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아야기

[스크랩] 상기하자 6.25

ria530 2012. 3. 2. 19:06

여순반란사건의 관계 전단지 자료들을 올려 봅니다.

쉽게 구경하기 어려웠던 귀한 자료들입니다. 



1. 독립행진곡. 1945년 해방 기념으로 나온 엽서 뒷면입니다.

여기에 독립행진곡 가사가 1절부터 3절까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독립행진곡은 지금까지 1절까지만 주로 알려져 왔습니다.


 

 2. 6.25 전쟁 발발 후 첫 삐라.
 

1950.6.29일 맥아더장군이 영등포 전선을 시찰한 직후인

30일경 후퇴하는 국군과 피난민들에게 뿌린 삐라로

일본주둔 미군이 참전한다는 내용입니다.
 

주일 미군은 7.1일 참전, 삐라의 앞면에는 유엔마크 아래

국한문으로 뒷면에는 영문으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10*16센치 크기입니다.

 

국제연합회는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의 무법한 침략에 대하여 반항하는 귀국을

원조하라고 요청하였음으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원조하겠습니다.
 

견고, 침착, 대담하며 맹렬히 적을 대항하십시오.

우리는 한국과 힘을 합하여 침략자를 귀국으로부터 격퇴하겠습니다.

  

도민에게 고함.

6.25 당시 수도 서울을 사흘만에 함락당하고 후퇴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계속 국민들에게는 승리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동요를 막고자 했습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도민 여러분
북한 괴뢰군은 불법하게도 남침을 감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용감한 군경은 그들을 맹렬히 반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 공군은 28일 밤에는 평양을 비롯한 이북 5대도시를

맹폭하고 30일 아치에는 재차 평양, 함흥, 원산, 평강 비행장을

폭격해서 그들의 비행기 60대 이상을 폭파하고 기지를

사용 불능케까지 하였습니다.
 

남침해 있는 괴뢰군은 그 후퇴로까지 완전히 단절당하여

독안의 쥐가 되고 그완전잔멸은 시간 문제입니다.

해안 역시 우리 해공군이 철통같이 수비하여 괴뢰군이

1인도 상륙할 여지없게 되어있습니다.

도민 여러분은 군경작전에 절대 신뢰하시고 유언, 억측 등에

동요되지 말고 각자 생업에 충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단기 4283년 6월 30일 경상북도 공보과 발표


6.25전쟁 당시의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한

최근의 미국 잡지 [스미소니안]입니다.
피난민과 미군이 서로 엇갈려 걸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6.25 전쟁 당시 중국 정부가 발행한 징집 통지서입니다.

 중국은 이 전쟁을 항미원조전쟁(미제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 전쟁)이라 부릅니다.

'희보'(喜報,기쁜 소식)와 '항미원조 보가위국' (미제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자  국가를 보위하자)는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백선엽 장군이 발행한 귀순증명서.

지리산 지구 빨치산 토벌 작전 당시의 귀순증입니다. 

 

6.25 전쟁당시 전선으로 보낼 혈액을 공급하기 위하여

미국당국이 제작한 헌혈을 권장하는 포스터로

1950년에 제작된 것입니다. 



6.25 전쟁을 다룬 미국 영화 포스터.

미션 오버 코리아 라는 제목의 영화
포스터 입니다. 1953년에 제작된 것.
 

 

미군 입대 독려 포스터.

1951년 미국에서 발행된 포스터로 군대에 자원

입대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유엔측에서 뿌린 삐라입니다.

 
북한에서 발행한 전쟁 포스터입니다.

1950년7월 15일 탁원길의 작품이며, '미제국주의'의 총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모자의 모습을

표현하고있습니다. (서울 아트뱅크 소장) 



1951년 겨울에 뿌려진 삐라입니다.
 



우리측이 뿌린 삐라입니다.

중공군은 좋은 무기는 자기네가 차지하고 못쓸 무기만 북한군에

넘겨주고 있다. 왜? 북한이 약해져서 집어 먹기 쉬우니까..

북한주민들이여! 이젠 여려분이 중공군이 왜 북한군에 쏘지 못할

무기만 넘겨주는지 알았을 것이다.

중공군은 여러분의 적이다!!

우리측이 뿌린 삐라입니다.

참된 애국자로서 중공군이 한국에 들어오기를 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한국에 와 있는가?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있게 때문이다.

