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스크랩] 제2권 夏書 제1편 禹貢 88장~90장 해설(導水)

ria530 2012. 6. 18. 09:59

<禹貢88章>
導弱水하사대 至于合黎하야 餘波를 入于流沙하시다
약수를 인도하시되 합려에 이르러 남은 물줄기를 유사에 들어가게 하시다.

此下는 濬川也라 弱水는 見雍州하니라 合黎는 山名이니 隋地志에 在張掖縣西北하고 亦名羌谷이라하니라 流沙는 杜佑 云在沙州西八十里하니 其沙隨風流行이라 故로 曰流沙라하니라 水之疏導者는 已附于逐州之下하고 於此에 又派別而詳記之하니 而水之經緯를 皆可見矣라 濬川之功이 自隨山始라 故로 導水는 次於導山也라 又按山水컨대 皆原於西北이라 故로 禹敍山敍水에 皆自西北而東南하여 導山則先岍岐하고 導水則先弱水也라

이 아래는 내를 깊이 판 것이라. 약수는 옹주에 나타나니라. 합려는 산 이름이니 『수서』「지리지」에 장액현 서북쪽에 있고 또한 강곡이라 이름한다 하니라. 유사는 두우(杜佑, 735~812, 당나라 때의 사람으로 字는 君卿. 漢나라의 司馬遷 이후 제1의 역사가로 인정받았으며, 저서인 『通典』(200권)은 上古로부터 당의 玄宗때까지 수록한 역사서로서 제도사 연구애 중요한 자료이다. 『理道要訣』은 『通典』의 요점을 정리한 책)가 이르기를 사주의 서쪽 80리에 있으니 그 모래가 바람을 따라 흘러 다니므로 유사라 하니라. 물의 소통하여 인도하는 것은 이미 주의 아래에 붙어 있고, 이곳에서는 또한 물줄기를 나누어 자세히 기록했으니 물의 경위를 다 볼 수 있음이라. 내를 파는 일이 산을 따라서 시작되었으므로 도수는 도산 다음이라. 또 산과 물을 보건대 모두 서북쪽에서 근원하였으므로, 우임금이 산을 차례대로 행하고 물을 차례대로 행함에 다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하여 산을 인도함은 곧 견산과 기산을 먼저 하고, 물을 인도함은 곧 약수를 먼저 했음이라.

<禹貢89章>
導黑水하사대 至于三危하사 入于南海하시다
흑수를 인도하시되 삼위에 이르시어 남해로 들어가게 하시다.

黑水는 地志에 出犍爲郡南廣縣汾關山이라하고 水經에 出張掖雞山하여 南至燉煌하고 過三危山하여 南流入于南海라하고 唐樊綽은 云西夷之水이 南流入于南海者는 凡四니 曰區江曰西珥河曰麗水曰瀰渃江이라 皆入于南海하니 其曰麗水者는 卽古之黑水也니 三危山이 臨峙其上이라하니라 按梁雍二州컨대 西邊이 皆以黑水爲界하니 是黑水는 自雍之西北而直出梁之西南也일새라 中國山勢岡脊은 大抵皆自西北而來하니 積石西傾岷山岡脊以東之水는 旣入于河漢岷江하고 其岡脊以西之水는 卽爲黑水하여 而入于南海라 地志水經樊氏之說이 雖未詳的實이나 要是其地也라 程氏 曰樊綽이 以麗水爲黑水者는 恐其狹小하여 不足爲界라 其所稱西珥河者는 却與漢志葉楡澤으로 相貫하고 廣處可二十里니 旣足以界別二州라 其流又正趨南海하며 又漢滇池는 卽葉楡之地라 武帝初開滇雟時에 其地古有黑水舊祠하니 夷人不知載籍이나 必不能附會요 而綽及道元이 皆謂此澤은 以楡葉所積으로 得名이라하니 則其水之黑은 似楡葉積漬所成이라 且其地는 乃在蜀之正西하고 又東北距宕昌이 不遠하니 宕昌은 卽三苗種裔라 與三苗之敍于三危者는 又爲相應하니 其證驗이 莫此之明也라

