맡은 일에 誠心誠意(성심성의) 熱心(열심)히 일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 번 感謝(감사)를 드리며 貴社(귀사)의 더욱 隆昌(융창)과 發展(발전)이 있기를 祈願(기원)합 니다. 1978년 2월2일 朴正熙(박정희)敬具(경구) |
침실에는 효자손 두고 등긁어
막걸리를 마실 때 옆자리 사람이 잔을 오래 놓아 두면 손수 젓가락을 저어 주면서 마시라고 권유했다.
박대통령은 담배를 권하고 손수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준 대통령으로도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박대통령의 침실에는 검도용 목도, 헬스용 자전거, 철봉, 칼빈총 등이 있었고, 머리맡에는 등을 긁을 수 있는 '효자손'이 있었다.
가려운 등을 긁어줄 수 있는 사람의 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할을 할 육영수 여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근혜씨는 퍼스트 레이디 역할은 했지만 잠자리에서 등을 긁어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나무로 된 효자 손이 침대를 지켰던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부채와 파리채가 있었다. |
만년의 벗 “방울이”
특히 부인 육영수 여사의 돌연한 죽음 이후는 쓸쓸함이 주변을 감돌았다. 박대통령은 늦은 밤 거실에서 혼자 텔레비젼을 보다가 의자에 앉아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그의 곁에서 쓸쓸함을 지켜 준 것은 '방울이'라는 강아지였다. 이런 쓸쓸함을 떨치기 위해 배드민턴, 줄넘기, 턱걸이, 철봉, 물구나무서기 등 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도 그의 외로움을 해소시키진 못했다. 측근들의 눈에 비친 박대통령은 소탈하고, 정감이 넘치는 할아버지였고, 나라의 장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영도자였다. 혁명 이후 20년간 자신의 혁명목표를 세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이제 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믿고, 독재자로 불리면서 지켜온 권좌에서 물러설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역사는 10월 26일에 막을 내렸다. 대통령의 국장이 끝나고 집무실을 정리하러 들어갔을 때 벽에 걸린 달력은 10월 26일에 정지되어 있었다. 하루에 한 장씩 뜯겨지던 달력이 그렇게 멈춰 있는 것을 보고, 청와대 식구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달력을 아주 소중한 유품중에 하나로 보관하고 있다. 인간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는 그 날 그렇게 멈추었지만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까닭에서다. |
술과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다.
朴(박)대통령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월간조선 85년 4월호 '朴正熙(박정희) 대통령과 술'이라는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 기사에서 朴(박)대통령의 술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 수록해본다. 70년부터 9년간 대통령경제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던 박진환씨는 이렇게 말한다. "오후 5시쯤 되면 대통령이 우리한테 전화를 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식사 같이 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6시에 식당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막걸리가 너무 지겹게 나와서 오늘도 또 막걸린가 하고, 조금 먼저가서 식당에 목을 쏙 내밀고 살피곤 했다.
그때 막걸리통이 있으면 아주 질색을 했다.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시버스 리걸이 나오는데 그것만 보면 우리는 얼굴이 환해져서 조그맣게 소리쳤다.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식사습관이 어찌나 농민다웠던지 술상에선 예사로 김치를 손으로 집어 먹었고 김을 밥숟갈에 척 붙여서 먹었으며 닭고기를 먹을 때도 손을 잡고 먹음직스럽게 뜯어 먹었다고 한다. 58년 6월 말 당시 기자였던 Y씨는 1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을 만나러 갔는데 송장군이 없어서, 참모장인 박정희 장군을 대신 만났다.
박장군은 Y씨를 맞아 '먼길에 오셨으니 그냥 갈 수 있느냐'면서 중국집에 가서 술대접을 했다.
둘은 배갈을 먹기 시작했다. 둘은 누가 술이 더 센가 시합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빈병을 나란히 눕혀가면서 마셔댔다.
이렇게 하고 보니 빈병이 24개가 될 때까지 마셨다. Y씨는 이것이 박대통령이 생전에 세운 최고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술자리에 앉으면 먼저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같은 것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았다.
이렇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버릇처럼 돼 있었다. 그렇지만 술자리에선 참석한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줬다.
박대통령은 가끔 막걸리에 맥주를 타서 '맥탁'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고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막사이'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으면 박대통령은 흘러간 옛노래인 '짝사랑(으악새)' 이나 '황성옛터'를 불렀다.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도 술과 함께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마지막 궁정동 술자리에서 그가 들었던 마지막 잔은 막걸리와 함께 좋아하던 시버스 리걸이었다.
<월간 조선 '한국의 대통령'에서 발췌> |
이미 시체가 된 박정희를 놓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두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일부러 보이면서 둘러선 군의관과 위생병들에게 "꼭 살려야 해요" 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정규형 대위는 이우철 일병에게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일병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가서 두 손을 포갠 뒤에 왼쪽 가슴을 몇 차례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정 대위는 수동식 인공호흡기 '암부'를 환자의 입과 코에 덮어씌워 놓고 공기주머니를 눌러 공기를 허파로 밀어보냈다.
