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2년( 1456)에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하위지 6명의 신하 즉 死六臣을 모신곳위패를 모신 祠堂인 義節祠가 있고 뒤 언덕에 7분의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등 사료의 내용이 서로달라 육신에 대한
논란이 있은후 김문기를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도 추가 했기 때문에
7인이 되며 그러나 여전히 사육신묘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시도 유형문화제 제18호이며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습니다.
노량진 전철역에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능,원,묘,궁전,관아 등의 입구에 세우는 불은 칠한 기둥으로 된 홍살문.
不二門입니다. 저 문을 들어가면 위패를 모신 의절사가 나옵니다.
문不二門은 충신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뜻이겠지요.
불이문 사이로 의절사가 보입니다.
의절사(사당)안에는 7분의 위패가 모셔져있음, 가운데 향로가 놓여 있음.
방명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방문객이 10에서 20명 안팍이네요.
의절사로 들어서면 좌측에 사육신 신도비각이 있다.
이 것은 1978년에 새로 조성된 것이며 비석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임.
비석은 정조6년(1782)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이다.
위 신도비 앞면에는 유명조선국 육신묘비명 이라는 글자가 보임.
비 측면에도 육신을 칭송하는 깨알 같은 글자가 기록되있음.
비석 뒷면(4면)에도 사육신을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 있음.
이 것은 1955년5월에 우리정부가 6각의사육신비를 세우고
각면마다 사육신의 이름과 업적을 새겨 놨다.
비석 하단에는 1955년5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라고 적혀 있음.
성삼문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운검을 잡고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결의 하여으나
동지인 집현전 출신인 김질이 밀고하는 바람에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고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양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않고 "나리"라 불렀음.
동생들과 아들들도 능지처형당하고 젖먹이까지 살해당함.
아내와 딸은 관비 팔려가고 가산은 몰수당함. 멸문의 참화를 당함.
사육신의 거의가 삼족이 멸하고 남아 있는 후손이 거의없음.
유성원
잡히기전 아내와 함께 집에서 자결함.
하위지 참살 당함.
유응부 조선의 장군
간 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지단 말가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세조가 국문하여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 " 라고 묻자
한칼로 족하(足下:세조를 가리킴)를 죽이고 본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다'고
대답하여 극심한 고문으로 죽음. 시뻘겋게 달군 단근질로 죽임을 당함.
jj
이개
숙부 계전이 세조와 친교가 두터워 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의연하게
관련자와 함께 거열형을 당함.
단근질과 거열형으로 죽임을 당함.
주)거열형: 죄인의 다리를 두대의 수레에 한쪽씩 묶어 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죽이던 형벌 조선중기 이후에는 금지되었다함.
박팽년
역시 단근질로 죽임을 당함.
김문기는
여기에 새겨있지는 않으나 사지가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함.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여자는 모두 노비로 끌려가는 등 집안은 모두 몰락해버림.
모반현의로 이때 70여명이 화를당함.
사당 의절사에서 내려다본 경내.
아래문을 나가면 언덕에 그분들의 묘가 있음.
단근질과 거열형의 극형으로 다흩터러진 시신을 모아
생육신 김시습이 이곳에 가져와 매장하였다함.
제일 먼저 보이는 묘가 이개. 무슨 연유인지 비명에 李氏之墓라고 만 되어있음.
유응부의묘 역시 兪氏之墓라고만 되어있음.
박팽년의 묘. 역시 朴氏之墓임
[사육신의 혼이 모셔져 있는 육신사(六臣祠)]
세종의 유명을 받아 문종을 보필하고 ,문종재위 어린 단종을 돕다 충청 관찰사로 나간사이 외직에 있는 동안 계유정란이 일어났고,그후 형조참판으로 제수되어
내직에 근무-단종복위를 도모하다 김질의 밀고에 의해 투옥되고 평소
박팽년의 재주를 아끼던 세조가 김질을 보내
모의사실을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회유했으나 끝내 거절하엿다.
화가난 세조의 모진 고문으로 8일만에 순절하고
부친을 비롯 4형제와 아들 3형제 모두 처형 당하였으며
모친,처,제수,며느리등 모두 대역죄의 가족이라 공신들의 노비나 관비가 되었다.
이때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는 임신중이었지만
관비로 친정동내 닭밭골로 내려 왔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죽음을 당하고 딸을 낳으면 관비가 되는 기구한 삶을 영위해야함.
해산을 하니 아들인지라 그무렵 해산한 여종의 딸과 바꿔치기 하여
외할아버지에 의해 박비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지게되어 대를 겨우 이을 수 있었다.
박비가 17세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 사실을 알고 자수하여 성종에게 사면 받고 돌아와 후손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러받아 종택을 짓고 묘골을 정착하였다.
이분이 바로 사육신의 여섯가문중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
묘골순천박씨 시조인 셈이다.
그 후손들이 절의묘節義廟란 사당을 세우고 할아버지 박팽년의
절의를 우러르며 제사를 모셨다함.
그런데 그의 현손인 계창이 고조부의 제사날 꿈에 다른 다섯분의 선생들이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다른분의 제사도 모셨고,
하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였답니다.
오랜 세월 훼손된 것을 1979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육신사는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번지에 있음.
유성원의묘
성삼문의 묘
성삼문은 태어날때 하늘에서 낳았느냐?하고 묻는 소리가 3번들렸다 하여 三問.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가면 성삼문 선생 가묘가 있는 노은단이 있음
또 옛 성삼문의 유허와 유허비도 있음.
하위지의묘
마지막으로 김문기의 묘
역시 金氏之墓라고만 되어있음.
한 언덕에 한분씩 누워 계시면 좋은데...
그리고 묘 하나하나 마다 가드레일이라도 둘러줘야지요.
우리의 최고 자랑하는 충절의 충신이라 칭송하는데...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영혼을 위로함과 동시에 그정신을 널리 현장코자
1978년 서울시에서 3000평 묘역에서 9000여평으로 확장하여 사육신 공원 조성.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는 의절사를 충절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음.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로 죽음을 당한 사육신에 비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켰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으로 불렀습니다.
김시습,원호, 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이들은 관직에 나가지않고
절의를 지킨 6명의 신하입니다.
매월당 김시습의 시
濯淸泉以自潔(탁청천이자결)
生六臣梅月堂金時習(생육신매월당김시습)
(朝鮮4代世宗17年乙卯1435~1493朝鮮9代成宗26年癸丑)
淸泉鳴咽作琴聲(청천명인작금성)
맑은 샘물은 흐느끼듯이 스스로 거문고 소리내고
流下澄潭靜不鳴(류하징담정불명)
저 맑은 연못에 흘러가서는 고요히 고여있네.
澈底澹於水鑑潔(철저담어수감결)
물밑까지 드러나 볼수있으니 거울같이 께끗하고
映空明似玉壼淨(영공명사옥곤정)
하늘이 여기에 비치니 옥으로 만든 항아리와 같이 맑아 보이네
濯纓濯足從吾好(탁영탁족종오호)
갓끈을 씻듯 발을 씻든 내하고 싶을대로 할것이고
觀水觀濶任意行(관수관활임의행)
물을 즐기든지 물결에 놀라든지 내마음대로 할수있네
魚鳥亦知了所樂(어조역지료소락)
물고기나 새들도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었인지 알아주니
得忘機處便忘情(득망기처편망정)
세상일 모두잊고 세상에 얽힌 인정도 잊어 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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