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묘 (死六臣 墓) .. 김문기.박팽년.유응부.이개
김문기 (金文起. 1399~1456)의 묘
이 곳에 있는 김문기의 묘는 가묘(假墓)이다. 즉 봉분만 있는 묘인 것이다. 그의 호는 백촌(白村)으로 단종의 복위운동에서 그는 병력 동원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이 곳 사육신묘에는 그의 묘가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대통령 시절 김문기의 묘가 비록 가묘이기는 하지만 추가되어, 정확히 표현하면 死六臣墓가 死七臣墓가 된다.
김녕김씨(金寧金氏)의 후손들이 빵빵하다. 김문기의 영정도 새로 마련하고, 권력을 동원하여 이 곳 사육신묘에도 추가시키고....
김재규중정부장,김영삼전대통령 등등..후손들의 존숭은 아름답지만, 행여 김문기의 순수한 행적에 이러한 과잉행동이 오히려 누가 되는 것은 아닌지..괜히 오해만 불러 일으키니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과 이어 벌어지는 단종이 복위 운동에서 6의 의미는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 여섯명만이 복위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들만이 죽음을 당한 것도 아니다. 단지 생육신 남효온이 "육신전(六臣傳)"에서 6명만을 대상으로 그들의 행적과 처형되는 과정을 기록하였을 뿐이다. 거기서 사육신이란 표현이 유래되었을 뿐...
문제의 발단은 기록의 차이에서 있다. 世祖實錄에 의하면 유응부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김문기가 거론되어 있는 것이고, 六臣傳에는 김문기가 없고 유응부가 열거되어 있는 것의 차이일뿐 김문기도 兵力 動員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었고, 발각 후에도 변심치 아니하고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시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김문기의 후손이다. 같은 김녕김씨 (金寧金氏).... 그가 막후에서 위의 기록들을 근거로 사육신에서 유응부를 제외하고, 대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애매모호한 결정을 내린다. 김문기의 행적을 인정하고 현창하되, 사육신은 그대로이다.... 편법으로 여기에 김문기의 假墓가 들어 선 이유이다.
박팽년 (朴彭年. 1417~1456)의 묘
號는 취금헌(醉琴軒), 시호(諡號)는 충정(忠正)이며, 당시 박팽년은 형조참판이었다.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뛰어 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하여 단념하고 이때부터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 실천한다
사전에 발각되어 세조가 친국(親鞫)하는 자리에서 박팽년은 모의 사실을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서, 배신자 김질(金瓆)을 감옥으로 보내 자신에게 귀순하여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 줄 것이라고 은밀히 회유하였으나, 그는 詩 한 수를 남기며 거절한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 인들 어두오랴
님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아마 겉 희고 속 검을 손 너뿐인가 하노라
그는 세조를 가르켜 상감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르니까, 世祖가 노하여 " 그대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고 칭하였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고 하자
박팽년은 " 나는 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 한번도 신(臣)자를 쓴 일이 없다. " 고 대답하였다. 이에 세조가 조사를 시켜보니 과연 신(臣)이라 써야 할 대목에는 모두 거(巨)를 쓰고 있었다. 또한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녹(祿 ..일종의 급여)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창고에 봉해두고 있었다.
박팽년, 그는 사육신 중 유일하게 후손을 남긴다. 순천 박씨(順天 朴氏)이다. 전 국회의장 박준규, 영화배우 박노식,박준규 등이 그의 후손인 것이다. 선조실록에 그 사연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선조실록 1603년 4월 21일 기록이다.
