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아야기

[스크랩] 대한 민국의 뿌리를 찾자 !!!

ria530 2013. 6. 14. 16:56

한민족의 뿌리


한국인은 대부분 남방의 농경문화 민족에서 그리고 일부는 북방의 유목·기마 민족에서 비롯돼 ‘이중의 민족기원’을 지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실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사실이다. 환단고기, 규원사화 참조)

또 한국인과 몽골인이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결과와 달리,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중국 베이징 한족과 만주족, 일본인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이 연구결과는 지금까지 한국인의 민족기원과 관련한 연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김욱 단국대 교수(인류유전학) 연구팀은 17일 “한국인을 비롯한 중국·일본·베트남·몽골 등 동아시아 11개 민족집단에서 1949명의 유전자를 조사·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북방계보다는 주로 남방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러나 북방계도 뚜렷해 ‘이중의 민족기원’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는 저명한 국제학술지 〈휴먼 지네틱스〉의 지난해 12월호에 발표됐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위해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유전되는 두가지 염색체의 디엔에이(DNA)를 이용해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추적했다. 하나는 아버지에서 아들한테만 전수되는 ‘와이(Y) 성염색체’의 디엔에이이며, 다른 하나는 난자 세포에만 존재해 모계로 전수되는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다. 김 교수 연구팀은 2001~2003년 한국과학재단 지원으로 11개 민족 738명의 와이염색체를, 2002~2003년엔 8개 민족 1211명의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를 비교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어냈다.

먼저, 와이염색체를 분석한 결과는 ‘한국인의 원류는 북방 민족’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김 교수는 “16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대인(호모 사피엔스)은 6만~8만년 전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주 집단의 한 갈래가 2만~3만년 전 아시아 남쪽으로 가는 과정에서 와이염색체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엠(M)175’라는 유전자형을 지니게 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에 와이염색체를 비교해보니 한국인 75%에서 이런 유전자형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한국인 10명 가운데 7, 8명이 아시아 남쪽으로 이동하던 2만~3만년 전의 집단과 동일한 와이염색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골인을 뺀 동아시아인 대부분에서 엠175 유전자형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이런 사실은 엠175 유전자형 집단이 중국 중북부인 황허·양쯔강 유역에서 농경문화를 이룩해 인구의 대팽창을 일으키면서 5천년 전쯤 한반도와 다른 아시아 남부로 퍼져나갔다는 유전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실체가 파악이 될것임. 기마민족의 주류는 동이족이었으며 기마민족의 내분으로 중국의 한(漢)족이 떨어져 나가고 동이족은 한반도를 비롯해서 중국의 동쪽과 북쪽까지의 영역을 차지하였음-밑에 자료 참고.

그러나 이번 연구에선 중국 중북부 농경민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남방계와 별개로, 한국인에선 몽골·시베리아 북방계 와이염색체의 유전자형(20%)도 발견됐는데, 이는 남방계가 대규모로 옮아오기 이전에 알타이산맥이나 시베리아 바이칼 주변에서 빙하기를 피해 남하한 집단이 먼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풀이된다. 결국 “지금의 한국인은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일부 북방계와, 대규모로 이동해 들어온 남방계 농경민족이 섞여 이뤄졌다”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이다.

(한민족의 주류는 북방의 기마민족이었으며 바이칼 호를 중심으로 환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밑에 자료 참조)

이와 함께 연구팀은 이번 11개 민족집단의 비교분석을 통해, 2300년 전쯤 농경문화를 전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적 증거도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이 주로 중국 중북부 농경문화에서 비롯했다는 와이염색체의 분석결과는 이 연구팀이 따로 벌인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의 분석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김 교수 연구팀의 결론은 ‘한국인과 몽골인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팀의 연구결과와 달라 논란을 일으킨다. 지난달 30일 김종일 한림대 교수(생화학교실)는 ‘한국인 66명과 몽골인 72명의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를 분석한 결과 두 민족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는 중간 연구결과를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교수는 “우리는 한국·몽골인 사이의 유전적 관련성만을 연구한 것이며 연구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며 “이런 점에서 다른 결론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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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큰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도 시작되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환국桓國과 배달국, 그리고 그 뒤의 단군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구환족九桓族, 즉 구이九夷들은 중원대륙의 대부분을 활동무대로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학자 서량지徐亮之 《중국사전사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부터 은나라와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의 활동 범위는 실로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의 산동성 전부와 하북성의 발해 연안, 하남성의 서북, 안휘성의 중북부 지역, 호북성의 동쪽, 그리고 요동반도와 조선반도 등 광대한 구역이며, 산동반도가 그 중심 지역이다.』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동이족이 차지하고 살았으며 중국인들의 시조인 삼황오제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은 중국의 학자들 스스로 수많은 자료와 문헌, 유물 등을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며, 저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들의 뿌리를 뒤엎는 혁명적인 주장을 할 리는 만무하다.

