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孟子ㅣ 曰聖人은 百世之師也ㅣ니 伯夷柳下惠ㅣ 是也ㅣ라 故로 聞伯夷之風者는 頑夫ㅣ 廉하며 懦夫ㅣ 有立志하고 聞柳下惠之風者는 薄夫ㅣ 敦하며 鄙夫ㅣ 寬하나니 奮乎百世之上이어든 百世之下에 聞者ㅣ 莫不興起也하니 非聖人而能若是乎아 而況親炙之者乎아 맹자 가라사대 성인은 백세의 스승이니 백이와 유하혜가 이것이라. 그러므로 백이의 풍도를 들은 자는 욕심 많은 지아비가 청렴해지며 나약한 지아비가 세운 뜻을 두고, 유하혜의 풍도를 들은 자는 박한 지아비가 후해지며 비루한 지아비가 너그러워지나니, 백세의 위에서 분발하거든 백세의 아래에서 들은 자가 흥기치 아니할 이 없으니, 성인이 아니고 능히 이 같으랴! 하물며 가까이에서 훈도(薰陶)한 자임에야! 興起는 感動奮發也ㅣ라 親炙는 親近而薰炙之也ㅣ라 餘見前篇하니라 흥기는 감동하여 분발함이라. 친자는 가까이하여 훈자(구워짐, 남의 교화를 받아 감화됨)함이라. 나머지는 전편(萬章章句 下 제1장)
<제16장> 孟子ㅣ 曰仁也者는 人也ㅣ니 合而言之하면 道也ㅣ니라 맹자 가라사대 어질다는 것은 사람이니 합해서 말하면 도이니라. 仁者는 人之所以爲人之理也ㅣ라 然이나 仁은 理也ㅣ오 人은 物也ㅣ니 以仁之理로 合於人之身而言之하면 乃所謂道者也ㅣ라 ○程子ㅣ 曰中庸所謂率性之謂道가 是也ㅣ니라 或曰外國本에 人也之下에 有義也者宜也 禮也者履也 智也者知也 信也者實也 凡二十字라 하니 今按如此則理極分明이라 然이나 未詳其是否也ㅣ라 어질다는 것은 사람이 써 사람된 바의 이치라. 그러나 인은 이치요, 사람은 물건이니 인의 이치로써 사람의 몸에 합하여 말하면 이 이른바 도이라. ○정자 가라사대 중용에서 말한 바 성을 따름을 일러 도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혹 가로대 외국본(고려본)에 ‘人也’ 아래에 ‘義也者宜也 禮也者履也 智也者知也 信也者實也(의라는 것은 마땅함이오 예라는 것은 밟음이오, 지라는 것은 앎이오, 신이라는 것은 신실함이라)’라는 스무 자가 있다 하니 이제 이와 같음을 상고해본다면 이치가 지극히 분명함이라. 그러나 그 옳은지 아닌지는 자세하지 않느니라.
<제17장> 孟子ㅣ 曰孔子之去魯에 曰遲遲라 吾行也ㅣ여 하시니 去父母國之道也ㅣ오 去齊에 接淅而行하시니 去他國之道也ㅣ니라 맹자 가라사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심에 가라사대 더디고 더뎌라, 나의 걸음이여 하시니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도이오, 제나라를 떠나심에 쌀을 일어 건져 가시니 다른 나라를 떠나는 도이니라. 重出ㅣ라 거듭 나옴이라(萬章章句下 제1장에 나옴)
<제18장> 孟子ㅣ 曰君子之戹於陳蔡之間은 無上下之交也ㅣ니라 맹자 가라사대 군자(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액을 당하심은 위아래의 사귐이 없었기 때문이라.
[본문 해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액이라 함은 ‘陳蔡絶糧’인 때를 말한 듯하다. 기원전 489년에 오나라가 陳나라를 공략하고 초나라가 진나라를 지원하여 오나라 군대와 성보(城父, 지금의 한휘 호현 동남쪽)에서 대치하였다. 전란이 임박하자 공자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3년간이나 머물렀던 진나라를 떠나 남쪽의 蔡나라로 피신하였다. 피난을 가던 중 오나라와 초나라의 병사들에게 잡혀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렀다. 가지고 온 양식도 다 떨어졌고 함께 가던 제자들은 굶주리고 지쳤으며, 어떤 제자는 병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7일간을 밥도 먹지 못한 채 극심한 괴로움에 시달렸다. 공자는 자공을 파견하여 초나라 군대와 교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위험한 지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어려운 때에도 함께 길을 나섰던 제자들은 끝까지 남아 공자의 정치적 이상을 믿고 따랐는데 그들을 흔히 ‘孔門十哲’이라 부른다. 君子는 孔子也ㅣ라 戹與厄同이라 君臣이 皆惡하야 無所與交也ㅣ라 군자는 공자라. 戹(곤궁할 액)과 厄(곤궁할 액)은 같음이라. 인군과 신하가 모두 악하여 더불어 사귀는 바가 없음이라.
<제19장> 貉稽ㅣ 曰稽ㅣ 大不理於口호이다 맥계가 가로대, 계가 크게 입에 힘입지 못하노이다. 趙氏 曰貉은 姓이오 稽는 名이라 爲衆口所訕하니라 理는 賴也ㅣ라 하니라 今按漢書컨대 無俚를 方言에 亦訓賴라 하니라 조씨 가로대 맥은 성이오, 계는 이름이라. 여러 사람의 입이 비방하는 바가 됨이라. 理는 힘입음이라. 이제 『한서』를 상고하건대 無俚를 『방언』에서 또한 賴라고 훈했음이라.
