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은 대부분 남방의 농경문화 민족에서 그리고 일부는 북방의 유목·기마 민족에서 비롯돼 ‘이중의 민족기원’을 지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실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사실이다. 환단고기, 규원사화 참조)
또 한국인과 몽골인이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결과와 달리,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중국 베이징 한족과 만주족, 일본인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이 연구결과는 지금까지 한국인의 민족기원과 관련한 연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김욱 단국대 교수(인류유전학) 연구팀은 17일 “한국인을 비롯한 중국·일본·베트남·몽골 등 동아시아 11개 민족집단에서 1949명의 유전자를 조사·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북방계보다는 주로 남방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러나 북방계도 뚜렷해 ‘이중의 민족기원’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는 저명한 국제학술지 〈휴먼 지네틱스〉의 지난해 12월호에 발표됐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위해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유전되는 두가지 염색체의 디엔에이(DNA)를 이용해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추적했다. 하나는 아버지에서 아들한테만 전수되는 ‘와이(Y) 성염색체’의 디엔에이이며, 다른 하나는 난자 세포에만 존재해 모계로 전수되는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다. 김 교수 연구팀은 2001~2003년 한국과학재단 지원으로 11개 민족 738명의 와이염색체를, 2002~2003년엔 8개 민족 1211명의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를 비교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어냈다.
먼저, 와이염색체를 분석한 결과는 ‘한국인의 원류는 북방 민족’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김 교수는 “16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대인(호모 사피엔스)은 6만~8만년 전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주 집단의 한 갈래가 2만~3만년 전 아시아 남쪽으로 가는 과정에서 와이염색체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엠(M)175’라는 유전자형을 지니게 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에 와이염색체를 비교해보니 한국인 75%에서 이런 유전자형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한국인 10명 가운데 7, 8명이 아시아 남쪽으로 이동하던 2만~3만년 전의 집단과 동일한 와이염색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골인을 뺀 동아시아인 대부분에서 엠175 유전자형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이런 사실은 엠175 유전자형 집단이 중국 중북부인 황허·양쯔강 유역에서 농경문화를 이룩해 인구의 대팽창을 일으키면서 5천년 전쯤 한반도와 다른 아시아 남부로 퍼져나갔다는 유전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실체가 파악이 될것임. 기마민족의 주류는 동이족이었으며 기마민족의 내분으로 중국의 한(漢)족이 떨어져 나가고 동이족은 한반도를 비롯해서 중국의 동쪽과 북쪽까지의 영역을 차지하였음-밑에 자료 참고.
그러나 이번 연구에선 중국 중북부 농경민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남방계와 별개로, 한국인에선 몽골·시베리아 북방계 와이염색체의 유전자형(20%)도 발견됐는데, 이는 남방계가 대규모로 옮아오기 이전에 알타이산맥이나 시베리아 바이칼 주변에서 빙하기를 피해 남하한 집단이 먼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풀이된다. 결국 “지금의 한국인은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일부 북방계와, 대규모로 이동해 들어온 남방계 농경민족이 섞여 이뤄졌다”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이다.
(한민족의 주류는 북방의 기마민족이었으며 바이칼 호를 중심으로 환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밑에 자료 참조)
이와 함께 연구팀은 이번 11개 민족집단의 비교분석을 통해, 2300년 전쯤 농경문화를 전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적 증거도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이 주로 중국 중북부 농경문화에서 비롯했다는 와이염색체의 분석결과는 이 연구팀이 따로 벌인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의 분석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김 교수 연구팀의 결론은 ‘한국인과 몽골인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팀의 연구결과와 달라 논란을 일으킨다. 지난달 30일 김종일 한림대 교수(생화학교실)는 ‘한국인 66명과 몽골인 72명의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를 분석한 결과 두 민족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는 중간 연구결과를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교수는 “우리는 한국·몽골인 사이의 유전적 관련성만을 연구한 것이며 연구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며 “이런 점에서 다른 결론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cheolwoo@hani.co.kr
~~~~~~~~~~~~~~~~~~~~~~~~~~~~~~~~~~~~~~~~~~~~~~~~~~
고대 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큰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도 시작되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환국桓國과 배달국, 그리고 그 뒤의 단군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구환족九桓族, 즉 구이九夷들은 중원대륙의 대부분을 활동무대로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학자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부터 은나라와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의 활동 범위는 실로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의 산동성 전부와 하북성의 발해 연안, 하남성의 서북, 안휘성의 중북부 지역, 호북성의 동쪽, 그리고 요동반도와 조선반도 등 광대한 구역이며, 산동반도가 그 중심 지역이다.』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동이족이 차지하고 살았으며 중국인들의 시조인 삼황오제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은 중국의 학자들 스스로 수많은 자료와 문헌, 유물 등을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며, 저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들의 뿌리를 뒤엎는 혁명적인 주장을 할 리는 만무하다.