결국 고대 중국의 역사는 곧 동이족의 여러 지류가 중원으로 흘러들어가 서로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성립된 왕조들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도 넓은 대륙에 산재한 56개의 소수민족은 그 잔영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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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9]`일본인 선조 한반도서 왔다`

[일본인들의 직계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음을 입증해 주는 DNA 결과가 일본에서 나왔습니다.
돗토리대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팀은 돗토리현의 한 묘에서 출토된 유골 7점에서 DNA를 추출해 미토콘드리아와 DNA 염기배열을 분석한 결과 기원전 4, 5세기, 벼농사를 시작했던 일본 야요이인들의 DNA가 한국의 현대인, 그리고 혼슈의 일본인과 동일한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 환국(桓國) : 인류문명사의 뿌리 되는 세계 최초의 시원문명국가인 환국의 실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보면 “석유환국(昔有桓國)”, 즉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환국의 ‘국(國)’자를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인(因)’자로 변조하여 환국, 배달, 조선의 창업자 환인·환웅·단군을 모조리 도매금으로 신화의 인물로 몰아붙이고 한민족의 뿌리사를 송두리째 거세시켜 버렸다.

12환국으로 나누어 다스린 환국은 천산(天山) 동방에 남북 5만 리, 동서 2만여 리의 방대한 지역에 걸쳐 광역동방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환국은 7대의 환인이 3,301년(서기전 7199∼3898) 동안 다스린 것으로 전하고 있다.

(2) 배달(倍達) : 환국 말기인 약 6천 년 전, 환국의 환인의 명을 받은 환웅(桓雄)께서 동방문명개척단 3천 명을 거느리고 동방 태백산(백두산) 신시(神市)에 와서 토착족인 웅족, 호족을 융합하여 배달국을 건국함으로써 민족사의 첫 기원을 열었다.

즉 상고시대 한민족사의 최초의 도시인 신시에 도시국가를 열고 단군의 고조선 이전의 환웅천황의 통치시대인 배달 신시시대를 개창하였다. 이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 등과 신교의 도가사서인 『삼성기』(상·하), 『태백일사』, 『규원사화』 등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 민족을 반만년 배달 민족, 배달의 후예라고 일컬어 온 데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고조선 이전에 환웅의 배달 신시시대가 엄연히 있었다. 모두 18대 환웅천황이 1,565년 간(서기전 3898∼2333) 배달 신시시대를 통치한 것으로 전해 온다.

(3) 조선(朝鮮) : 고조선을 개창한 국조 단군성조께서는 “여요동시(與堯同時)”라고 하여 중국의 요임금과 동시대 인물이었음이 『삼국유사』, 『응제시주』, 『세종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 『관자』, 『산해경』 등 중국 고대 사서에서는 고조선의 머리와 몸체는 거세해 버리고 꼬리 되는 말기의 역사만을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왜곡 날조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단군의 고조선은 초기에 이미 청동기시대에 진입해 있었고, 법률제도(팔조법)가 있었으며, 문자(원시한글인 가림토·고대신지문, 圖畵문자와 문자토기의 발견)를 사용했다. 또한 화폐제도(명화전·일화전, 팔조법 중 50만 전 배상 내용), 조세제도(1/20세), 토지제도(均田制), 역(易)철학과 음양오행 상수(象數)철학, 책력법(曆法) 등 고도의 선진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문명국가 시대였다. 단군의 고조선은 신교 삼신사상에 입각하여 전영토를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하였고, 모두 47대의 단군이 2096년 동안(서기전 2333∼238) 다스린 고대 한민족사의 최대의 전성기였다.

