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는 내용에 따라 형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지만 여기서는 ‘동양고전 왜 읽어야 하나’ 하는 주제에 맞춰 시에 관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詩는 글자 그대로 믿을(寺 : 믿을 시, 관청 시, 절 사) 수 있는 말(言)로, 뜻을 말하는 것(言志)이며, 노래는 여기에 가락을 붙여 말을 길게 빼는 것(歌, 永言)입니다. 詩라고 얘기할 때 흔히 노랫말이며, 유교문화권에서 남아있는 노래말, 곧 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는 지금부터 2천5백년전에 공자가 편찬한 『시경』입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는 3천여년 이상 된 시도 있다는 뜻입니다.
노랫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는 말이 간결합니다. 『주역』을 보면 “장차 배반할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속마음으로 의심하는 자는 그 말에 가지가 돋고, 길한 사람의 말은 적고,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고, 착한 것을 속이는 사람은 그 말이 놀고, 그 지킴을 잃은 자는 그 말이 비굴하다(將叛者는 其辭 慙하고 中心疑者는 其辭 枝하고 吉人之辭는 寡하고 躁人之辭는 多하고 誣善之人은 其辭 游하고 失其守者는 其辭 屈하니라 - 『주역』계사하전 제12장)고 하였습니다. 좋은 말이나 남을 설득시킬 수 있는 말은 복잡하지도 않고 중언부언하지도 않습니다. 간결할 뿐입니다. 간결한 말 속에는 많은 뜻이 응축되어 사람들 스스로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둘째, 말이 간결하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러하기에 공자는 노랫말이야말로 사람들을 교화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므로 이를 중시하여 『시경』이라는 책을 엮었습니다. 시의 교훈적인 얘기는 역사 속에서 증명되었으므로 예로부터 『시경』은 역사책인 『서경』과 함께 시서(詩書)라고 하여 반드시 공부해야 할 글이었습니다. 통치철학이자 정치학인 유학경전인 사서삼경 속에 『시경』이 포함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당시까지 유행하던 삼천여편의 시를 모아서 10분의 1인 311편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한 뒤에 “詩三百에 一言以蔽之면 曰思無邪라(시 삼백에 한 마디 말로써 덮는다면 생각함에 삿됨이 없음이라)”라고 했습니다. 『논어』 곳곳에서도 언급되지만 『시경』의 글들이 “興也라 賦也라”하고 끝나 마음이 흥기되어 즐겁기는 하지만 關雎(관저)장에서 보듯이 음탕한 데로 흐르지 않고[樂而不淫], 마음을 슬프게 했어도 마음속 깊이 상처 입는 일이 없고[哀而不傷], 군자가 숙녀를 그리는 마음이 삿될 것 같은 데도 삿된 곳으로 흐르지 않음을 이른 말입니다. 공자의 이 말은 뒷날 시 내용을 규정짓는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고 뒷날 이른바 ‘한시작법’의 모태가 됩니다.
그렇다면 시를 읽으면 무슨 효과가 있을까요? 역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보겠습니다. “興於詩(흥어시)”라고 했습니다. 시는 성정(性情)을 근본으로 했으나 삿되고 바름이 있어서, 그 말이 알기 쉽고, 알고서 읊는 사이에 마음을 억누르기도 하고 고양시켜 반복하는 사이에 사람을 감동시켜 쉽게 몸에 배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 늘 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얻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정치를 하고 외국의 사신으로 가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 삼 백편을 외우면서 정사를 맡기면 통하지 못하며, 외국의 사신으로 나가서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誦詩三百호대 授之以政에 不達하며 使於四方에 不能專對하면 須多나 亦奚以爲리오 / 『논어』 자로편 제5장)”라고 했습니다. 시 속에는 정치하는 법을 비유하여 노래한 시가 많습니다. 오늘날 참여시라고 하는 것이 이런 의미에 해당될 것입니다. 시를 많이 읽다보면 교양이 풍부해져 맞닥뜨린 일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제자들에게 시를 배울 것을 권장합니다. “시를 읽으면 흥기되고, 사물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으며, 무리와 더불어 화합하지만 함께 어울려 방탕한 짓은 하지 않고, 억울한 일에 대해 원망할 줄은 알지만 그로 인해 성내며 상하게 하는 일이 없을뿐더러, 부모를 섬기고 인군을 섬기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발로되며, 정서가 풍부해져 아는 것이 많아진다(詩는 可以興이며 可以觀이며 可以群이며 可以怨이며 邇之事父며 遠之事君이오 多識於鳥獸草木之名이니라 : 시는 가히 흥기함이며, 가히 관찰함이며, 가히 무리하며, 가히 원망함이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며, 멀리는 인군을 섬기고, 조수와 초목의 이름에 대하여 많이 아니라. - 『논어』 양화편 제9장)”고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이 『시경』을 공부하게 되면 고대의 문물제도는 물론 당시인들의 생활문화와 문화적 감성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어 폭넓은 역사관을 세울 수 있고, 전통문화의 맥을 찾는 매우 유용한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면 적어도 『시경』의 핵심인 국풍(國風)의 주남(周南)편과 소남(召南)편을 꼭 읽을 것을 권장합니다. “사람이면서 주남 소남을 공부하지 아니하면 그 바로 담을 향하여 서 있는 것과 같다(人而不爲周南召南이면 其猶正牆面而立也與인저 - 양화편 제10장)”고 했습니다. 담을 향하여 선다는 것은 지극히 가까운 땅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물건도 보지 못하고,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음을 이른 말입니다. 이 말은 공자가 아들인 백어(伯魚)에게 하는 말로 시가 갖는 중요성을 짚는 내용입니다.
시의 이러한 의미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초중등학교에서도 시를 배웁니다. 어떻게 배웁니까? 시험을 염두에 두고 선생님이 분석해주는 것에 따라 시의 형식, 말의 상징적 의미 등등을 열심히 써두고 밑줄 치며 외웁니다. 입시 위주로 공부하다보니 시의 본질적인 것은 모두 잃어버린채 앙상한 뼈다귀와 껍질만을 부여잡고 분석하고 ‘정답’을 찾아내기에 바쁩니다. 신경림 시인이나 최승호 시인 모두 자신들이 쓴 시의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했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최 시인은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진짜 작가가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건지 참 미스터리”라고 개탄하고 문학교육을 ‘가르침’을‘가래침’이라고까지 극언을 하였습니다.
이 말과 관련하여 맹자의 얘기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說詩者는 不以文害辭하며 不以辭害志오 以意逆志라야 是得之矣라” 시를 해설하는 자는 글로써 말을 해치지 말며, 말로써 (지은이의) 뜻을 해치지 말고, (나의, 읽는 자의) 의도(意)로써 (지은이의) 뜻(志)을 맞이하여야 이에 얻음이 되니라(『맹자』만장상편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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