결국 고대 중국의 역사는 곧 동이족의 여러 지류가 중원으로 흘러들어가 서로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성립된 왕조들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도 넓은 대륙에 산재한 56개의 소수민족은 그 잔영임이 틀림없다.
~~~~~~~~~~~~~~~~~~~~~~~~~~~~~~~~~~~~~~~~~~~~~~~~~~~~
뉴스 9]`일본인 선조 한반도서 왔다`
[일본인들의 직계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음을 입증해 주는 DNA 결과가 일본에서 나왔습니다. 돗토리대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팀은 돗토리현의 한 묘에서 출토된 유골 7점에서 DNA를 추출해 미토콘드리아와 DNA 염기배열을 분석한 결과 기원전 4, 5세기, 벼농사를 시작했던 일본 야요이인들의 DNA가 한국의 현대인, 그리고 혼슈의 일본인과 동일한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 환국(桓國) : 인류문명사의 뿌리 되는 세계 최초의 시원문명국가인 환국의 실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보면 “석유환국(昔有桓國)”, 즉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환국의 ‘국(國)’자를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인(因)’자로 변조하여 환국, 배달, 조선의 창업자 환인·환웅·단군을 모조리 도매금으로 신화의 인물로 몰아붙이고 한민족의 뿌리사를 송두리째 거세시켜 버렸다.
12환국으로 나누어 다스린 환국은 천산(天山) 동방에 남북 5만 리, 동서 2만여 리의 방대한 지역에 걸쳐 광역동방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환국은 7대의 환인이 3,301년(서기전 7199∼3898) 동안 다스린 것으로 전하고 있다.
(2) 배달(倍達) : 환국 말기인 약 6천 년 전, 환국의 환인의 명을 받은 환웅(桓雄)께서 동방문명개척단 3천 명을 거느리고 동방 태백산(백두산) 신시(神市)에 와서 토착족인 웅족, 호족을 융합하여 배달국을 건국함으로써 민족사의 첫 기원을 열었다.
즉 상고시대 한민족사의 최초의 도시인 신시에 도시국가를 열고 단군의 고조선 이전의 환웅천황의 통치시대인 배달 신시시대를 개창하였다. 이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 등과 신교의 도가사서인 『삼성기』(상·하), 『태백일사』, 『규원사화』 등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 민족을 반만년 배달 민족, 배달의 후예라고 일컬어 온 데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고조선 이전에 환웅의 배달 신시시대가 엄연히 있었다. 모두 18대 환웅천황이 1,565년 간(서기전 3898∼2333) 배달 신시시대를 통치한 것으로 전해 온다.
(3) 조선(朝鮮) : 고조선을 개창한 국조 단군성조께서는 “여요동시(與堯同時)”라고 하여 중국의 요임금과 동시대 인물이었음이 『삼국유사』, 『응제시주』, 『세종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 『관자』, 『산해경』 등 중국 고대 사서에서는 고조선의 머리와 몸체는 거세해 버리고 꼬리 되는 말기의 역사만을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왜곡 날조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단군의 고조선은 초기에 이미 청동기시대에 진입해 있었고, 법률제도(팔조법)가 있었으며, 문자(원시한글인 가림토·고대신지문, 圖畵문자와 문자토기의 발견)를 사용했다. 또한 화폐제도(명화전·일화전, 팔조법 중 50만 전 배상 내용), 조세제도(1/20세), 토지제도(均田制), 역(易)철학과 음양오행 상수(象數)철학, 책력법(曆法) 등 고도의 선진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문명국가 시대였다. 단군의 고조선은 신교 삼신사상에 입각하여 전영토를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하였고, 모두 47대의 단군이 2096년 동안(서기전 2333∼238) 다스린 고대 한민족사의 최대의 전성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