정 대위는 심장을 자극하여 박동하게 하는 강심제 에피네프린 20cc를 가슴에 주사했다. 심장마사지도 다시 했다. 한 20분간 응급소생법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회생불능이었다. 정 대위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송계용 소령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곁에 버티고 있는 두 감시자에게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송 소령의 물음에 두 감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처지 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헤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에서 원수처럼 욕을 퍼붓고 있는 박정희는 죽을 때 '평범한 세이코, 멕기가 벗겨진 넥타이 핀, 헤진 혁대'를 차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과 침실 화장실 물통에는 벽돌 한 장씩 들어 있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의 집무실에는 선풍기와 파리채가 있었다.
기름 절약을 위해서 한여름에도 에어컨 사용을 통제했던 그는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면서 더위를 견뎠다.
벌레가 들어오면 파리채로 잡았다. 그가 죽을 때 입고 있던 바지는 허리 부분을 수선하여 늘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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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놓지 않았던 유교적 교양인....." 추진력은 골돌한 사색에서..... 1979년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칠 때 국립 교향악단이 연주한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급격하게 사라지는 이 장엄한 곡은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서문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곡처럼 박정희는 토종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초인(짜라투스트라)처럼 살다가 영웅에 어울리는 최후를 남기면서 사라져갔다.
이 니체의 책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박정희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면서 영욕과 청탁을 같이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영웅이란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고 그 시대를 담는 그릇이며 새로운 시대를 빚어내는 용광로이다.
그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그 시대의 요구를 담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다.
영웅은 보통 난세에 나타나서 불꽃처럼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후세에 오래오래 계속되는 논쟁점을 남긴다. 바다처럼 청탁을 함께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청탁을 함께 쓸어담았다가 이를 소화하여 한반도라는 화폭에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김일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인간이다.
김일성은 권력으로 부패했으나 박정희는 권력을 쥐고도 끝까지 맑은 혼을 유지하였다.
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 그가 인용하여 실은 시의 한 구절은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였다.
그는 이 시를 인용한 뒤에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고 덧붙였다.
이 책 끝장에서 박정희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군림 사회와 특권 계층을 증오하는 것은 나의 생리'라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고 했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0분 김재규가 벽력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차지철을 쏠 때, 그리고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로 달아날 때,
이어서 김재규가 일어서서 4∼5초쯤 주저하다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하여 발사할 때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는 곁에 있었던 두여인의 일치된 증언이다.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 문을 빼꼼이 열고 "각하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난 괜찮아"라고 했다.
두 여인이 "각하 진짜 괜찮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는 또다시 "난괜찮아"라고 했다.
이 순간 그는 관통상으로 인해 등에서는 선혈을 콸 콸 쏟고 있었다. 세계의 암살사를 다 뒤져도 이런 초인적인 장면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준비없이 맞이한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이 모습이야말로 인간 박정희의 꾸밈없는 진면목이다.
박정희가 구두 끈을 푸는 뒷모습이 좋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인간은 앞 모습은 꾸밀 수가 있지만 뒷모습은 꾸밀 수가 없다.
뒷모습이야말로 그 인간의 참 얼굴일 것이다.
총알이 허파를 꿰뚫고 지나간 뒤에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한 그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우리가 본 그의 뒷모습이었다.
이런 행동은 죽음과 오랫동안 대면해 왔던 사람, 그리하여 죽음과 친구가 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는 어머니가 임신 했을 때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애썼던 생명이었다. 44세에 며느리를 둘이나 둔 어머니는 박정희를 임신하자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 기절해 보기도 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 상처를 내보기도 했다고 한다. 무거운 것을 배에 얹어서 뒤로 넘어져 보기도 했으나 뱃속의 생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서는 안 될 생명'이 태어났고 이 인물에 의하여 이 나라가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었으니 운명적이란 말로써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는 지옥의 문턱까지, 그리고 인생의 골짜기까지 떨어졌던 경험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이다. 남로당에 포섭되었다가 탄로가 나서 전기고문을 받는 가혹한 수사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의 인간됨을 아낀 많은 사람들의 운동에 의해서 생환했다.
그때 동거하던 이 모 여인은 가출하여 그를 버렸고 피난 중 부산의 어느 술집에서 이상한 관계로 재회했다. |
식민지 생활의 울분,
해방 후 사상 대결에서 겪었던 비참함을 하나의 거대한 응어리로 만들어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응어리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지 않고 민족적 차원에서 풀어간 점에서 그가 혁명가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응어리는 그의 동력원이었다.
이 응어리로 해서 그는 미국에 도전하는 엄청난 오기를 부릴 수 있었다.
타고난 반골인 그는 경제개발을 통해서 물질적인 기반을 확보한 다음,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주국가의 건설을 최종목표로 설정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소심담대한 사람이었다. 즉 마음은 여리고 부끄럼을 타며 간은 큰 사람이었다.
육영수와 선을 보러갈 때는 가슴이 떨려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간 사람이 총구 앞에서는 태산처럼 의연했다.
그의 집무실은 서재로 불렸다. 그는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유교적 교양인이기도 했다.
정확한 용어 선택과 늘 핵심을 찌르는 그의 말은 박정희가 1급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추진력은 골똘한 사색에서 나왔다. 그가 이룩한 엄청난 물질적인 성취의 바탕이 되었던 이 정신력을 간과하고는 박정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년의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허전함으로 해서 내면이 해이해졌다. 그를 둘러싼 권력의 갑옷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에 의해서 경직되어 갔다.
이 허전함과 경직됨의 틈바구니에서 김재규의 총탄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로 하여금 영웅으로 죽게 만든 김재규는 저승에서 박정희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지 누가 아는가. 글쓴이 :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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