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孟子ㅣ 曰無罪而殺士則大夫ㅣ 可以去ㅣ오 無罪而戮民則士ㅣ 可以徙ㅣ니라 맹자 가라사대 죄없이 선비를 죽이면 대부가 가히 써 갈 것이며 죄없이 백성을 죽이면 선비가 가히 써 옮기느니라. 言君子ㅣ 當見幾而作이니 禍已迫則不能去矣니라 군자는 마땅히 기미를 보고 일어나니 화가 이미 임박하면 능히 떠나지 못함을 말씀하심이라.
[앞주 해설] ‘見幾而作’은 주역 계사하전 제5장에서 공자가 雷地豫괘 六二爻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君子ㅣ 見幾而作하야 不俟終日이니’ 곧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종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당장 실행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또한 군자는 미미한 것도 알고 밝게 드러난 것도 알고, 부드러운 것도 알고, 강한 것도 아니, 온 천하 남자들이 우러러본다(君子ㅣ 知微知彰知柔知剛하나니 萬夫之望이라) 하였다. 하물며 죄없이 선비를 죽이고 죄없이 백성들을 죽이는 인군 아래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기미를 보고 어진 선비들이 떠나감을 말하고 있다.
<제5장> 孟子ㅣ 曰君仁이면 莫不仁이오 君義ㅣ면 莫不義니라 맹자 가라사대, 인군이 어질면 어질지 아니함이 없고, 인군이 의로우면 의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張氏 曰此章은 重出이라 然이나 上篇은 主言人臣이 當以正君爲急이오 此章은 直戒人君이니 義亦小異耳라 장씨 가로대 이 장은 거듭 나옴이라. 그러나 윗편은 주로 신하가 마땅히 써 인군을 바르게 함은 급함으로 하고, 이 장은 바로 인군을 경계함을 말함이니, 뜻이 또한 조금 다르니라.
<제6장> 孟子ㅣ 曰非禮之禮와 非義之義를 大人이 弗爲니라 맹자 가라사대 예 아닌 예와 의 아닌 의를 대인이 아니 하느니라. 察理不精故로 有二者之蔽라 大人則隨事而順理하고 因時而處宜하니 豈爲是哉리오 이치 살핌이 정미롭지 못한 고로 두 가지의 가려짐이 있음이라. 대인이라면 일을 따라 이치에 순하고 때를 인하여 마땅함에 처하니 어찌 이리 하리오.
<제7장> 孟子ㅣ 曰中也ㅣ 養不中하며 才也ㅣ 養不才라 故로 人樂有賢父兄也ㅣ니 如中也ㅣ 棄不中하며 才也ㅣ 棄不才면 則賢不肖之相去其間이 不能以寸이니라 맹자 가라사대 중이 부중을 기르며 재주가 부재를 기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하니 만약 중함이 부중함을 버리며 재주가 부재함을 버리면 곧 어짊과 불초함의 서로 거리는 그 사이가 능히 써 한 치도 아니될 것이니라. 無過不及之謂中이오 足以有爲之謂才니라 養은 謂涵育薰陶하야 俟其自化也ㅣ라 賢은 謂中而才者也ㅣ라 樂有賢父兄者는 樂其終能成己也ㅣ라 爲父兄者ㅣ 若以子弟之不賢으로 遂遽絶之而不能敎면 則吾亦過中而不才矣니 其相去之間이 能幾何哉리오 과불급이 없음을 중이라 이르고, 족히 써 하옴이 있음을 재라 이르니라. 양은 함육 훈도하여 그 스스로 됨을 기다림을 이르니라. 현은 중하고 재주있음을 이르니라.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함은 마침내 능히 자기를 이룸을 즐거워함이라. 부형된 자가 만약 자제의 어질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갑자기 끊어버리고 가르칠 수 없다하면 곧 나 또한 중을 벗어나고 재주 없음이니 그 서로 거리의 사이가 능히 얼마이리오.
<제8장> 孟子ㅣ 曰人有不爲也而後에 可以有爲니라 맹자 가라사대 사람이 불위(하지 않음)를 둔 후에 가히 써 하옴을 두느니라. 程子ㅣ 曰有不爲는 知所擇也ㅣ니 惟能有不爲라 是以로 可以有爲니 無所不爲者ㅣ 安能有所爲耶ㅣ라 정자 가라사대 불위를 둠은 가리는 바를 앎이니 오직 능히 불위를 두느니라. 이로써 가히 써 하옴을 두니, 불위하는 바가 없는 자가 어찌 능히 하는 바를 두랴.
<제9장> 孟子ㅣ 曰言人之不善하다가 當如後患에 何오 맹자 가라사대 사람의 불선을 말하다가 마땅히 후환에 어찌하리오. 此亦有爲而言이라 이 또한 ‘有爲’를 말씀하심이라.