흑수는 「지리지」에 건위군 남광현 분관산에서 나왔다 하고, 『수경』에는 장액현의 계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돈황에 이르고 삼위산을 지나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하고, 당나라의 번작(당나라 제17대인 懿宗때의 인물로 운남지역에 파견되었다가 862년 咸通 3년에 남방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蠻書』를 지음)은 ‘서이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가는 것은 무릇 네 가지이니, 가로대 구강과 가로대 서이하와 가로대 여수와 가로대 미약강이라. 모두 남해로 들어가니, 그 여수라는 것은 곧 옛날의 흑수니 삼위산이 그 위에 우뚝 잇닿아 있다’ 하니라. 양주와 옹주를 살펴보건대 서쪽 변경이 모두 흑수로써 경계를 삼았으니, 이 흑수는 옹주의 서북쪽에서부터 곧바로 양주의 서남쪽으로 나오기 때문이라. 나라 안의 산세와 산등성은 대개가 다 서북쪽으로부터 나오니 적석산과 서경산과 민산의 산등성 동쪽의 물은 이미 하수와 한수와 민강으로 들어가고, 그 산등성 서쪽의 물은 곧 흑수가 되어 남해로 들어가니라. 「지리지」와 『수경』과 번작의 설명이 비록 적실한지 자세하지는 못5하나 요컨대 그 지역이라. 정씨 가로대 번작이 여수로써 흑수가 된다는 것은 아마도 그 협소하여 족히 경계 삼지는 못할 듯하니라. 그 서이하라고 칭한 것은 도리어 『한서』「지리지」의 엽유택과는 서로 통하고, 넓은 곳은 가히 20리이니 이미 족히 경계로써 두 주를 가르니라. 그 흐름이 또한 곧바로 남해로 달려가며, 또한 한나라 때의 전지는 곧 엽유의 땅이라. 무제 대 처음으로 전수와 세수를 열었을 때에 그 땅에는 옛날에 흑수의 옛 사당이 있었으니, 이인들이 기록된 글을 알지 못했으나 반드시 억지로 끌어다 붙이지는 아니했을 것이고, 번작과 역도원이 다 이 못은 느릅나무 잎이 쌓여서 이름을 얻었다 하니, 그 물이 은 것은 느릅나무 잎이 쌓이고 잠겨서 이루어진 것 같으니라. 또한 그 땅은 더욱이 촉의 정서쪽에 있고, 또한 동북쪽으로 탕창과의 거리는 멀지 아니하니, 탕창은 곧 삼묘의 후예라. 더불어 삼묘가 삼위에서 펴졌다는 것은 또한 상응하니 그 증험함이 이보다 분명한 것은 없음이라.

葉 ‘師古曰葉音弋涉反’이라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엽’으로 읽음 滇 성할 전, 큰물 전
嶲 소쩍새 휴, 한바퀴 휴, 고을이름 수, 『한서』「지리지」第八上篇에서 “師古曰嶲音先蕊反(안사고가 말하기를 嶲의 음은 ‘먼저 선’과 ‘꽃술 예’의 반)”이라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세’로 읽음.

<禹貢90章>
導河하사대 積石으로 至于龍門하며 南至于華陰하며 東至于底柱하며 又東至于孟津하며 東過洛汭하야 至于大伾하며 北過洚水하야 至于大陸하며 又北播爲九河하야 同爲逆河ㅣ라 入于海하니라
하수를 인도하시되 적석으로부터 용문에 이르며, 남쪽으로 화음에 이르며, 동쪽으로 저주에 이르며, 또 동쪽으로 맹진에 이르며, 동쪽으로 낙수의 물굽이 안쪽을 지나서 대비에 이르며, 북쪽으로 홍수를 지나 대륙에 이르며, 또 북쪽에서 퍼져서 구하가 되었다가 합하여 역하가 된지라. 바다로 들어가니라.

伾 힘셀 비, 여럿이 떼지은 모양, 산 이름

積石龍門은 見雍州하니라 華陰은 華山之北也라 底柱는 見導山하니라 孟은 地名이오 津은 渡處也니 杜預 云在河內郡河陽縣南이라하니 今孟州河陽縣也라 武王師渡孟津者가 卽此니 今亦名富平津이라 洛汭는 洛水交流之內니 在今河南府鞏縣之東이라 洛之入河는 實在東南이나 河則自西而東過之라 故로 曰東過洛汭라 大伾는 孔氏 曰山再成曰伾라 張揖은 以爲在成臯라하고 鄭玄은 以爲在修武武德이라 臣瓚은 以爲修武武德에 無此山이오 成臯山은 又不再成이니 今通利軍黎陽縣臨河에 有山하니 蓋大伾也라하니라 按黎陽山은 在大河垂欲趨北之地라 故로 禹記之하니 若成臯之山이면 旣非從東折北之地요 又無險礙如龍門底柱之須疏鑿이며 西去洛汭가 旣已大近하고 東距洚水大陸이 又爲絶遠하니 當以黎陽者爲是라

