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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묘?

ria530 2012. 3. 14. 19:44

 

== 종묘 ==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 종묘는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왕조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봉행했던 곳이다.

• 종묘는 태조 3년 (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현재 정전에는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16실에 34위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 태조는 한양에 천도하여 궁궐의 위치르 결정한 다음 ‘도성의 좌측인

동쪽에 종묘(宗廟), 우측인 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한다.’는

원칙으로 그 터를 잡았다.

• 사적 제125호이며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http://jm.cha.go.kr (문화재청 종묘관리소/ 02-765-0195)

1. 외대문(정문)

종묘 정문은 남쪽에 사묘(祠廟)의 표문(表門)답게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문 안 서쪽으로는 본래 종묘를 지키는 수복방이 있었다. 정문은 원래 전면 중앙에 난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도로 면이 높아지게 되어 땅에 묻히고 지금은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다.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

- 하마비

종묘를 지나는 모든 사람은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선조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로

말에서 내려야한다는 비석이다. 1413년(태종13년)2월 예조의 건의로 종663년(현종4년)

10월에묘에 이르러서는 하마하도록 항식(恒式)을 삼았다. 하마비는 1663년(현종4년)

10월에 세운 것으로 “대소인원(大小人員)은 이곳에 이르면 모두 말에서 내려라(下馬)”

- 어정(御井)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종묘 친행시에 물을 마시던곳이다.

조선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우물의 형태는 원형이다.

우물의 깊이는 약 8m, 지름은 1.5m이며, 내부는 화강암의

축석재(築石材)를 사용하였다. 오랜기간 방치되어있던 것을

1985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 신로(神路)

“이곳의 가운데 길은 조상의 혼령들이 다니는 신로입니다.

의미를 존중하여 보행을 자제하여 주시기바랍니다.”

2. 망묘루(望廟樓)

향대청 남쪽에 위치하는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망묘루는 건물 중 한 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 연못

종묘에는 모두 3개의 연못이 있는데, 망묘루(望廟樓) 앞에 있는 연못은 방형(方形)으로 그 가운데에는 석단(石壇)을 쌓아 조성한 원형(圓形)의 작은 섬이 있다. 이곳에는 소나무를 심는 우리나라 전통 조경의 식재법과 달리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는 종묘제례 때 사용할 향을 자급자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외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연못이 있고 망묘루 앞의 연못과 정전 앞에 연못이 있다.

망묘루앞 연못

외대문 쪽 연못

정전 앞 연못

3. 공민왕 신당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 동쪽에 있는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공미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 개혁정치를 펴쓰며,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4. 향대청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지당(池塘)이 있고, 그 동쪽으로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 일곽이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향대청 입구

5. 재궁(어숙실)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齋宮)은 어숙실(御宿室)이라고도 하며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욕청(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를 입었으나 1608년 중건되어 오늘날까지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모두 3칸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뜰에는 각 건물을 잇는 어도(御道)가 십(十)자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재궁 입구

정문을 들어서면 어숙실이 마주보인다.

좌측에 어목욕청(임그님이 목욕제계하던 곳)이 있다.

우측에는 세자제실이 있다.

임금이 머무는 재궁 안에는 좌측에 모란병풍, 우측엔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이 있고, 중앙에용의교(임금님이 사용하시던 접이식 의자)가 있다.

어목욕청에 소여(종묘대제 때 임금이 궁궐에서 대여를 타고와서 종묘안에서 이동할 때 사용하던 가마)가 있다.

십이장복(왕의 예복의 구장복과 십이장복이 있다.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황태자와 순종효황제께서 착용)

호룡포를 입은 세자

제기도 병풍

6. 공신당

조선 왕조 역대 공신(功臣)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동쪽에 있으며 창건 때는 5칸에 불과하였으나 나중에 9칸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로 되었다.

30실에 62공신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칠사당과 같은 구조 형식으로 매우 간소하게 되어 있는데 왕의 신실과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일부러 그 형식을 낮추었다고 생각되며 16칸이라는 보기 드문 건축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정전에 와서도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건물이다.

7. 칠사당

종묘 창건 때부터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서쪽에 있던 것으로 칠사는 ‘봄에 모시는 사명(司命)과 사호(司戶), 여름의 사조(司竈)와 중류(中霤), 가을의 국문(國門)과 공려(公厲), 겨울의 국행(國行)’을 이르는 말이다.

칠사에게 지내는 제사는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결합된 국가 의례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판문과 격자창을 두고 나머지 3면은 전돌로 벽을 쌓았다.

