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삼만의 뱀모양 글씨인 ‘산광수색(山光水色)’과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 ‘십이지 뱀그림’, 공주민속극박물관의 ‘십이지 뱀가면’, 불화 ‘시왕도(十王圖)’ 중 뱀지옥 장면(왼쪽부터). 위쪽 큰 그림은 당사주 책 속의 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2013년은 계사년(癸巳年), 뱀띠 해다.
십이지의 여섯 번째 동물인 뱀(巳)은 방향으로는 남남동, 시간적으로는 오전 9시에서 오전 11시, 달로는 음력 4월을 지키는 방위신이자 시간신이다.
십이지 가운데 뱀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동물도 없다. 우선 서양의 경우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든 장본인인 뱀은 인간에게 교활함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사실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기다란 몸뚱이와 소리없이 발밑을 스슥하고 스쳐지나가는 듯한 촉감, 미끈하고 축축할 것 같은 피부, 무서운 독을 품은 채 허공을 날름거리는 길다란 혀, 사람을 노려보는 듯한 차가운 눈초리 등 뱀처럼 외모에서 인간에게 혐오감을 주는 동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뱀은 냄새를 맡기 위해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는 특성 때문에 유혹의 사탄, 이간질, 수다의 대명사로 문화적인 낙인이 찍혀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혐오감 뒤에는 호기심과 관심이 동시에 자리한다.
가령 겨울잠에서 다시 깨어나고 주기적으로 허물(껍질)을 벗는 뱀은 불사(不死)·재생(再生)·영생(永生)의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주도 무속신화에서 알 또는 새끼를 많이 낳는 뱀의 특징은 재물과 풍요, 다산의 상징으로 연결된다. 이른바 업신으로서의 뱀은 업, 지킴이 또는 집구렁이라 해 가옥의 가장 밑바닥에 살면서 집의 재산을 지켜주는 신격(神格)의 존재다.
고대 그리스의 뱀은 지혜의 신, 아테나의 상징물이며 후일 논리학의 상징이 됐다. 잎새의 흔들림 소리로 제우스의 신탁을 알려주는 그리스 최고의 신탁소인 도도나의 나무에도 뱀이 있었고 구약성서 마태오 복음에도 ‘뱀처럼 슬기롭게’란 말이 있다. 이를 통해, 뱀이 지혜와 예언력의 상징이 됐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설화 속에서 뱀은 은혜를 갚은 선한 존재나 복수의 화신, 때론 탐욕스러운 절대악 등 인간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는 대리자로 나타난다. 오래 묵은 구렁이인 이무기는 용이 돼 하늘로 승천하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기다리는 인내의 상징이다. 저승 세계에서 뱀은 악인을 응징하는 절대자로 나타나며 악한 사람은 뱀이 돼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뱀은 파충강 뱀목 뱀아목에 속하는 동물의 총칭이다.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뱀은 11과 2500여 종(국내는 11종이 서식)이며 이 가운데 독 있는 뱀은 4분의 1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뱀으로는 수변지역 주변에 서식하는 무자치와 누룩뱀(석화사 또는 금화사로도 불림), 유혈목이(꽃뱀), 능구렁이, 살모사·쇠살모사·까치살모사 등의 살모사류가 있다.
우리 역사에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나해 이사금, 48대 왕인 경문대왕, 금관가야의 김수로왕, 후백제 견훤 등은 뱀과 관련된 일화가 전하는 인물들이다. 가령 ‘삼국유사’에는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에 흩어져 떨어진 박혁거세의 유체(遺體)를 큰 뱀의 방해로 합장하지 못하고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 지내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뱀이 표현된 사례가 많다. 뱀과 거북의 합체인 사신총 현무도(玄武圖)를 비롯, 삼실총의 장사도(壯士圖)와 교사도(交蛇圖) 등이 대표적이다. 장사도는 뱀이 힘센 역사(力士)의 목에 감겨서 팽팽하게 힘을 뻗치고 있는 형상이며 교사도는 두 개의 S자가 서로 마주보고 얽혀 있는 모양을 한, 두 마리의 뱀이 그려져 있다. 교사도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것만 다를 뿐, 중국의 ‘복희여와도’와 같은 형상이다.
신라토우에서 단연 눈길을 끌고 빈도가 높은 것도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거나 쫓는 형태의 장경호(長頸壺·긴목항아리) 장식이다.
정월 세시풍속 가운데 뱀과 관련 있는 날은 상사일(上巳日)과 대보름이다. 정월의 첫 뱀날인 상사일의 풍속은 대개 뱀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며 대보름에도 ‘뱀치기’ ‘뱀지지’ 등 뱀 퇴치 행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오는 2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박물관 기획전시실2에서 우리 문화 속에서 뱀이 가진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전 ‘상상과 현실, 여러 얼굴을 가진 뱀’을 개최 중이다.
대략적으로 한국인의 12분의 1은 뱀띠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뱀과 연관을 맺고 살고 있다. 조선후기부터 민간에 크게 유행한 당사주 책에서 뱀띠는 “용모가 단정하고 학업과 예능에 능하며 문무를 겸비했다”고 쓰여 있다.
뱀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똑바로 전진할 뿐이라고 한다. 계사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뱀처럼 지혜롭고 민첩하게 상황판단을 잘 해 전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도움말 =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