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천주교)

[스크랩] 새남터 성지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ria530 2012. 3. 28. 14:21

새남터 성지         

 

새남터는 한국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분 중 11분이 순교하신 곳이며 이 11분 중 8분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분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 순교성지이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 앵베르 성인, ‘기해일기’ 의 현석문 가롤로 성인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9분의 성인유해가 새남터에 모셔져 있다. 새남터의 말뜻은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새나무'는 '풀과 나무'의 뜻이며, ‘새’ 라는 말은 억새의 의미이다. 조선조 초기에 이 곳을 노들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노량진과 배로 왕래했던 나루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새남터를 한자로 음역(音譯) 해서 사남기(沙南基 )라고도 불렀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 곳에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되다 국가에 대하여 중한 죄를 지은 국사범(國事犯)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세조 2년, 1456년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올리려다 처형당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이 곳에서 피를 흘렸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새남터 성지

 

1801년부터 1866년까지 한국교회 4대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 특히 사제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에 뿌려져 너무나도 찬란한 신앙의 꽃을 한반도에 피우게 만들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목자없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다. 이에 북경교구는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들어와 교세를 키웠으며 6년 만에 신자수가 6,000여명이나 늘어났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쫓기는 몸이 되었고, 당신을 위해 여러 사람이 희생되자 스스로 의금부를 찾았으며 결국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일로 새남터에 처음으로 순교의 피가 흘렀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831년에는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하여 조선교구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아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를 위하여 설립)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엥베르 주교가 들어와 1년 동안 9,000여명의 신자를 늘리는 등 교세를 키웠으며,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소년을 마카오에 유학을 보내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키웠고,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많을 일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헌종 5년의 일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목숨을 잃었는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간의 시벽파 싸움에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1836년 모방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두 번이나 중국으로 넘나 들며, 수업을 하고 상해의 금가항 신학교에서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1846년 이곳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는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분의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항의로 프랑스 군함 3대가 충청도 외면도에 들어와 조선 조정에 항의문으로 압박을 가하자 9월 16일 김대건 신부를 서둘러 처형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로 헌종 12년이었으며 3일 후 현석문도 처형되었다. 철종이 즉위하자 천주교를 박해하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복돋아 주어 교세가 크게 확장 발전하게 되었다, 새 영세자도 많이 늘어났고, 천주교를 옹호하던 순원왕후가 철종의 정사를 뒤에서 맡아보게 되어 청나라로부터 많은 성직자들이 들어왔다. 이 결과 교우가 1850년에 일만 일천여명, 1855년 일만 사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신학교까지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년 후에는 대원군이 수만 명의 천주교도를 죽이는 대학살의 비극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프랑스, 영국의 동맹을 결성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물리치자고 한 건의가 시기를 놓치고 오해를 발생시켜 1866년 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까지 천주교도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새남터 성지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성인과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등 사제성인, 푸르티에 및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성 정의배 마르꼬, 성 우세영 알렉시오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890년부터 이곳 순교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 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새남터 성지는 1950년에 순교기념지로 지정되었고,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 라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복자학교’라는 교육 시설을 운영하다가 1981년에 한강본당으로부터 분가하여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대성당 입구 에수성심상

 

대성당 입구 에수성심상

 

대성당 입구 에수성심상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인

 

성당 전면 성인화 김대건 신부

 

성당 전면 성인화 앵베르 라우렌시오 신부

 

성당 전면 성인화 유스토 신부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인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인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성모자상

 

성모자상

 

성모자상

 

새남터 성모자상

 

1츨 로비 성인 유리화

 

1층 로비 새남터 순교역사

 

1층 로비 새남터 순교역사 

 

1층 로비 새남터 순교역사 김대건 신부상 

 

1층 로비 새남터 순교역사 성모상

 

<새남터 순교성인>

 

1층 로비 순교성인 (오른쪽)

 

1층 로비 순교성인 (오른쪽)

 

1층 로비 순교성인 (오른쪽)

 

1층 로비 순교성인 명단 (오른쪽)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Lurent Marie Joseph) 주교(1796-1839)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 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범 주교는 1796년 4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 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 교구에서 10여년 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 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여기서 그는 나, 정 양 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만이었다.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Jacques Honore) 신부(1803-1839)


