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文王有聲이 遹駿有聲이샷다 遹求厥寧하사 遹觀厥成하시니 文王烝哉샷다 (문왕유성이 휼준유성이샷다 휼구궐녕하사 휼관궐성하시니 문왕증재샷다 賦也ㅣ라) 문왕이 명성을 두심이 마침내 크게 명성을 두셨다. 마침내 그 편안함을 구하사 마침내 그 성공을 보시니 문왕은 인군다우셨다.
遹 : 편벽될 휼, 좇을 휼, 여기서는 ‘마침내 휼(율), 이에 휼(율)’ ○賦也ㅣ라 遹은 義未詳하니 疑與聿同이니 發語詞라 駿은 大요 烝은 君也ㅣ라 ○此詩는 言文王遷豊과 武王遷鎬之事니 而首章推本之曰文王之有聲也ㅣ 甚大乎其有聲也하니 蓋以求天下之安寧而觀其成功耳라 文王之德이 如是하니 信乎其克君也哉신저 ○부라. 율은 뜻이 자세하지 못하니 아마도 ‘마침내 율’과 더불어 같으니 발어사라. 준은 큼이고, 증은 인군이라. ○이 시는 문왕의 풍으로 옮기고 무왕이 호경으로 옮긴 일을 말하고, 머릿장에 근본을 미루어 말하기를 문왕이 명성을 둠이 심히 그 명성을 둠이 크니 대개 천하의 안녕을 구하여 그 성공을 보게 됨이라. 문왕의 덕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그 능히 인군다우신저라고 하니라.
(2장)文王受命하사 有此武功하샷다 旣伐于崇하시고 作邑于豊하시니 文王烝哉샷다 (문왕수명하사 유차무공하샷다 기벌우숭하시고 작읍우풍하시니 문왕증재샷다 賦也ㅣ라) 문왕이 명을 받으사 이 무공을 두셨도다. 이미 숭나라를 정벌하시고 풍에 읍을 지으시니 문왕은 인군다우셨다. ○賦也ㅣ라 伐崇事는 見皇矣篇이라 作邑은 徙都也ㅣ라 豊은 卽崇國之地니 在今鄠縣杜陵西南하니라 ○부라. 숭나라를 친 일은 황의편에 나타나니라. 작읍은 도읍을 옮김이라. 풍은 곧 숭나라의 땅이니 지금 호현 두릉의 서남쪽에 있느니라.
(3장)築城伊淢하시고 作豊伊匹하시니 匪棘其欲이라 遹追來孝ㅣ시니 王后烝哉샷다 (축성이역하시고 작풍이필하시니 비극기욕이라 휼추래효(휵)ㅣ시니 왕후증재샷다 賦也ㅣ라) 성을 쌓되 도랑을 따르시고 풍읍을 걸맞게 하시니 그 하고자 함을 급히 하지 않음이라. 선대의 업적을 따라서 효도하는 이가 오게 하시니 왕후는 인군다우셨다.
淢 : 도랑 역 ○賦也ㅣ라 淢은 城溝也ㅣ니 方十里爲成이오 成間有溝하니 深廣各八尺이라 匹은 稱이오 棘은 急也ㅣ라 王后는 亦指文王也ㅣ라 ○言文王이 營豊邑之城에 因舊溝爲限而築之하고 其作邑居에 亦稱其城而不侈大하니 皆非急成己之所欲也ㅣ오 特追先人之志而來致其孝耳라 ○부라. 역은 성의 도랑(해자)니 사방 10리를 성이라 하고 성 사이에 도랑이 있으니 깊이와 넓이가 각 여덟 자라. 필은 걸맞음이고, 극은 급함이라. 왕후는 또한 문왕을 가리킴이라. ○말하기를, 문왕이 풍읍의 성을 경영함에 옛 도랑으로 인하여 경계를 삼고 그 성을 쌓고 그 읍을 짓고 거함에 또한 그 성에 걸맞게 하고 사치하고 크게 하지 아니하니 다 급히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특히 선인의 뜻을 따르고 (후대가) 와서 그 효를 이루게 하였을 뿐이라.
(4장)王公伊濯은 維豊之垣이니라 四方攸同하야 王后維翰하니 王后烝哉샷다 (왕공이탁은 유풍지원이니라 사방유동하야 왕후유한하니 왕후증재샷다 賦也ㅣ라) 왕의 공이 저토록 밝게 드러남은 오직 풍읍의 담을 쌓음이라. 사방이 함께 하여 왕후를 기둥으로 삼으니 왕후는 인군다우셨다. ○賦也ㅣ라 公은 功也ㅣ라 濯은 著明也ㅣ라 ○王之功이 所以著明者는 以其能築此豊之垣故爾니 四方이 於是來歸하야 而以文王으로 爲楨榦也ㅣ라 ○부라. 공은 공이라. 탁은 저명함이라. ○왕의 공이 밝게 드러난 것은 그 능히 이 풍읍에 담을 쌓은 까닭이니 사방이 이에 돌아와서 문왕으로써 정간을 삼았느니라.
