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ulenc, Sonata for Clarinet and Piano
풀랑크 /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Francis Poulenc 1899-1963
Karl Leister, clarinet
James Levine, piano
Aula der Universitat, Salzburg
1989.04
프란시스 풀랑크는 20세기 전반에 프랑스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피아노 수업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선 풀랑크는 이후 작곡가로서 성장하면서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세속음악’과 ‘순수음악’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었는데, 영화음악 작곡에 몰두하기도 했으며 경음악과 종교음악을 동급으로 다루어 병행하여 작곡한 인물이기도 했다. 풀랑크는 에디트 피아프에게 곡을 헌정하기도 하였고,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 당대 유명 시인들과 교류하였다.
풀랑크는 1921~1924년에 샤를 쾨클랭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웠다. 바흐의 코랄 분석부터 시작한 이 수업으로 그는 아카펠라 기법에 숙달하게 된다. 발레곡 <암사슴>(Les Biches)은 1924년 전설의 발레 안무가 디아길레프가 무대에 올렸는데, 청중들은 물론이고 비평가들로부터도 최고의 찬사를 받아 그에게 결정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주로 기욤 아폴리네르와 폴 엘뤼아르의 시에 곡을 붙여 100곡 이상의 가곡을 잇달아 작곡했다. 패러디로부터 비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그의 가곡들은 성악과 반주의 선율이 이루는 미묘한 조화와 서정성으로 칭송받고 있다.
1929년에는 당대 최고의 쳄발로(하프시코드) 연주자로 꼽히는 반다 란도프스카(Wanda Landowska)의 권유로 쳄발로를 위한 <전원 협주곡>(Concert Champêtre)을 쓰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그의 건반악기 작품들처럼 이 곡도 18세기 프랑스 건반음악이 지니고 있는 경쾌하고 세련된 도시풍의 특징과 20세기의 화성을 하나로 조화시키고 있다. 1930년대에 그는 최초의 종교 합창곡 <로코마두르의 검은 성모의 연도>(Litanies à la Vierge Noire de Rocomadour, 1936)와 <G장조 미사곡>(Mass in G Major, 1937), <성모 애가>(Stabat Mater, 1951)를 비롯해 많은 종교 작품을 썼다. ▶독특한 웃음을 짓는 풀랑크의 캐리커처와 그의 작품명이 적힌 그림.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엘뤼아르의 시를 기초로 한 칸타타 <인간의 얼굴>(Figure Humaine)은 저항정신을 표명하고 있었으므로 나치 점령기에는 비밀리에 출판되었다.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Dialogues des Carmélites)는 20세기의 훌륭한 오페라로 꼽힌다. 그 외에도 풀랑크의 작품 중 널리 연주되는 것들로는 피아노와 관악 5중주를 위한 <6중주>(Sextet), <오르간 협주곡>(Organ Concerto), <오보에 소나타>(Oboe Sonata) 등이 있다.
풀랑크의 걸작은 대부분 성악과 합창 분야의 곡에서 나왔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길’(Les Chemins de L'Amour)이란 곡이 귀에 익다. 플랑크는 프랑스어 수사법에 비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학작품에 감동을 받았을 때 음악적 영감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선율을 아름답게 만드는 재능은 문학작품의 표현을 더욱 살려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를 음악적으로 작곡하는 것은 결코 편의상 타협이 아닌 사랑의 행위여야 한다. 나는 지성으로 시적인 문제를 음악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마음과 본능으로 노래하는 것이 훨씬 더 믿을 만하다.”
플랑크는 만년에 주로 관악기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에 치중하였다. 그중에서 오늘 감상하는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악단 지휘자로 유명한 베니 굿맨의 청탁으로 1962년에 작곡한 것이다. 이 곡은 1955년에 세상을 뜬 ‘6인조’* 시절의 동료 아르튀르 오네게르를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다. 운명의 아이러니라 할까? 풀랑크는 이 곡을 쓴 이듬해 1월 30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래서 1963년 4월 10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베니 굿맨(클라리넷)과 레너드 번스타인(피아노) 연주의 초연은 풀랑크 자신의 추모 연주회가 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보냈지만,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조언과 지지를 아끼지 않은 동료들과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던 예술가들이 있었다.
Anton Dressler/Alexander Kobrin - Poulenc, Sonata for Clarinet and Piano
Anton Dressler, clarinet
Alexander Kobrin, piano
Rachmaninov Hall of Moscow Conservatory
Russian Festival 'Homecoming'
2011.01
프랑스 6인조
‘6인조’(Groupe des Six 또는 Les Six)란 에릭 사티(Eric Satie)를 음악적ㆍ정신적 스승으로 하고 루이 뒤레(Louis Durey), 조르주 오리크(Georges Auric), 아르튀르 오네게르(Arthur Honegger), 제르멘 타유페르(Germaine Tailleferre), 프란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 그리고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등 20세기 초 프랑의 진보적인 젊은 작곡가로 구성되는 그룹을 일컫는 용어이다. ▶6인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란시스 풀랑크, 제르멘 타유페르, 루이 뒤레, 장 콕토, 다리우스 미요, 아르투르 호네게르. 벽에 조르주 오리크의 스케치가 걸려 있다.
장 콕토는 1918년에 ‘수탉과 아를르캥’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이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음악적 이상, 즉 독일의 ‘바그너주의’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뷔시의 ‘인상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6인조’라는 명칭은 그 후 1920년에 음악평론가인 앙뤼 콜레트가 <코메디아>라는 잡지에 러시아의 ‘5인조’에 빗대어 ‘6인조’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후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인조’는 1920년에 각 1악장씩 작곡하여 함께 묶은 6악장의 모음곡을 발표하여 신문의 문화면을 요란하게 장식하였다(그러나 곧바로 뒤레의 이탈로 그룹은 해체의 과정을 밟아간다). 1921년에는 나머지 5명이 장 콕토와의 공동 작업으로 발레곡 <에펠탑의 신혼부부>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이들마저도 미학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그 결속력이 느슨하게 되며 각기 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혁명적 정신은 곧잘 ‘러시아 5인조’에 비유되며, 이들이 개척한 음악어법은 오늘날 프랑스 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