동북공정 1 . 고구려 천리장성이 중국 만리장성 둔갑

9월 22일부터 심양을 출발하여 연길 환인 집안으로 이어지는 역사기행 마지막날 27일 우리는 고구려 박작성으로 향했다. 우리는 미리 공부를 한대로 이곳이 박작성임을 알고 있었지만 가보니 호산장성이라 되어있었다.(박작성으로 쓰여 있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음.. 내가 못 본걸까..)

천리장성의 마지막 보루 박작성

요동반도의 천산산맥을 따라 세운 이차방어선 그리고 요동반도 남단해안선을 따라 세운 삼차방어선이 그곳인데 고구려 천리장성의 마지막 보루가 바로 단동시 일대의 박작성이다 .

고조선과 고구려가 존재하던 시절 중국 세력이 압록강가에 성을 세웠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고구려가 압록강 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호산촌은 압록강 하구에서 30㎞쯤 들어온 단동에서 차로 20분쯤 걸리는 곳에 있으니, 압록강 하구로부터는 대략 100리 안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는 ‘648년 내주(萊州)를 출항한 3만여 명의 당나라 수군이 압록수를 100여 리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泊灼城)이라는 고구려 산성에 이르렀다. 박작성에서는 성주인 소부손(所夫孫)이 기병을 이끌고 나와 대항하다 무너졌다. 박작성은 산을 의지해 요새를 구축했고 압록수가 가로막고 있어 견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호산촌에서 발견된 산성 유적은 박작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동아 8월호 중에서 발췌 전문보기)


<고구려 천리장성이 표시된 지도 >

역사왜곡의 바로 그 현장으로 찾아가보자

중국명 '호산장성'
  



박작성 입구, 천혜의 요충인 박작성을 기어코 함락시키지 못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지 말라(罷遼東之役)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한다.
지금 중국에서 부르는 데로 이곳의 간판은 호산장성이라고 걸려있다.
. 호산산성도 아니고 호산장성 즉 만리장성의 일부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성을 만리장성으로 둔갑시켜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호산장성으로 인해 만리장성이 압록강가에 이르게 된다면 중국의 역사와 정치 무대는 갑자기 넓어지고, 만리장성 바깥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동이족인 한민족의 정치와 역사 무대는 현저히 오그라들게 된다.

호산장성 입구에서 뒤로 돌아보자.




저 멀리 동상이 보인다 . 가까이 가보면.. 



동상 아래쪽에 머라고 써 있나하면..


만리장성 동단기점 호산 ? 이라 되어있다.

만리장성은 감숙성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원래 산해관 에서 끝나는것이고 요동지역에는 원래 정교한 성책이 아니라 요새만 드문드문 있었을 뿐이다 . 이것을 마치 만리장성이 옛날 진나라 때부터 여기 이 모습대로 구축된 것처럼 왜곡한 것이다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 호산장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호산장성 간판 바로 아래에서 가이드가 설명을 하고 있다. 곧 같이 올라가서 명때 지은 만리장성이라고 어떻게 지어놨는지 살펴보자  



단동지역의 지리와 주변 고구려 역사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천제지군님 / 이번에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 .. (사학과 나온지 처음 알았다 ;;;)

자 이제 천제지군님과 함께 성곽을 올라가 본다 ^^


명대 성곽이라고 90년대 중반 지어놨다.
명대 성곽은 원래 벽돌로 쌓는 것이다 화포 공격을 막아내도록 벽돌로 쌓고
총구를 설치해놓았다 벽돌로 쌓는 이유는 화포공격을 받더라도 일부만 파괴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후기 때 도입되어 우리나라 수원성은 이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의 천제지군님이 여행사 가이드에게도 설명해주고 있다.
천제지군 : "여기는 호산산성이 아니라 박작성이니 앞으로 박작성으로 알려주어야 해요 . 만리장성이 아니고 고구려 천리장성이 있었던 곳이에요 아셨죠? "
가이드 : "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다음에 여행 오시는 분들에게 꼭 그렇게 얘기할께요 "
이런 저런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을 들으면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져본다 ^^


한편 성곽 한쪽에서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와 있었다. 가이드가 열심히 중국어로 관광객들을 안내하고 있다 " 이곳이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입니다!!' 아마도 자랑스럽게 왜곡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 말을 알아들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한판 크게 붙었을 것 같다 .