<제10장> 孟子ㅣ 曰仲尼는 不爲已甚者ㅣ러시다 맹자 가라사대 중니는 너무 심한 것을 하지 아니하더시다. 已는 猶太也ㅣ라 楊氏 曰言聖人所爲는 本分之外에 不加毫末이니 非孟子眞知孔子면 不能以是稱之시니라 이는 너무와 같음이라. 양씨 가라사대 성인이 하는 바는 본분의 밖에 털끝도 더하지 않음을 말씀함이니 진실로 공자를 아는 맹자가 아니라면 능히 이로써 말씀하지 아니하심이라.
<제11장> 孟子ㅣ 曰大人者는 言不必信이며 行不必果ㅣ오 惟義所在니라 맹자 가라사대 대인이란 말함에 믿음을 반드시 아니하며 행함에 결과함을 반드시 아니하고 오직 의가 있는 바로 하니라.
[본문 해설] 윗글을 잘못 이해하면, 대인이란 말을 함에 굳이 믿음을 둘 필요가 없고, 행동을 함에도 굳이 결과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에 맞추기 위해 급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무슨 일을 하면 꼭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그것이 잘못된 말이라면 과감히 취소할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결과가 나올 것 같으면 바로 그 행동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인이란 항상 의로운 바에 언행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중용』에서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지나침이 있으면 허물이 되기에 삼가라(庸言之謹)고 하였으며, 말은 행실을 돌아보고 행실은 말을 돌아보라(言顧行 行顧言)고 하였다. 必은 猶期也ㅣ라 大人言行은 不先期於信果요 但義之所在면 則必從之하나니 卒亦未嘗不信果也니라 ○尹氏 曰主於義면 則信果ㅣ 在其中矣요 主於信果면 則未必合義니라 王勉이 曰若不合於義하고 而不信不果면 則妄人爾니라 필은 기약과 같음이라. 대인의 언행은 먼저 믿음과 결과를 기약하지 아니하고 다만 의가 있는 바이면 곧 반드시 따르나니 마침내 또한 일찍이 믿음과 결과함이 있지 않음이 아니니라. ○ 윤씨 가로대 의에 주장하면 곧 믿음과 결과가 그 가운데에 있고 믿음과 결과에 주장하면 곧 반드시 의를 합함이 아니니라. 왕면이 가로대 만약에 의에 합하지 아니하고 미더움이 없고 결과가 없다면 곧 망령된 사람이니라.
<제12장> 孟子ㅣ 曰大人者는 不失其赤子之心者也ㅣ니라 맹자 가라사대 대인은 그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아니한 자이니라. 大人之心은 通達萬變하고 赤子之心은 則純一無僞而已라 然이나 大人之所以爲大人은 正以其不爲物誘하야 而有以全其純一無僞之本然이라 是以로 擴而充之則無所不知하고 無所不能하야 而極其大也ㅣ니라 대인의 마음은 온갖 변화를 통달하고 어린아이의 마음은 곧 순일하여 거짓이 없을 뿐이라. 그러나 대인의 써 대인된 바는 바로 써 그 물건의 꾀임을 두지 않아서 써 온전히 그 순일하고 거짓이 없는 본연을 둠이라. 이로써 넓히고 채운면 곧 아지 못하는 바가 없고 능치 모하는 바가 없어서 그 큼을 다함이라.
<제13장> 孟子ㅣ 曰養生者ㅣ 不足以當大事ㅣ오 惟送死ㅣ아 可以當大事ㅣ니라 맹자 가라사대 살아있는 자를 기름(봉양함)이 족히 써 큰 일에 해당하지 아니고, 오직 죽음을 보내는 일이라야 가히 써 큰 일에 해당하니라.
[본문 해설] 맹자 당시에 冠婚喪祭라는 人倫之大事에 대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가운데서 죽은 이에 대한 喪事, 더욱 부모상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치루어야 할 가장 큰 대사라고 보았다. 살아생전에 섬기기를 다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기에 굳이 대사라 하지 않고, 죽음은 변고이기에 마땅히 가장 큰 일이라 한 것이다. 「공손추장구하」제7장을 보면 맹자가 모친상을 치룬 대목이 잘 나타난다. 당시에 묵자 등은 유가의 후한 장례절차에 대해 비난을 가하며 검소하게 치루자는 박장설(薄葬說)을 주장하고 있다. 「등문공장구상」제5장 참조. 事生은 固當愛敬이라 然이나 亦人道之常耳요 至於送死는 則人道之大變이니 孝子之事親에 舍是면 無以用其力矣라 故로 尤以爲大事而必誠必信하야 不使少有後日之悔也ㅣ니라 산 자 섬김은 진실로 마땅히 사랑과 공경이라. 그러나 또한 인도의 떳떳함이오, 죽은 자를 보냄에 이르러서는 곧 인도의 큰 변고이니 효자의 어버이 섬김에 이를 버리면 써 그 힘을 씀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더욱 서 큰 일이 되니 마땅히 정성스럽고 마땅히 믿음으로 하여 조금이라도 훗날의 후회함을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