적석과 용문은 옹주에 나타나니라. 화음은 화산의 북쪽이라. 저주는 도산에 나타나니라. 맹은 지명이고, 진은 건너는 곳이니, 두예가 이르기를 하내군 하양현의 남쪽에 있다 하니, 지금의 맹주 하양현이라. 무왕의 군사가 맹진을 건넜다는 것이 곧 이곳이니, 지금은 또한 부평진이라 이름하니라. 낙예(洛汭)는 낙수가 교류하는 안쪽이니, 지금의 하남부 공현의 동쪽에 있느니라. 낙수가 하수로 들어가는 곳은 실제로 동남쪽에 있으나, 하수가 곧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동쪽으로 낙수의 물굽이 안쪽을 지난다고 함이라. 대비는 공씨가 말하기를 산이 다시 이루어진 것을 비(伾)라 하니라. 장읍(三國時代 魏國人, 字 稚讓, 백과사전인 『廣雅』지음)은 성고에 있다 하고, 정현(127年-200年, 東漢經學家, 字 康成 어렸을 때 『易經』『春秋公羊傳』등을 익혀 神童으로 불림, 저서에는 『毛詩箋』『三禮注』) 은 수무와 무덕에 있다고 하니라. 신찬(晉代 초기의 인물로 알려짐)은 수무와 무덕에 이러한 산이 없고, 성고산은 또한 다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지금의 통리군 여양현 임하에 산이 있으니 아마도 대비산인 듯하니라. 살펴보건대 여양산은 대하가 곧바로 북쪽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곳에 있으므로 우가 기록하였으니, 만약에 성고의 산이라면 이미 동쪽에서 북쪽으로 꺾여 간 곳이 아니고, 또한 용문과 저주처럼 험하고 가로막혀서 모름지기 뚫어서 소통시키지 못하며, 서쪽으로 낙수의 물굽이 안쪽과의 거리가 이미 너무 가깝고, 동쪽으로 낙수와 대륙과의 사이가 또한 매우 머니, 마땅히 여양으로써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라.

洚水는 地志에 在信都縣이라하니 今冀州信都縣枯洚渠也라 程氏 曰周時에 河徙砱礫이라가 至漢에 又改向頓丘하여 東南流하니 與禹河迹으로 大相背戾라 地志에 魏郡鄴縣에 有故大河하니 在東北하여 直達于海라하니 疑卽禹之故河라 孟康이 以爲王莽河는 非也라 古洚瀆은 自唐貝州로 經城北하여 入南宮하고 貫穿信都하니 大抵北向而入故河於信都之北하니 爲合北過洚水之文하니 當以信都者爲是라 大陸은 見冀州하고 九河는 見袞州하니라 逆河는 意以海水逆潮而得名이라 九河가 旣淪于海면 則逆河는 在其下流니 固不復有矣라 河上播而爲九라가 下同而爲一하니 其分播合同은 皆水勢之自然이니 禹特順而導之耳라

홍수는 「지리지」에 신도현에 있다하니 지금의 기주 신도현 고홍거라. 정씨 가로대 주나라 때에 하수가 영력으로 옮겨갔다가 한나라에 이르러 또 바뀌어 돈구를 향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니 우임금 때의 하수의 자취와는 크게 서로 어긋남이라. 「지리지」에 위군 업현에 옛날의 대하다 있으니 동북쪽에 있어서 곧바로 바다에 이른다 하니 아마도 곧 우의 옛 하수인 듯하니라. 맹강(三國시대 魏나라의 학자로 지리와 천문에 정통)이 왕망하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 옛 홍수의 도랑은 당주와 패주로부터 성북을 경유하여 남궁으로 들어가고 신도를 꿰뚫으니, 대개 북쪽으로 향하여 신도의 북쪽에서 옛 하수로 들어가니 ‘북쪽으로 홍수를 지난다’는 글과 합하니 마땅히 신도로써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라. 대륙은 기주에 나타나고, 구하는 곤주에 나타나니라. 역하는 아마도 바닷물이 거꾸로 흘러서 얻은 이름인 듯하니라. 구하가 이미 바다로 빠졌다면 역하는 그 하류에 있을 것이니, 진실로 다시 있지 못할 것이라. 하수가 위에서 나뉘어 아홉 개가 되었다가 아래에서 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그 나뉘어지고 하나로 합함은 모두 수세의 자연함이니, 우는 다만 순히 인도하였을 뿐이라.

