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대산 김석진 선생님의 중용강의테이프를 바탕으로 하여 정리했습니다. 테이프의 내용은 1998년 8월부터 11월까지 홍역학회(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전신)에서 진행한 강의를 녹취한 것으로, 교재는 명문당판 『原文備旨 中庸』입니다. 아래 서두나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지는 주자의 중용장구서, 독중용법, 중용장구대전에 대한 해설 글 내용 중 혹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전적으로 편집자의 잘못임을 밝힙니다. 子思가 쓴 중용 원문만을 보려는 분들은‘中庸全文’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 편집 ․ 정리 / 家苑]
中庸은 四書중 하나이자 七書 중 하나이기도 하다. 四書(大學 中庸 孟子 論語)가 賢人이 지은 글이라면 三經(詩經 書經 易經)은 聖人이 지은 글이다. 사서의 첫 글인 대학과 마찬가지로 중용도 禮記 속에서 찾아서 엮은 글이다. 대학이 공자의 도를 전하기 위해 제자인 曾子가 지은 글이라면, 중용은 증자의 제자인 子思, 곧 공자의 손자가 지은 글이다. 공자의 도가 증자로 해서 자사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중용과 대학은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 글로, 중용이 그 속이라면 대학은 그 바깥으로 표리지학(表裏之學)을 이룬다. 그래서 이 둘을 합쳐 흔히 ‘庸學(용학)’이라고 일컫는다. 대학의 첫머리 글이 明德, 親民, 止於至善으로 이어진다면 중용은 性, 道, 敎로 이어지는데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곧 明德과 性, 親民과 道, 至善과 敎는 天地人 三才 관계로 서로 이어진다. 대학의 요점이 ‘착할 선(善)’이라면 중용은 ‘정성 성(誠)’으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다.
중용이란 책 제목은 자사가 주역의 건괘 문언전에서 취한 글이다. 건괘 문언전 구이에 “龍德而正中者也ㅣ니 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야 閑邪存其誠하며 善世而不伐하며 德博而化ㅣ라(용덕이 바르게 가운데 한 것이니 떳떳이(항시) 말을 미덥게 하며, 떳떳이(항시) 행실을 삼가서 간사한 것을 막고 그 정성을 보존하며 세상을 착하게 하여도 자랑하지 않으며, 덕을 넓게 하여 화하게 함이라)”란 문장이 나온다. 여기에서 가운데 바르다는 正中에서 ‘中’과 떳떳이 말을 미덥게 하며 떳떳이 행실을 삼간다는 庸言之信과 庸行之謹에서 ‘庸’을 취해 자사가 공자의 도를 전한 글의 책 제목으로 삼았다. 중용의 핵심적 내용 또한 간사한 것을 막고 그 정성을 보존한다는 閑邪存其誠의 ‘誠’에서 취했음을 볼 수 있다.
中은 한복판으로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불편불의(不偏不倚)로 사람의 중심이자 중도를 말한다. 건괘의 여섯 효에서 초구나 구삼은 正을 얻어 득위(得位)는 했지만 결코 中이 될 수 없다. 즉 中은 正을 내포할 수 있으나 正은 中을 내포할 수 없다. 따라서 위의 正中에서 正은 ‘정히, 진실로’라는 뜻으로 자사가 正을 취하지 아니하고 中을 취한 이유이기도 하다.
좀더 부연하자면 여기에서의 자사가 말한 中은 正中이 아닌 中正을 말하는 것이다. 주역의 대성괘로 볼 때 내괘(하괘)의 중은 음이고 외괘(상괘)의 중은 양이다. 즉 상괘는 하늘로 말하고 하괘는 땅으로 말할 수 있는데, 상괘의 중은 하늘의 한복판 즉 양의 가운데로 다섯 번째 자리(五)가 되고, 하괘의 중은 땅의 한복판 즉 음의 가운데로 두 번째 자리(二)가 중에 해당하는 것이다. 양이 양의 가운데 자리 수 五를 얻고 음이 음의 가운데 자리 수 二를 얻은 것이 바로 중정지도(中正之道)로 주역의 기본사상이다.
자사가 공자의 도를 전했다는 중용은 바로 위와 같은 내용으로 주역의 중정지도를 이은 것이기에 소주역이라고도 한다. 군자가 中을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떳떳한 것으로 庸이 여기에 해당한다. 庸言과 庸行은 평상시에 하는 보통 말과 보통 행실을 말한다. 군자는 평범한 말에도 항시 믿도록 하며 평범한 행동에서도 항시 삼간다. 사람은 때로 간사한 마음이 생기지만 군자는 이런 정중한 덕이 있기 때문에 간사한 마음을 막고 그 정성을 늘 보존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온 천하를 덕으로 교화한다는 것이다.
정치로 말하자면 미물인 초목은 물론 돼지와 물고기까지 따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자문의 화피초목(化被草木)하고 뇌급만방(賴及萬方)이 이에 해당하고 주역의 풍택중부(風澤中孚)괘의 신급돈어(信及豚魚)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곧 중용을 이루려면 中孚의 믿음을 주지 아니하고는 실천할 수 없다. 어미학이 새끼학의 울음에 화답하듯이 가식이 없는 진실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용은 결코 쉬운 글이 아니다. 中이란 글자는 가운데 깊숙이에 있다는 뜻도 된다. 中正과 中孚의 의미를 차근차근 깊이 새기며 中庸에 침잠(沈潛)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