楨 : 기둥 정, 담을 쌓을 때 양쪽에 세우는 기둥
(5장)豊水東注하니 維禹之績이로다 四方攸同하야 皇王維辟하니 皇王烝哉샷다 (풍수동주하니 유우지적이로다 사방유동하야 황왕유벽하니 황왕증재샷다 賦也ㅣ라) 풍수가 동으로 흐르니 오직 우임금의 공적이로다. 사방이 함께 하여 황왕으로 임금을 삼으니 황왕은 인군다우셨다. ○賦也ㅣ라 豊水는 東北流하야 徑豊邑之東하야 入渭而注于河라 績은 功也ㅣ라 皇王은 有天下之號니 指武王也ㅣ라 辟은 君也ㅣ라 ○言豊水東注는 由禹之功이라 故로 四方이 得以來同於此而以武王으로 爲君하니 此는 武王이 未作鎬京時也ㅣ라 ○부라. 풍수는 동북쪽으로 흘러 풍읍의 동쪽을 지나 위수로 들어갔다가 하수로 흘러 들어가니라. 적은 공이라. 황왕은 천하를 둔 칭호이니 무왕을 가리킴이라. 벽은 인군이라. ○풍수가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임금의 공이라. 그러므로 사방이 와서 여기에서 같이 하고 무왕으로써 인군을 삼으니 이는 무왕이 아직 호경을 짓지 아니했을 때를 말함이라.
(6장)鎬京辟廱에 自西自東하며 自南自北하야 無思不服하니 皇王烝哉샷다 (호경벽옹에 자서자동하며 자남자북하야 무사불복하니 황왕증재샷다 賦也ㅣ라) 호경의 벽옹에 서로부터 하며 동으로부터 하며 남으로부터 하며 북으로부터 하여 생각하여 복종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황왕은 인군다우셨다. ○賦也ㅣ라 鎬京은 武王所營也ㅣ니 在豊水東하야 去豊邑二十五里라 張子曰周家自后稷居邰로 公劉居豳하고 大王邑岐하고 而文王則遷于豊이러시니 至武王하야는 又居于鎬하시니라 當是時하야 民之歸者ㅣ 日衆하야 其地有不能容일새 不得不遷也ㅣ라 辟廱은 說見前篇하니라 張子曰靈臺辟廱은 文王之學也ㅣ오 鎬京辟廱은 武王之學也ㅣ니 至此에 始爲天子之學矣라 無思不服은 心服也ㅣ니 孟子曰天下不心服而王者ㅣ 未之有也ㅣ라하시니라 ○此는 言武王徙居鎬京하야 講學行禮而天下自服也ㅣ라 ○부라. 호경은 무왕이 경영한 곳이니 풍수의 동쪽에 있어서 풍읍과의 거리는 25리라. 장자 가로대 주나라 왕실이 후직이 태에서 거함으로부터 공유가 빈에서 거처하고 태왕이 기에 읍을 정하고 문왕이 풍으로 옮기더니 무왕에 이르러서는 또한 호경에 거하셨느니라. 이때를 당하여 백성들이 돌아오는 자가 날로 많아져 그 땅이 능히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옮기지 않을 수 없었느니라. 벽옹은 설명이 전편에 나타나니라. 장자 가라사대 영대와 벽옹은 문왕의 학궁이고, 호경의 벽옹은 무왕의 학궁이니 이에 이름에 비로소 천자의 학궁이 되었음이라. 무사불복은 마음으로 복종함이니 맹자 가라사대(「離婁章句下」16장) 천하가 마음으로 복종하는데도 왕 하지 못할 자는 있지 않다 하시니라. ○이는 무왕이 호경으로 옮겨 거처하여 학문을 강하고 예를 행하니 천하가 스스로 복종함을 말함이라.