사헌부에서 태안군수(泰安郡守) 박충후(朴忠後)를 탄핵하며 말하기를 " 박충후는 난리(인진왜란) 뒤에 出身한 사람으로 무재(武材)가 없고 또한 글을 알지 못한다.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는 실로 소임을 다하기 어렵다... 그리고 박충후는 文宗代의 충신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조가 六臣을 주살(誅殺)한 뒤에,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이었기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의 힘을 얻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이름을 비(斐)라 지었으며,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박충후는 그의 증손으로서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박팽년이 죽고 연좌제로 인하여 3族(할아버지.아버지.3형제) 이 모두 처형되었다. 남자 9명..여자는 모두 관노비(官奴卑)가 되었다. 박팽년의 손자며느리는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다행히 친정 아버지가 현감으로있는 경북 달성군 사동의 관노비가 되었다.
마침 같은 시기에 임신한 충직한 계집종이 있었는데, 며느리가 아들을 낳으면 자신이 낳은 자식과
맞바꾸자고 하였다. 마침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고, 그 계집종은 딸을 낳아 서로 바꾸고 이름을 박비(朴斐)라 지었다. 당시 세조의 지시는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노비로 삼으라 명하였다.
이 박비가 17세되던 해는 成宗시절이었다. 이미 중종반정으로 사육신에 대하여는 평가가 달라져 있었다. 박비는 官에 자수하고, 이를 보고받은 성종은 크게 기뻐하여 이름도 일손(一손)으로 지어 주었다. "일손(一손)은 유일하게 남은 옥구슬..이란 뜻이다.
유응부 (兪應孚. ? ~1456)의 묘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벽량(碧梁)이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그후 여러 벼슬을 거친다.
단종복위운동에서 성삼문,박팽년이 연출,기획이었다면 유응부는 행동대장이었다. 1456년 明나라 사신 환송연에서 유응부는 성승(成勝..성삼문 아버지)과 별운검(別雲劒)을 서면서 세조를 살해하는 역할을 맡았다. (別雲劒 .. 2품 이상의 무관이 왕 옆에서 호위하는 임시 벼슬)
그러나 한명회의 재치로 별운검은 제폐(除廢)되었고, 世子도 질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응부는 계속 거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이 것도 하늘의 뜻이라며 뒷 날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세조의 친국(親鞫)에 세조를 임금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른 사람이 성삼문과 박팽년이며, 유응부는 세조를 죽하(足下 ..동년배 또는 대등한 사람에 대한 존칭)라 부르며 世祖를 비아냥대어 끝까지 화를 돋군다.
세조 :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
응부 : 明의 사신을 초청하는 연회에서 내가 한자루 칼로써 족하(足下)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 금 을 복위시키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 (김질의 배신)에게 고발 당하였으니 다시 무
슨 말을 하겠소. 족하는 나를 빨리 죽여주오.
세조 : 너는 상왕(上王. 단종)을 북위시킨다는 명분으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 아닌가?
세조는 즉시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그 정상(情狀)을 심문코져 하였으나, 유응부는 끝까지 굴하지도,자복(自服)하지도 않 으며, 오히려 성삼문을 가리키며...
응부 : 사람들이 書生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내가 칼을
사용하려 하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
세조는 더욱 성이 나서 달군쇠를 가져와 유응부의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땅에 집어 던지며 "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간밤의 부든바람 눈셔리 치단말가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물며 뭇다 핀 곳치야 일너 무엇 하리오
어젯밤 모진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눈서리까지 쳤단 말인가. 정정한 큰 소나무가 다 넘어져 버렸으니, 하물며 아직 다 피지도 못한 꽃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는냐
유응부의 글씨
이개 (李塏. 1417~1456)의 묘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백옥헌(白玉軒), 시호(諡號)는 의열(義烈)이묘, 고려말의 대학자 이색(李穡)의 증손자이다. 그는 단종 복위운동을 위한 모의를 가장 먼저 주장하였다.
세조는 이개의 숙부인 이계전(李季甸)과 친분이 두터워 이개의 목숨만은 살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개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개는 이를 거절하고 의연히 처벌을 원하였다. 혹심한 고문 속에서도 이개는 안색조차 변함이 없어, 보는 이들이 오히려 놀랐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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