한국의 자유를 말살함으로써 덕을 보는 장본인이.....

그것은 로서아다. 반공! 항로! 

 

우리측이 뿌린 삐라입니다.

 

북한과 중공지도자들은 그들이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로서아의

비밀승락없이는 감히 한국에 대한 침략전을 시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침략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한국사람이 죽었으며

수백만명이 집을 잃게되어 한때 자랑스럽고 아름답던

한국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으나 로서아는

여전히 뒤에 앉아 불붙은 침략전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뒤에 서서 이 침략전을 지휘하고 있는 로서아의

침략정책으로 인하여 남녀노소 아까운 한국사람들만

마구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로서아 식민지 노예 정책에 결사 반대하라!! 



유엔군측에서 인민군에게 뿌린 삐리입니다.

인민군을 멀리하라. 우리측이 뿌린 삐라입니다. 


 

전단지입니다.

여순반란사건 당시 지리산의 빨치산에게 뿌린 것인데,

갱지에 인쇄한 것이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해독 불능한 부분을 포함해 내용을 올립니다.

山사람이여 보라.

이치없는 주장과 불가능한 목적아래 희망없이 단말마적인

농산(籠山)을 계속하고 있는 산 사람 여러분!

군들이 그와 같이 굶고 헐벗고 산야를 헤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족을 위함인가? 가족을 위함인가? 또는 자손을 위함인가?

민족을 위한다면 동족 상잔이 무슨 말이며, 가족을 위한다면 헐벗고

굶주리며살고 있는 그대의 가족들은 어찌 된 일인가?

이가 자손을 위함이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대들의 그릇된 사상과 행동으로 인한 일거수 일투족이

우리리 민국을 해하며 민족을 상하고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다는 것은 잘 알 것이다.
 

그러타면 그대들의 사상과 목적이란 근본부터 전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대들이여 뉘우쳐라. 우리 민족은 4천년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싸워야 하며

서로 죽여야 하겠는가 서로 서로가 우리 3천리 강토에서

새로 전 세계의 승인을 받은 당당한 대한민국을 받들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타민족 타국가에 지지않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지 않으려는가?

그대들이여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번은 과오가 있는것이고,

잘못을 생각할때 결연히 그 과오를 청산함에는 절대적인

용기가 필요하며 그는 우리도 잘안다.
 

군들이여 군들의 압길을 생각하여 보라.

날은 점점 추워질 것이며 식량 , 탄약 역시 결핍하여

질것이고 그 위에 정예한 우리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도

근일 중에 있을 것이라. 그러면 군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인가? 아니다. 단 한가지 살길이 있다.

그것은 즉 이번 대통령명령으로 또는 전투사령부에서 선명하신

1월말일까지 무기 지참자는 이유불문하고 즉시 석방함.

무기불지참자도 우(오른쪽)에 00하라는 관대하신 은전000.

산에 있는 그대들이여. 이것이 0000이니 돌연 과오를

청산하고 하루 속히 근방에 있는 지서나 대한청년단으로

귀순하라. 그러면 그대들의 가족의 안전은 물론

그대들도 무조건 석방할 것이다.

이를 믿지 못하는 자여. 대통령께서나 사령관께서

공적으로 천명한 것을 이행하지 않을 이유가 어데 있는가?

잘못을 뉘우쳐라. 결연한 결심을 가지고 이 관대한

은전을 굳게 믿고 하루 속히 나오라.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두손 들고 맞으리라.

 대한청년단보도부 



전단지입니다.

제군들과 함께 싸우던 이 병사는 유엔측으로 넘어온

후로부터 조곰도 먹을 걱정없이 매일을 기쁘게 지나고 있다.

귀순한 10여만 동료들과 같이 그는 지난 날의 긴 야간 행군을 할 때

배고프던 그 쓰라림을 또 다시 겪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그는 지금 배부르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군들은 어떠한가. 왜 제군들은 유엔측이 먹을 것을 보증

하는데도 불구하고 굶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어서 유엔군측으로 넘어오라!!


최근에 구한 현대사 자료입니다.

제목은 반란제군에 고함. 이 전단지의 작성일은 1949년 1월 15일.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항쟁하고 있는

'반란군'을 회유하기 위한 전단지로 보입니다.

식별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원문을 옮깁니다.
 