한국명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이 땅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정(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프랑스 태생으로 1827년 1월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페낭 섬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마침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자 함께 동행하기를 자원, 1833년 5월 그곳을 떠났다. 그후 3년 간을 중국 대륙과 몽고,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쉽게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소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에서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으며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동료 나 신부로부터의 기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나 신부의 기별을 받고 의주 변문으로 간 정 신부는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 해인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정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손을 나누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했다. 정 신부 등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아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안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정 신부는 한때 중병을 앓게 된 나 신부를 서울까지 올라와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일도 겪었으나 다행히 무사했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에 성공하여 전교활동은 차츰 본격화되어 갔다. 그러나 1839년 몰아닥친 기해 대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정 신부의 나이는 37세요,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남짓이었다.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Pierre Philibert) 신부(1804-1839)


한국명은 나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 그는 1836년 1월 입국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까지 3년 9개월 간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특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유학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베시에서 태어난 나(모방) 신부는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어 그 이듬해 동양에 진출, 중국을 거쳐 1836년 1월 의주의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순회, 전교하였다. 또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오자 곧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이들 세 소년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장차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던 중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그후 나 신부는 이들 세 소년을 전송한 교우들과 만나 1837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손을 나눠 각 도의 흩어진 교우촌을 찾아 밤낮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전교에 힘쓴 결과 입국 당시 불과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한 1837년 말에는 갑절이 넘는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대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인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점차 소문으로 퍼져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닥쳐온다. 범 주교는 박해가 일어나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처음에는 자신만이 자수하고 두 신부(나 신부, 정 신부)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으나 형편이 그렇게 못되었고 결국은 범 주교에 이어 두 신부도 자진하여 포졸에게 몸을 맡겨 관가에 자수하였다. 그는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범 주교, 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1821-1846, 신부)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 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 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코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 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우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교의 명에 따라 황해도 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성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는 부친이다.  

 

성 현석문(玄錫文) 가롤로(1797-1846)


현석문 가롤로는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아버지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고,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누나 현경련 베네딕타가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석문은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순교할 즈음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박해가 끝난 후, 신부 없는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순교자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편집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모면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했으며 또 중국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행하여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하던 현석문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신부집에 남아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 함께 있던 정철염(카타리나), 이간난(아가타), 김임이(데레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현석문은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끝까지 회장의 직분을 다했다.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성 장 시므온 베르뇌(Berneux, Francois) 주교(1814-1866)


한국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이다. 성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는 이 땅에서의 10년 간 사목활동 중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두 개의 인쇄소를 설치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1866년의 병인 대박해로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 사제로 서품되어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월남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감옥생활을 치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석방되어 만주 요동 지방에서 10여 년 간 활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천사적인 신심과 깊은 신학 지식을 겸비한 드문 능력가였던 그는 엄한 극기 생활과 당뇨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사목에 주력했으며 바쁜 주교직을 수행하면서도 신부 3, 4인이 맡아 볼 그런 넓은 지역을 직접 도맡아 보았다. 과연 한국교회는 그의 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았으며 교우들은 더 잘 교육되고 신자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1866년 2월 뜻밖에도 모진 박해가 일어나 2월 23일에 체포되었다. 장 주교는 신문을 받을 때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따라서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뜻을 밝혔다. 그는 감옥에서 앞 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았으나 얼굴에 고통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서, 김 세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향하였다. 당시 군인으로서 장 주교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박 베드로는 그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형장에 이르자 주교와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 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망나니의 두 번째 칼날에 당년 52세인 장 주교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성 백 유스토 브르트니에르(Simon-Marie-Antoine Ranfer de Bretenieres)신부(1838-1866)


한국 성은 백(白),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 사제가 된 백 신부는 서품되자 곧 동료 김, 민, 서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 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 마르코 회장 집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의 고백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잡힌 이튿날인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고발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끝에 3월 7일 새남터에서 장 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28세, 이 땅에 온 지 채 1년도 못되는 이 젊은 사도는 땀보다는 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 현양하였다.  

 

성 김 헨리코 도리(Dorie, Pierre Henri) 신부(1839-1866)


한국 성은 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 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배속되었다. 김 신부는 순교 때까지 운명을 같이 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한국말은 아직 서툴렀으나 교우들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낸 8개월 간 교우들이 자기를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엔 '김'이라는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기의 소원대로 입국한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손골에서 잡혀 3월 7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장 주교, 백, 서 신부에 뒤이어 네 번째로 참수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에 불과했다.   