砱 돌구멍 령, 옥소리 령 礫 조약돌 력

今按漢西域傳컨대 張騫이 所窮河源에 云河有兩源하니 一出葱嶺하고 一出于闐하니 于闐은 在南山下라 其河北流하여 與葱嶺河合하여 東注蒲昌海라 蒲昌海는 一名鹽澤이니 去玉門陽關三百餘里라 其水停居하여 冬夏에 不增減하고 潛行地中하여 南出積石이라하니라 又唐長慶中에 薛元鼎이 使吐蕃할새 自壟西成紀縣西南으로 出塞二千餘里하여 得河源於莫賀延積尾하니 曰閟磨黎山이라 其山이 中高四下하니 所謂崐崙也라 東北流하여 與積石河相連하니 河源澄瑩하고 冬春可涉이라 下稍合流하여 色赤하고 益遠에 他水幷注하여 遂濁이라 吐蕃도 亦自言崐崙은 在其國西南이라하니 二說에 恐薛氏爲是라

이제 『한서(漢書)』「서역전」을 살펴보건대 장건(?~기원전 114년, 字는 子文,漢中郡 成固 지금의 陝西省 城固縣 사람. 외교관이자 탐험가로 서역으로 가는 남북도로를 개척)이 하수의 근원을 끝까지 찾아보고 이르기를 하수는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총령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우전에서 나오니, 우전은 남산의 아래에 있음이라. 그 하수가 북쪽으로 흘러 총령하와 합하여 동쪽으로 포창해로 흐름이라. 포창해는 일명 염택이니 옥문 양관과의 거리가 3백여 리라. 그 물이 멈추어서 겨울과 여름에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땅 속으로 숨어 흘러서 남쪽으로 적석에서 나온다 하니라. 또 당나라 장경(唐나라 12대 황제인 穆宗, 795년 ~ 824년 때의 연호) 연간에 설원정이 토번(티벳)에 사신으로 갈 때에 농서 성기현 서남쪽으로부터 변방으로 2천여리를 나가서 하수의 근원을 막하연의 적미(『尙書通考』卷七 ‘禹敷土隨山刊木奠高山大川’에 따라 積尾는 磧尾로 바로잡는다.『冊府元龜』卷六六二 ‘奉使部絶域’에 “其磧尾濶五十里,向南漸狹小,北自沙州之西,乃南入吐渾國,至北轉微,故號磧尾‘라 함)에서 얻었으니 비마여산이라. 그 산이 가운데는 높고 사방은 낮으니 이른바 곤륜이라. 동북쪽으로 흘러서 적석하와 서로 이어지니 하수의 근원이 맑고, 겨울과 봄에는 건널 수 있느니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점 합류하여 색이 붉고 더욱 멀어짐에 다른 물이 함께 흘러들어 마침내 탁해지니라. 토번도 또한 스스로 말하기를 곤륜은 그 나라의 서남쪽에 있다 하니 두 설에 아마도 설씨가 옳은 듯하니라.

騫 이지러질 건 闐 성할 전, 가득찰 전 瑩 밝을 영, 옥빛 영, 거울같이 맑을 영

河自積石으로 三千里而後에 至于龍門이어늘 經에 但一書積石하고 不言方向은 荒遠하여 在所略也라 龍門而下는 因其所經이니 記其自北而南 則曰南至華陰이라하고 記其自南而東則曰東至底柱라하고 又詳記其東向所經之地則曰孟津曰洛汭曰大伾라하고 又記其自東而北則曰北過洚水라하고 又詳記其北向所經之地則曰大陸曰九河라하고 又記其入海之處則曰逆河라 自洛汭而上은 河行於山하니 其地皆可巧어니와 自大伾而下는 垠岸 高於平地라 故로 決齧流移하여 水陸變遷하니 而洚水大陸九河逆河를 皆難指實이라 然이나 上求大伾하고 下得碣石하여 因其方向하여 辨其故迹이면 則猶可考也라 其詳悉見上文하니라