반란제군에 고함

제군은 다같은 백의민족이다. 혈통이 같고 풍속이 같고 언어가 같은

단군성조의 자손이 아니냐?? 일시적 그릇된 모략과 선동에 유인되어

자신을 희생하고 부모와 처자를 잃으며 선영을 욕되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 어느 사회에서나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인간은 한때의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고치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제군이 어떠한 죄들을 지었다 할 지라도 하루빨리 이를 뉘우치고

자수해 돌아오면 제군의 신명을 안보할 수(편히 지킬 수) 있고

부모와 처자로 더불어 평화스러운 가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좌의 방침으로써 제군의 장래를 보장할 터이니 이 기회를 잃지말고

속히 돌아와 대한민국의 참다운 국민이되라. 만약 차시에

귀순 안한 자는 철처히 전멸 당할 것이다.


 

그대들의 부모와 처자는 눈물로써 그대들의 귀순을 기다리고 있다.

깊이 반성하라.
 

1. 1월 말일까지 무기휴대 귀순자는 죄상여하를 불문하고 석방함.

무기지참치 안한 자도 선처한다.

기타 좌익 단체에 가입한 자도 자수한 자도 이와 같이 선처함

4282년 1월 15일

투사령관 제5구경찰서장
구례군수 대한청년단장
국민회 구례지부 구례군시국대책위원회

** 6.25전쟁의 비극 **


압록강에 첫발을 딛고 맑은 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국군용사.
10월26일 오후 5시50분, 함경남도 혜산에 도착한
6사단 7연대 수색대원의 잊을 수 없는 모습이다.

# 1. 한국전쟁   피난민 전쟁고아 #


한국전쟁 - 분단된 조국과 함께 자유를 찾는 일가족들의 모습.


전쟁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전쟁고아의 모습 1950년 9월 28일 서울 모습


6.25 : 한국전쟁   피난민-전쟁고아 (사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음)


피난길에 오른 한국의 어머니-갓난 아기에 젖은 물리고


다큐극장 '한국전쟁' - 피난길에 지친 한가족이
연합군이 배급한 급식으로 허기를 메우는 모습.


허기를 메우고 있는 피난가족 - 피난길에 지친 한가족이
미군 등 연합군이 배급한 급식으로 허기를 메우는 모습


한국전쟁 - 피난민. 전쟁고아  (조지 풀러 유작전)  


전쟁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한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 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산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게 살아 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이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면 땔감일까 ?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슬픈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하여
"의지의 한국인"을 세 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이 민족의 처절한 단면이다.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이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개털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부분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좋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하다.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에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 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헬로, 쪼꼬렡" 소리치며 따라다니던 한국인이었다.


연을 들고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傷痕(상흔)을 잠시 잊은 듯 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아이가 탈진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마치 요즘 북한 장마당의 꽃제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 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배대를 고개를 외로 꺽고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이 손에 쥔 깡통 속을 바라보는 노인. 전쟁은 노인의 빈 담배대와 소년의 빈 깡통 속에 있었다.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 구를 싣고
수백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길가에 앉아 참외 등을 팔고 있는 아낙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래야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한 지게꾼이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길가에서 잠들어 있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더낼 수 있을까?



흥남철수광경. 흥남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LST`를 다투어 타고 있다. 이 사진은 미공개기록사진 중의 하나다.


철수함정을 타려고 흥남부두에 쇄도한 북한동포들


6·25전쟁 중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 흥남철수 성공뒤엔 `기적의 배`가...59명 정원 메레디스 빅토리호 피란민 1만4000명 자유의 품으로 인도. 1만4000명의 피란민은 물도 약도 없이 3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닿았다.


남으로...남으로... 50년 7월29일 국군의 소개명령으로
지게나 소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행렬


폐허속에서 노숙하는 전란민 가족(1950년 9월)


완전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시가와 전난민들(1950년 9월28일 서울수복당시)


북한동포의 목숨 건 남하 행렬 - 1950년 12월4일 평양을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북한동포들은 이렇게
부서진 대동강다리를 결사적으로 건너 남하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민들 - 51년 1. 4 후퇴때 서울시민들이 철도에서 피난하고 있는 모습
- 이고지고..피란행렬. 51년 1.4후퇴 때 서울시민들이 철도를 따라
피란하고 있다. 피란 보따리 위에 어린이가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6.25 피난생활 "금지구역"


한국전쟁 때 거제도에 도착한 흥남철수 당시의 피난민 모습


임시수도 부산의 천막촌. 1951년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2. 한국전쟁   전투-한국군 #


드디어 38선(한탄강)을 돌파하고 북진중인 육군용사들.