성곽을 내려와서 아래쪽으로 성문을 통과해 들어가본다.
시멘트로 바른 성벽 균형이 맞지 않는 돌들을 쌓아놓고 중간중간 시멘트로 발라놓은 성곽
성문안쪽에는 장사하시는 분들이 여러가지 늘여놓았다.
 

중국에서 만든 장성이다 시멘트로 벽돌고 벽돌 사이를 발라놓은 것이 확연히 보인다.고구려성의 건축방식이 아니다 . 고구려 고유의 건축방법은 들여쌓기 , 퇴물림쌓기, 수평쌓기, 그랭이공법 등으로 고구려 석공의 솜씨가 대단하다. (요건 나중에 ..)

자 성안으로 조금 들어가서 오른쪽을 돌아보니 아래와 같이 고구려 성곽의 특징이었던 치가 나온다


<파란색 부분이 '치' 빨간색 부분은 '고구려 성벽의 잔해를 모아놓은것'>

고구려 성벽특유의 방어시설인 치(雉) 즉 사각형의 돌출부 성벽을 오르는 적병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그런데 사진에 보이는 것은 명대의 건축양식으로 쌓은 치로 원래 박작성에서는 서북요동방면으로 되어있어야 할 것을 한반도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성벽이 바라보는 방향도 한반도 방향으로 고쳐놓은 것이다

그리고 아래 보이는 돌무더기(위 사진 빨간색 네모)는 고구려 성벽의 일부 잔해를 치워서 쌓아 놓은 것이다 .


실제 고구려 성벽 벽돌은 저렇게 대충 주변에다가 쌓아 놓았다. 실제 유적은 파헤쳐버리고 지네들 건축방식으로 지어놨다. 이게 현실이다 ㅠ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당태종을 구한 설인귀.. 그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한 패장임에도 불구하고 당의 대장군까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 이곳에서 크게 다루고 있다. 고구려를 어떻게 누르려 하는지 이 장군의 그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진 왼쪽 아래 박물관으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박물관으로 gogogo!

중국 명 만리장성 동단기점 ㅜ-



(고구려 유적 답사 내내 촬영금지라는 말을 밥 먹듯 들은 우리, 들어가기 전 물어봤다. ‘사진 찍어도 되나요?’ 그러자 가이드님의 말씀 ‘여기서는 사진 안 찍으면 벌금입니다.^^’ 순간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 중국 만리장성이고 중국 문화이니 찍으란다 .. 고구려 문화유적은 찍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더니.. 이곳은 만리장성 동단지점이란다.. 한국사람 보라고 한글로 적어 놓은 것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 아무튼 이 악물고 들어가서 다 찍어서 실상을 알려줄테다.- -;

이 박물관 외벽에는 한글로 ‘중국 명(明) 만리장성 동단(東端) 기점’ ‘만리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기점(起點)에 가지 않으면 유감을 남긴다’는 등의 문구도 한글로 적혀 있다. 여러 가지로 만리장성의 일부라는 사기질은 계속되고 있다.

백보 양보해서 만리장성이 있었다고 치자. 그럼 그자리 유적을 고증을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성을 뜯어버리고서 세웠다는 것이 문제다.

자 그럼 어떻게 왜곡해놓았는지 박물관 안으로 gogogo !!


< 만리장성이 표시된 지도 : Sgabhai Pass라고 동단에 써있다 산해관이 동쪽 끝으로 되어있다. ~ ↑요거는 박물관 안에 있는 지도 아님>

중국에서 나오는 모든 사료는 '명대에 완성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하북성(河北省) 발해만 연안의 산해관(山海關)이고, 서쪽 끝은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감숙성(甘肅省)의 가욕관(嘉?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산해관에 가면 노용두(老龍頭)라는 곳에서 바다(발해만)에 맞닿아 있는 만리장성을 볼 수 있다. 또 그곳에서는 ‘이곳이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아래쪽 이 박물관에 전시된 만리장성 지도를 보시라.. 산해관을 넘어넘어 구비치고 있지 않은가-_-




훌륭한 우리 선생님 : 중국 만리장성은 바로 펜이 가리키는 요 부분까지이고 나머지는 그냥 그린 겁니다. 아시겠죠? (물론 명나라때 저기까지 확장을 한것이지 진시황때는 아니다)

좀더 확대해서 볼까요?