 

성 서 루도비코 볼리외(Beaulieu, Bernard Louis) 신부(1840-1866)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에 백, 김, 민 세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그는 고백을 들을 만큼 한국말을 배운 후 공주 지방 전교를 맡게 되었으나 임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볼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해 있었으나 2월 27일 포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고통을 감수하였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핑계로 여러 질문에 일절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3월 7일 서 신부는 장 주교를 선두로 동료인 백, 김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 때 나이 26세였다.  

 

성 정의배 마르코(1795-1866, 회장, 병인박해 때 군문효수)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丁義培)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 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瓔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평소에도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다닌 정의배는 서울 창동의 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과거시험 공부에만 열심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마친 후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다가 1839년 우연한 기회에 서양 선교사들의 순교 장면을 보게되었다. 그 때부터 '저들은 무엇을 믿기에 머나먼 낯선 땅에 와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진리를 전하면서 모욕과 멸시를 달게 받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그의 나이 마흔 여섯에 영세 입교하였다.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순교하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시심을 다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이 모습을 본 안 다블뤼 주교는 "산 성인(聖人)이로다" 하고 칭찬하였다. 정의배는 1845년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성영회(聖瓔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던 마르코는 주교의 하인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바로 그날이 그의 72회 생일이었다.

 

1층 로비 순교성인 (왼쪽)

 

성 아가다, 루시아, 율리에타

 

성 골롬바, 아네스

 

성 엘리사벳, 체칠리아, 정하상 바오로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정하상 바오로, 부산 남천 주교좌성당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성 정하상 바오로, 부산 남천 주교좌성당     

 

성 유대철 베드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 조신철 카롤로

 

성 위앵 마르티노 루가 신부

 

성 장주기 요셉  

 

성 이윤일 요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

 

성 남종삼 요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이 외 순교자>

 

◆ 성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1845-1866)


일병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 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er)신부 (1828-1866)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朴 신부)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년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 푸르티에 신부(Pourthi, Jean Antoine) (1830-1866)


푸르티에(Pourthi, Jean Antoine, 한국명 : 신요안) 순교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순교자 전시물,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친필

 

성 모방 신부 친필 

 

교종에게 보낸 서신

 

교황에게 보낸 서신

 

신미년 백서

 

황사영 백서

 

성경직해, 신명초행

 

천주성교예규

 

사사성경

 

천주성교공과 

 

1츨 로비  순교장면 모형

 

순교장면 모형

 

<김대건 신부 일대기 비치용 책자>

 

 

 

 

 

 

 

 

 

 

 

 

 

 

 

 

 

 

 

 

 

 

 

 

 

 

 

<대성당, 소성당>

 

대성당 오르는 계단 십자고상

 

대성당 옆문 입구 성화

 

대성당 옆문 입구 성화

 

대성당 내부 입구 에수성심상

 

대성당 내부

 

대성당 제대

 

대성당 제대  

 

대성당 제대

 

대성당 제대 감실

 

대성당 제대 십자고상

 

대성당 제대

 

대성당 제대 독서대

 

대성당 제대 독서대

 

대성당 좌측 벽화

 

대성당 좌측 벽화

 

대성당 우측 벽화

 

대성당 우측 벽화

 

대성당 성수대

 

대성당 후면

 

대성당 십자가의 길 제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소성당 내부

 

소성당 내부

 

소성당 제대

 

소성당 제대 십자고상 

 

소성당 제대 성모상

 

소성당 제대 감실 

 

소성당 제대, 성인유해  

 

소성당 성인유해

 

소성당 성인유해

 

소성당 십자가 14처 

 

소성당 내부 십자가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순교성인 성화

 

순교성인 성화  

 

성 김대건 신부 성화  

 

성 김대건 상

 

내부 성모자상  

 

김대건 상

 

김대건 상

 

머릿돌, 형구돌, 척화비

 

마당 머릿돌, 형구돌, 척화비

 

대성전 머릿돌

 

대성전 머릿돌

 

형구돌

 

척화비 

 

거북돌

 

항아리

 

십자가의 길

 

시작기도 

 

 

 

 

 

 

 

 

 

 

 

 

 

 

 

 

마침기도

 

순교자 주문모 야고버 신부(1752-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사바)과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가회동과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나게 되었고,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집주인 최인길, 밀사 지황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음력 3월 11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 도착한 뒤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래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즉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상

 

주문모 야고보 신부상 

 

새남터 성지 약도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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