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아야기

[스크랩] 세기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

ria530 2013. 2. 4. 18:44

세기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


mess 라는 영어 낱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그 뜻 처럼

나에게 '혼란'을 주었다.

의사들이 수술을 할 때 쓰는 뾰죽하고 작은 칼,

그것이 '메스'였다.

나는 영어 좀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메스'가 mess 인 줄 착각했었다.

나중에 자세하게 알고 보니

'메스'는 영어의 msee 가 아니라

네델란드 말의 mes 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삶은 그렇게 혼동하며 말을 사용하고,

사람을 잘못 생각해서 혼란할 때가 많다.

모든 것 (또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바르고 귀하게 쓰여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잘못 쓰여져서 오해 받는 일이 많다.

 



  이 음악:  River Of No Return (Marylin Monroe 가 부름

 

20 세기의 여자 배우, Marylin Monroe,

그 명성처럼 그렇게 많은 오해를 받은 인물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만 보거나 들어도

성적인 대상 아니면

육체만 내세우는 '머리가 빈' 여인 취급했었다.

많은 영화 fan 들이 그녀를 '잘못'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육체적으로 매력적인 여인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골빈 여인' 취급 받지 않았을텐데.."

 

내가 mes 와 mess (겨우 s 하나 차이)를 혼돈해서 썼던 것 처럼

우리는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 (또는 사물)을

오해하고 바른 반단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바로 보는 눈,

바로 듣는 귀

바른 판단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칼 'mes' 와

혼란이라는 낱말의 mess 를 혼돈하듯 ~

 

 


마릴린 먼로는 세기의 섹스 심벌이자 스캔들 메이커로 갖가지 일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많은 염문을 뿌리면서 한때는 아인슈타인과도 교제를 하기도 했고, 1954년 2월 1일에 뉴욕 양키스가 낳은 불세출의 야구 스타 조 디마지오와 떠들썩한 결혼을 한 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초청으로 신혼여행을 겸해 일본을 방문했으나, 신혼생활은 9개월로 단명에 그쳤다.

이와 전후하여 먼로에게 한국전쟁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 미군병사를 위문 공연해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어 가지 말라는 남편 디마지오의 반대로 싸우면서까지 한국으로 향했다.

그녀는 1954년 2월16일 한국을 방문, 주한미군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펼쳤는데 무대 위에서도, 전차 위에서도 임무수행에 피로해지고 거칠대로 거칠어진 병사들 앞에서 정열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디마지오와 이혼 이후 세계적인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했고 미국의 정치 명가인 케네디가 출신의 대통령인 존 F. 케네디,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 같은 정계의 거물, 그리고 이브 몽탕 같은 스타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이 무렵 현재 또는 과거의 미국 공산당의 당원들이 지인이었으며 그 자신도 FBI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멕시코 여행당시 행동들이 보고서에 기록, 당시 FBI국장이었던 에드거 후버에게 제출될 만큼 정치적으로 자유롭지도 못했다.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술과 수면제와 외로움에 취해 침실에서 향년 37세로 삶을 마감했다. 소련의 타스 통신이 전 세계에 먼로의 부고를 최초로 보도했다. 먼로는 할리우드의 비벌리 힐스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여느 때처럼 샤넬 NO. 5의 향수를 뿌린 전라의 모습으로 킹사이즈 침대에서 횡사했다. 100만 달러 남짓한 부동산과 채 고치지 못한 유언장, 전남편 아서 밀러가 쓴 책들과 좋아하는 베토벤의 레코드가 그녀 뒤에 남았다.

먼로의 생활에는 내면적인 자유조차 말살되었다. 할리우드의 상품으로서만 존재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그 모든 생활에 대한 거절을 의미했다. 그녀는 상업주의의 독살에 맞아서 죽은 것이다.


 

 

 

 










공연이 끝난후 마릴린 먼로의 코멘트.
"It was the best thing that ever happened to me.
I never felt like a star before in my heart.
It was so wonderful to look down and see a fellow smiling at me."
일찌기 내가 경험한 최고의 사건이었어요.
전에는 마음 속에 내가 스타라는 느낌이 없었죠.
무대에서 내려다보면서 여러분이 내게 미소짓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 해도 정말로 멋진 일이었어요."




1962년 그녀는 케네디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1년뒤....1963년 8월 5일
그녀는 자택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사인은 약물 과용

.


두번째 남편이었던 조 디마지오는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했다.



로스 엔젤리스 웨스트 우드(West Wood)묘지에 있는 먼로의 납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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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코디언 음악 사랑
글쓴이 : 전연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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