하수가 적석으로부터 3천리 뒤에 용문에 이르거늘 경문에는 다만 한번 적석을 쓰고 방향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득히 멀어 생략한 바가 있음이라. 용문 이하는 그 경유한 바로 인하였으니, 그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기록한 것은 곧 남쪽으로 화음에 이른다하고, 그 남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기록한 것은 곧 동쪽으로 저주에 이른다 하고, 또 그 동쪽에서 경유하는 지역을 향하여 갈 때는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곧 가로대 맹진, 가로대 낙예, 가로대 대비라 하고, 또 그 동쪽으로부터 북쪽으로 기록함에는 곧 북쪽으로 홍수를 지났다 하고, 또 그 북쪽에서 겨유하는 지역을 향하여 갈 때에는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곧 가로대 대륙, 가로대 구하라 하고, 또 그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기록함에는 곧 가로대 역하라 하였음이라. 낙예로부터 이상은 하수가 산에서 흘러갔으니 그 지역을 다 상고할 수 있지만 대비로부터 이하는 땅끝 벼랑(江岸)이 평지보다 높으니라. 그러므로 빨리 침식되면서 흘러 움직여서 물과 육지가 변해가니 홍수와 대륙과 구하와 역하를 다 실체를 가리키기가 어려우니라. 그러나 위에서 대비를 찾아내고, 아래에서 갈석을 얻어내 그 방향을 따라서 그 옛 자취를 분별한다면 지금도 역시 상고할 수 있음이라. 그 자세한 것은 모두 윗글에 나타나니라.

垠 끝 은, 벼랑 은 決 터질 결, 빠를 혈 齧 깨물 설, 침식할 설

○又按컨대 李復이 云同州韓城北에 有安國嶺하니 東西四十餘里요 東臨大河라 瀕河有禹廟한대 在山斷河出處라 禹鑿龍門에 起於唐張仁愿所築東受降城之東하여 自北而南하여 至此山盡이라 兩岸石壁峭立하고 大河盤束於山峽間千數百里라가 至此하여 山開岸闊하니 豁然奔放하여 怒氣噴風하고 聲如萬雷라하니라 今按舊說컨대 禹鑿龍門하되 而不詳其所以鑿이오 誦說相傳에 但謂因舊修闢하여 去其齟齬하여 以決水勢而已라 今詳此說하면 則謂受降以東으로 至於龍門은 皆是禹新開鑿이니 若果如此면 則禹未鑿時에 河之故道不知却在何處라 而李氏之學極博이로되 不知此說又何所考也라

또한 살펴보건대 이복이 이르기를 동주 한성의 북쪽에 안국령이 있으니 동서로 40여리요, 동쪽으로는 대하에 다다름이라. 빈하에 우임금의 사당이 있는데 산이 끊기고 하수가 나오는 곳에 있음이라. 우가 용문을 뚫을 때에 당나라 장인원이 쌓은 동수강성의 동쪽에서 일어나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이 산에 이르러 다하였음이라. 두 강안의 석벽이 우뚝 서고 대하가 골짜기 천 수백 리를 감아 돌다가 이곳에 이르러 산이 열리고 강안이 넓어지니 탁 트여 힘차게 내달려 노기가 뿜어져 바람이 일고, 소리가 마치 만 번의 우레와 같다 하니라. 이제 옛 설들을 살펴보건대 우가 용문을 뚫었으되 그 뚫게 된 바가 자세하지 않고, 서로 전해져오는 설명에는 다만 옛것으로 인하여 닦고 열어서 그 어긋난 것을 제거하여 물의 기세를 터놓았을 뿐이라. 이제 이 말들을 자세히 살핀다면 수강성의 동쪽으로부터 용문에 이르는 것은 모두 우가 새롭게 뚫어 열었으니 만약에 과연 이와 같다면 우가 뚫지 않았을 때에 하수의 옛 길이 도리어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음이라. 이씨의 학문이 매우 해박하지만 이 설은 또한 참고한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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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家苑 이윤숙의 庚衍學堂(한자와 유학경전)
글쓴이 : 溫故知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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