자 빨간 테두리 안의 부분은 만리장성과 상관없는 부분이다 왜 저리 구비구비 그림을 그려놨는지.. 참 알 수 없는 역사 콤플렉스인듯 ...... (혹 앞으로 발굴된다고 해도 왜 있는 성곽 무너뜨리고 세우냐 이거다 )

조금 더 옆으로 가보면 위 지도보다 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주본 토인.. 진나라 시대였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워놨다. 티가 팍 나는 배열 -_-;;; 머가 티나는지 아시죠?

이 전시 배열의 핵심은 바로 오른쪽 아래의 지도에 있다. 아예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 모형도 가져다 놓고 서는 지도를 합리화 하려하고 있다. 하여간 지도가 문제야 문제!

지도를 좀더 확대해보자




헉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TV에도 소개된 것철머 만리장성은 평양까지 와 있다. 지도만 보면 그렇다.

위의 지도에서는 단동까지도 만리장성이 축조된 것처럼 하더니 그것보다 더 오래전인 진시황때 이미 평양까지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거다. 이런 개사기꾼들같으니라구../버럭/

진시황때 만리장성을 임의대로 대동강 하구 까지 그어놓고는 호산장성은 진시황의 만리장성 자리 위에 만들었다고 왜곡을 하고 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대동강까지 왔다는 기록 자체가 전혀없다.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도 없다

"고구려 성벽이 보여요"

먼저 올라간 한 여성분이 헐레벌떡 내려온다. " 고구려 성벽이 보여요 "
우리 일행은 모두 박물관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리켜준 곳을 향해서 한참을 보니 멀리서 흔적이 보인다.

버려진 고구려 성곽.. 흔적.. 팽개쳐진 우리의 역사를 보는 것같아 눈시울이 .. ㅜㅜ


<박물관 3층 옥상에서 보면 멀리 수풀 속에서 고구려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진 가운데 부분 ㅠ ㅠ >



TV에서 동북공정 관련 프로그램 등을 보고 책을 통해서 본 내용을 직접 와서 생생하게 접하고 나니 정말로 우리 역사의 허리를 잘라가고 왜곡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미래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앞서 우리는 우리의 옛 조상의 왕릉과 귀족들의 릉을 돌아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일구어놓은 옛 땅에와서 우리는 조상들에게 절조차 하지 못하였다.(공안은 절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다)



궁극에 그들이 주장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당나라 시대 고구려와 발해는 모두 자신들의 식민지라는 것이다 . 아니 당나라 땅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지도를 구글(google.com)을 검색해보거나 캐나다,미국 교과서 등등을 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지금 단동의 만리장성은 가짜지만 10년 후면 그 가짜가 진실이 되고 백년후면 역사가 된다.

이제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면 그나마 주변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박작성터는 완전히 없어지고,우리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교과서에도 만리장성이 압록강까지 이어져 있다고 기술될 것이다

var anchor_links = document.getElementById("brd_content_1").getElementsByTagName("A"); for(i=0; i< anchor_links.length; i++){ if(i == 0 && anchor_links[i].id == "target1") { } else { anchor_links[i].target = "_blank"; } }

이는 일본이 행한 역사말살정책과 다르지 않다. 아니 일본이 한 것을 중국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이라고 하는 역사왜곡의 나라들에 둘러 쌓여서 하나하나 역사와 혼을 잃어가고 있는것이다.

이덕일 교수는 그의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동북공정뿐만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의 전선에 서 있다."

동북아 한중일 역사전쟁 그리고 현실의 위기상황


과연 ..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나더

만리장성의 동단지점으로 설명하는 한심한 대한민국 여행사 몇몇

< ㄱ 여행사의 여행일정에서 호산장성을 만리장성 최동단기점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ㅎ 투어 여행사 홈페이지에는 '중국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호산장성 등이 있다' 라고 왜곡되어 설명되어있다. 직접 링크 눌러서 확인해보시길..

http://www.hanatour.com/asp/travelinfo/if-13000.asp?city_code=DDG

고구려성의 만리장성 왜곡 편을 마치며 ..중국의 훼손과 왜곡 두번째 글을 기다려주세요


중국, 발해사 편입작업 본격화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작업이 노골화되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 후예가 건립한 발해(대진국)의 옛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에 대한 복원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헤이룽장성은 이 사업을 법률로 뒷받침하기위해 유적지 보호 조례를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당국은 최근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이 약탈해 간 발해비석 ‘홍려정비’의 반환도 일본 측에 요구했다. 발해수도를 ‘중국역사’로 유네스코에 등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발해를 ‘당나라 때 중국 동북지역에 말갈족과 다른 민족이 세운 소수민족 정권’으로 못박고 있다. 지난 1961년 상경용천부 유적을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으며, 지난 2002년부터 5개년계획으로 복원 준비작업을 해왔다. (5.30)
 