8. 정전 (국보 제227호)

종묘 정전(正殿)은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매칸마다 조선 왕조의 신위를 모신 건물로, 1395년 태조 4년에 7칸으로 창건되었는데, 왕의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계속 증축되어 신실인 감실 19칸이 되었다.

신실 양 옆으로 각각 2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 반칸은 모두 개방된 형태이며, 각각의 칸을 구분하여 판문을 달았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2단의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동, 서, 남쪽 3곳에 문이 있다.

월대 아래 남쪽에 공신당과 칠사당이 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신위 봉안도

각 신실은 두짝문 안여닫이 판장문이며 신령의 통로를 위해 서쪽문은 아래쪽에 동쪽문은 위쪽에 틈을 만들어 놓았다.위쪽은 혼(魂)이 아래쪽은 백(魄)이 드나들게 하였다. 혼은 하늘로 흩어지고 백은 땅에 스며든다는 유교사상과 관련이 깊다.

남문(정문)

동문- 저나청 옆에 수복방과 연결되어 있다.

서문- 영녕전과 악공청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 동월랑

동월랑(東月廊)은 정전의 동쪽 익실(翼室) 끝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5칸의 건물로 배례청(拜禮廳)이다.

제례때 제관들의 편의를 위해 개방된 구조를 하고 있다.

동월랑과 동문

정전의 동쪽에 위치하며 헌관(獻官)인 왕과 세자가 제례를 지내기위해 들어오는 문이다. 어숙실로부터 어도(御道)가 연결되어 있으며, 동문 밖에는 왕과 세자의 판위(版位)가 자리하고 있다.

정전 동문에서 임금과 세자가 대기하는 판위

재궁(어숙실)과 연결된 어도(御道)

9. 정전 수복방

정전 동문 북쪽에 위치한 수복방은 두벌 장대 기단위에 정면 4칸, 측면 단칸의 맞배집으로 전사청에서 만들어진 제례음식을 다루는 수복들이 머무는 곳.

제수의 진찬을 준비하는 전사청 옆에 있다.

10. 전사청

전사청(典祀廳)은 제물, 제기, 운반구를 보관하고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祭需)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주실은 부엌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

전사청 앞의 안쪽에 찬막단(제사음식 검사) 바깥쪽에 성생위(소, 양, 돼지를 검사)가 있다.

좌측 정전의 동문 옆에 수복방이 있다.

11. 제정

제정은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데 정전 전사청(典祀廳)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찬게 특이하다고 한다. 네면을 담장으로 둘렀고, 남쪽에 우진각지붕의 일각문(一脚門)이 있다.

12. 영녕전

영녕전(永寧殿)은 왕의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정전의 공간이 부족해지자, 1421년 세종 3년에 창건한 별묘(別廟)로서 조묘(祖廟)라고도 한다.

창건 당시 태실(太室)4칸에 동서 익실 각 1칸씩이었으나 계속 늘어나 지금은 태실 4칸 좌우 익실 각 6칸으로 모두 16칸의 건물이 되었다.

그 중 중앙의 4칸은 4조(祖)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앞쪽의 월대도 한단 높이고 지붕도 위로 높게하여 다른 신실과 차이를 두고 있다.

영녕(永寧)이란 조종(祖宗)과 자손이 함께 편안히 있다는 뜻이다.

영녕전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네모난 아랫부분에 원형 주좌를 둔 주춧돌에 둥근 기둥과 간단한 초각을 한 익공을 짜고, 퇴칸 안에 두 짝 판문을 달고 뒤는 화방벽으로 쌓고 서까래는 부연 없는 홑처마로 꾸미는 등 세부 구성은 정전과 거의 같으며 역시 부재 표면도 단청 없이 간단히 주칠로 마감하였다.

정전과 좌우 익실 앞으로 동·서월랑이 뻗어 나와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고 박석을 덮은 상·하월대가 울타리를 가득 메우는 점도 동일하다. 이곳은 부재의 처리나 건물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종묘 정전보다는 작지만 건축 공간 자체의 장엄한 공간 구성은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장인들의 솜씨는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남문(정문)

정전과 같이 동월랑이 동문에 위치하고 있다.

남눈과 동문

서문- 악공청과 연결된다.

13. 정전 악공청 14. 영녕전 악공청

종묘제례시에 주악하는 악사들이 대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정전악공청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양녕전악공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 : 불구명리 불구영
글쓴이 : 수미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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