[참조] 주자가 말한 ‘今按漢書컨대 無俚를 方言에 亦訓賴라 하니라’하는 내용은 약간의 오류가 있는 듯하다.『한서』에 따르면 前漢의 季布가 贊한 글에 “賢者는 誠重其死요 夫婢妾賤人이 感慨而自殺은 非能勇也요 其盡無俚之至耳라(현자는 진실로 그 죽음을 중히 여기고, 무릇 비첩과 천인들이 감개하여 스스로 죽음은 능히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오, 그 지극히 의지할 데가 없을 뿐이라)”하였는데, 진작(晉灼)이 이르기를 “楊雄 方言曰俚는 聊也ㅣ라 하고 許氏 曰賴也ㅣ라 하니라(양웅의『방언』에 가로대 俚는 聊(귀 기울일 료, 힘입을 료)라 하고, 許愼은 『설문해자』에서 賴(힘입을 뢰)라 하니라”고 하였다. 이를 미뤄보건대 주자가 ‘方言’이라고 말한 것은 『설문해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孟子ㅣ 曰無傷也ㅣ라 士ㅣ 憎(增)玆多口하니라 맹자 가라사대 상함이 없노라. 선비는 더욱 이에 입(구설)이 많느니라. 趙氏 曰爲士者는 益多爲衆口所訕이라 하니라 按此則憎當從土어늘 今本에 皆從心하니 蓋傳寫之誤니라 조씨 가로대 ‘선비된 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비방하는 바가 많이 되니라’ 하니라. 이를 상고한다면 憎은 마땅히 ‘흙 土’를 따라야 하거늘(곧 憎 → 增), 이제 본에는 모두 심을 따랐으니(憎으로 쓰니), 대개 옮겨 적음의 잘못이니라.
[앞주 해설] 대문의 ‘士ㅣ 憎玆多口하니라’에서 憎을 미워한다, 증오한다는 뜻으로 그대로 해석하면, ‘선비는 이 말 많음을 증오하니라’라고 해석하여야 한다. 하지만 앞서(盡心章句上 제33장) 왕자 점이 선비의 하는 일에 대해 물었을 때 맹자가 ‘尙志’라고 대답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진정한 선비란 남의 비방에 신경을 쓰고 일일이 그에 맞대응하며 말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기 보다는 묵묵히 인의에 따르는 일을 해나가는 뿐이다. 그러기에 더욱 구설이 많아질 것이다. 따라서 주자와 조기처럼 憎을 增의 誤記로 보는 것이 맹자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詩云憂心悄悄ㅣ어늘 慍于群小ㅣ라 하니 孔子也ㅣ시고 肆不殄厥慍하시나 亦不隕厥問이라 하니 文王也ㅣ시니라 시에 이르기를 근심하는 마음이 초초하거늘 여러 소인들의 성냄을 받는다 하니 공자이시고, 그 성냄을 그치지 아니하셨으나 또한 그 물음(恤問, 돌보심)도 그만두지 아니했다 하니 문왕이시니라.
* ‘肆不殄厥慍하시나 亦不隕厥問이라’는 시는 ‘梁惠王章句下 제3장 해설’을 참조하시오. 詩는 邶風栢舟及大雅緜之篇也ㅣ라 悄悄는 憂貌라 慍은 怒也ㅣ라 本言衛之仁人이 見怒於郡小어늘 孟子ㅣ 以爲孔子之事ㅣ 可以當之라 하시니라 肆는 發語辭라 隕은 墜也ㅣ라 問은 聲問也ㅣ라 本言大王이 事昆夷에 雖不能殄絶其慍怒나 亦不自墜其聲問之美어늘 孟子ㅣ 以爲文王之事ㅣ 可以當之라 하시니라 ○尹氏 曰言人顧自處如何니 盡其在我者而已니라 시는 패풍 백주와 대아 면편이라. 초초는 근심스런 모양이라. 온은 성냄이라. 본래 위나라의 어진 사람이 여러 소인배들에게 노여움을 받은 것을 말하거늘 맹자가 써 공자의 일로 삼으심이 가히 써 마땅하다 하시니라. 사는 발어사라. 운은 떨어짐이라. 문은 물어보는 소리라. 본래 태왕이 곤이를 섬기심에 비록 능히 그 성냄을 다하지 아니했으나 또한 스스로 그 (긍휼히 여겨) 물어보는 아름다움을 떨어뜨리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어늘, 맹자가 써 문왕의 일로 삼음이 가히 써 마땅하다 하시니라. ○윤씨 가로대 사람이 스스로 처함이 어떠한지를 돌아봄이니 그 내게 있는 것을 다할 뿐임을 말씀하심이라.
<제20장> 孟子ㅣ 曰賢者는 以其昭昭로 使人昭昭ㅣ어늘 今엔 以其昏昏으로 使人昭昭ㅣ로다 맹자 가라사대 현자는 그 밝음으로써 남으로 하여금 밝게 하거늘 이제엔 그 어두움으로써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밝게 한다 하도다! 昭昭는 明也ㅣ오 昏昏은 闇也ㅣ라 尹氏 曰大學之道는 在自昭明德而施於天下國家하니 其有不順者ㅣ 寡矣니라 소소는 밝음이오, 혼혼은 어두움이라. 윤씨 가로대 대학의 도는 스스로 밝은 덕을 밝혀서 천하국가에 베풂에 있으니, 그 순하지 않는 자 적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