 
 
 “한-일-몽골의 뿌리는 하나 … 중국 한족과는 달라”
 김운회 동양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대쥬신을 찾아서』(해냄)에서 몽골·만주·한반도·일본을 연결하는 문명사적 벨트의 주역이자 공통의 민족적 시원으로서 이들 지역에 금속문명을 전파한 ‘쥬신’이라는 유목민족을 제시했다.
 
 그동안 중국의 사서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거주한 동이(東夷)족을 크게 동호(몽골, 거란), 숙신(말갈, 여진), 예맥(고조선, 부여, 고구려)으로 분류해 왔다. 한국학자들은 이 중 예맥족이 한반도 남부의 한(韓)족과 결합해 오늘날의 한민족이 됐다고 설명해 왔다.
 
 이런 가운데 제기된 김교수의 대쥬신론은 “동호, 숙신, 예맥은 물론 한민족과 일본민족까지 동일 원류에서 비롯했으며, 이는 중국 한족과는 뚜렷이 차별되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김교수는 만주족이 세운 금과 청의 역사서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신라 출신의 김함보(金函普)라 밝히고 있음에 주목한다. 금과 청은 이에 따라 자신들의 성(姓)을 금(金)을 뜻하는 아이신자오뤄로 지으면서 그 한자 표기를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새겼다.
 
 
 고구려 사극, 중국과 외교문제로 비화되나
 대한민국 지상파방송 3사가 일제히 기획한 고구려 사극이 자칫 중국과 외교문제로 비화될 우려를 낳고 있다. 고구려 건국기를 재현한 MBC 〈주몽〉이 5월에 포문을 연 데 이어, 7월에는 중국과 당당히 맞선 고구려의 역사를 그린 SBS 〈연개소문〉이, 9월에는 발해 건국기를 그린 KBS 〈대조영〉이 방영된다. 광개토대왕 일대기를 그린 MBC 〈태왕사신기〉도 연말쯤 전파를 탄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중국 측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상하이 국제방송영상견본시 2006’에 참가한 중국측 방송관계자들은 “한국의 방송 3사가 일제히 고구려사를 다룬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 작업에 대한 한국정부 차원의 대응이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중국정부 내에서 해외방송 프로그램의 수입·심의를 담당하는 광전총국은 일방적인 ‘한류’ 수출을 문제삼아 올해 1월부터 한국드라마 심의를 전면 보류하고 있다. (6.22)
 
 
 “중국동북공정에 맞서 드라마 〈연개소문〉 기획”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은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논란인 동북공정에 대한 저항이 드라마의 중심 축이다. 이환경 작가는 〈연개소문〉을 기획한 이유에 대해 “중국의 동북아 공정에 맞서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은 고구려를 죽이고 있다”며 “아예 없는 나라 취급을 하려든다. 왜냐면 역사상 중국에게 그만큼 많은 패전과 열패감을 준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이 나서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중국의 불합리한 역사 사업에 태클을 걸고 싶었다고 한다. 드라마는 연개소문과 당태종과의 안시성 전투를 담은 1·2회분 촬영에 5개월을 소요했고, 총 제작비 400억원이 들어간다. (6.28)
 
 
 
 중국 “고구려 사람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
 지난해 7월 중국 지린성 지린시에 위치한 고구려 용담산성에 고구려 건국 주체가 중국한족이었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버젓이 세워진 게 목격됐다. 중국 지린성 정부가 세운 용담산성 안내판은 제목부터 ‘고구려 사람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高句麗人幷非朝鮮人)’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종합한 최신 연구결과 고구려가 중국 고대국가인 상(商, 기원전1600∼1046년)나라에서 나왔다는 것이 확정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그동안 고구려를 중국 동북 변방의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로 보아온 기존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의 기원 자체를 중국(한족)에서 찾은 것이다(상(=은)나라를 건국한 성탕의 혈통은 본래 한민족이다).

출처 : 광신상고20회
글쓴이 : 이한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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