전선으로 긴급 출동하는 국군 기병대.


학도병 전선투입 -인민군을 격퇴하기 위해 국군병사들이 50년 7월5일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몸에 맞지않는 군복과 누비담요, 소총등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아 학도병들인 듯하다.


삽으로 푸는 가마솥밥 -1950년 7월14일 전선에서 국군 취사병들이 임시로 가설한 가마솥에 밥을 지은 뒤 소쿠리에 퍼 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중인 해병대 - 1949년에 제주도에서 창설되어
6.25개전이래 곳곳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한국해병대는 1950년 9월15일 UN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상륙용 주정에서 아군의 함포사격으로 검은 연기 싸인 기슭을 바라보면서 상륙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전쟁-인천상륙작전> 서울에 돌입한 국군선봉대 -
패주하는 인민군을 쫓아 진격을 거듭한 상륙 동진부대 국군과 UN군은
9월15일 드디어 한강을 건너서
9월 26일까지 인민군을 완전 소탕, 서울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평양공략을 위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는 국군1사단 장병들 -
평양 제2의 관문인 보통문이 보인다.(1950.10.17)


38선상의 간이 아치.(1950) 38선돌파 기념으로 우리 국군들이 세운것임.


1950년 10월 아침. 평양입성...평양. 화신앞 모란봉 가는길.
신상철(7사단장)씨와 함께 인민군의 말을 타고 찍은 모습.


국군 입성을 환영하는 함흥 시민들.(1950.10.18)


압록강변에 감격의 태극기 - 1950년 10월26일, 국군 선봉대 용사들이
만주를 눈앞에 바라보는 압록강 기슭 혜산진에 도달하여 감격에 벅차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고창하고 있다.


북한 출격 - 북한의 상공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공군기.


불을 뿜는 무반동총 -
육군이 무반동총을 지급받아 무장한 것은 6.25전란 중이었다.


우리공군기의 출격 -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군사상 최초로 전선으로 출격하는 무스탕 전투기편대


우리 공군기의 출격 -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군사상 최초로 전선으로 출격하는 F-51 전폭기들


한국전쟁중 국군을 위문하고 있는 연예인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2004 NARA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2004 NARA

# 3. 한국전쟁   전투-인민군 #
 

美맨스필드硏 한국전쟁 연구서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며" 출간 -
사진은 부산  인근에서 벌거벗은 채 줄맞춰 이동 중인 인민군 포로들의 모습.


출격 준비 - 북한 공군조종사들이 긴급 출격을 위해
소련제 야크18 전투기에 오르고 있다.


인민군의 망중한 - 북한 인민군 전사가 고향에서 보내온 편지를
참호속에서 읽고 있다. 시점과 장소는 불분명하다.


개전초기 한국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민군 전차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는 인민군.


인민군 탱크들 - 1950년 6월 28일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6.25 하의 서울에서 이른바 `의용군` 끌려가는 장정들.


6.25 전쟁때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T-34-85형 인민군 탱크.
중량32t, 최대시속 50km, 승무원 4명으로 인민군 전력의 핵심이었다.

# 4. 한국전쟁 - 38선. 정전협정#


38선을 긋는 순간 - 유엔군 연락장교 제임스 레이 대령(왼쪽)과
인민군 연락장교 장춘산(오른쪽)이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정하는 협정을
시작하고 지도에 38선을 긋고 있다.(1951.11.26)


1953년 7월 27일 하오 10시 정각부터 12분간에 걸쳐 조인된
정전협정문의 서명.

다시보는 6.25

★오늘 한국전쟁 6.25 제59주년을 맞으며 ★

6.25 전쟁은 400만여명의 인명피해와 1.000만여명의 이산가족 수많은 상이군인, 
전쟁미망인 전쟁고아들이 생겨나고 국토의 80%이상의 국토가 파괴되고, 우리 
민족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읍니다. 공산세력의 세계 적화 의도를 저지하고 
자유를 수호하기위해 헌신한 국내,외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아
울러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를 후세에 올바로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읍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습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언급되었고,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서명 됨으로써 3년 10개월에 걸친 승리 없는 전쟁은 막을 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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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불구명리 불구영
      글쓴이 : 수미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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