(7장)考卜維王이 宅是鎬京이샷다 維龜正之어늘 武王成之하시니 武王烝哉샷다 (고복유왕이 택시호경이샷다 유귀정지어늘 무왕성지하시니 무왕증재샷다 賦也ㅣ라) 점을 상고하신 왕이 이 호경에 거처하셨다. 오직 거북점이 결정하거늘 무왕이 지으시니 무왕은 인군다우셨다. ○賦也ㅣ라 考는 稽요 宅은 居요 正은 決也ㅣ라 成之는 作邑居也ㅣ라 張子曰此擧諡者는 追述其事之言也ㅣ라 ○부라. 고는 상고함이고, 택은 거처함이고, 정은 결정함이라. 성지는 읍을 지어 거함이라. 장자 가로대 이 시호를 들은 것은 그 일을 추술하여 말함이라.
芑 : 흰 차조 기, 상추 기 ○興也ㅣ라 芑는 草名이라 仕는 事요 詒는 遺요 燕은 安이오 翼은 敬也ㅣ라 子는 成王也ㅣ라 ○鎬京에 猶在豊水下流라 故로 取以起興이라 言豊水에도 猶有芑어늘 武王豈無所事乎아 詒厥孫謀하야 以燕翼子하니 則武王之事也ㅣ라 謀及其孫하니 則子可以無事矣라 或曰賦也ㅣ니 言豊水之傍에도 生物繁茂어늘 武王이 豈不欲有事於此哉리오 但以欲遺孫謀하야 以安翼子라 故로 不得而不遷耳라 (文王有聲八章이라) ○흥이라. 기는 풀이름이라. 사는 일이고, 이는 끼침이고, 연은 편안함이고, 익은 공경함이라. 자는 성왕이라. ○호경에 오히려 풍수가 있어 아래로 흐르느니라. 그러므로 취하여서 흥을 일으킴이라. 말하기를 풍수에도 오히려 기풀이 있거늘 무왕이 어찌 일하는 바가 없으랴(孔氏曰豐水에도 猶以潤澤하야 生芑菜어늘 況武王이 豈不以澤及後人爲事乎아 : 풍수에도 오히려 윤택하여 기풀이 자라거늘 하물며 무왕이 어찌 은택을 후인에게 미치도록 일하지 아니하랴). 그 후손에게 계책을 내려서 공경하는 자식을 편안하게 하셨으니 이는 무왕의 일이라. 계책이 그 손자에게까지 미치니 자식이 가히 일없지 않느니라. 어떤 이는 가로대 부시라 하니 풍수가에도 생물이 번무하거늘 무왕이 어찌 이에 일을 두고자 아니하리오. 다만 후손들에게 계책을 끼쳐서 공경하는 자식을 편안히 함이라. 그러므로 부득이 옮기지 아니할 수 없음이라. (문왕유성8장이라)
文王有聲八章 章五句 此詩는 以武功으로 稱文王하고 至于武王하야는 則言皇王維辟하야 無思不服而已라하니 蓋文王이 旣造其始면 則武王이 續而終之無難也ㅣ라 又以見文王之文은 非不足於武요 而武王之有天下는 非以力取之也ㅣ라 이 시는 무공으로 문왕을 칭찬하고, 무왕에 이르러서는 황왕으로 임금을 삼아서 생각하여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다라고 말했으니, 대개 문왕이 이미 그 시작을 지었다면 곧 무왕이 이어서 마침에 어려움이 없음이라. 또한 문왕의 문은 무에도 족하지 않음이 없었고, 무왕이 천하를 둔 것은 힘으로써 취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냈느니라.
文王之什 十篇 六十六章 四百一十四句 鄭譜에는 此以上은 爲文武時詩라하고 以下는 爲成王周公時詩라하니 今按文王首句에 卽云文王在上하니 則非文王之詩矣요 又曰無念爾祖하니 則非武王之詩矣며 大明有聲은 幷言文武者非一하니 安得爲文武之時所作乎아 蓋正雅는 皆成王周公以後之詩요 但此什은 皆爲追述文武之德이라 故로 譜에 因此而誤耳라 정보(鄭玄의 詩譜)에 이 위로는 문왕 무왕 때에 지은 시라 하고, 이하는 성왕과 주공 때에 지은 시라 하니 이제 문왕의 머리 글귀에 곧 문왕이 위에 계시사 하니 곧 문왕 때에 지은 시라 아니고, 또 네 할아버지를 생각지 아니하랴 하니 곧 무왕 때에 지은 시도 아니며, 대왕유성은 아울러 문왕과 무왕을 말한 것이 하나가 아니니, 어찌 문왕 무왕 때에 지은 바가 되겠는가. 대개 정아는 다 성왕과 주공 이후의 시이고, 다만 이 열편은 다 문왕과 무왕의 덕을 추술한 것이라. 그러므로 정보에 이로 인하여 잘못된 것이라.
[대아(大雅) / 문왕지십(文王之什) 제10편 문왕유성8장(文王有聲八章) 본문 다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