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孟子ㅣ 曰王者之迹이 熄而詩亡하니 詩亡然後에 春秋ㅣ 作하니라 맹자 가라사대 왕자의 자취가 사라지고 시가 없어지니 시가 없어진 연후에 춘추가 지어졌느니라.
熄 : 꺼질 식, 사라질 식
[본문 해설] ‘王者之迹이 熄而詩亡하니’의 구절과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아래 앞주에서처럼 주자는 주나라 평왕이 동천한 이후 정교와 호령이 천하에 미치지 않은 것을 ‘王者之跡熄’이라 표현하고 ‘詩亡’은 王風(周王 畿內의 詩) 서리의 시가 국풍으로 떨어져 雅가 없어졌음을 말한다고 하였다. 趙岐는 聖王의 어진 정치가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이에 따라 성왕의 덕을 頌揚하는 노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 없어졌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지금 전하는 『시경』에는 이른바 공자 이전의 춘추시대의 시도 들어있으므로 엄격하게는 성왕의 자취가 없어지자 시가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대체로 조기는 頌詩 계열의 시를, 주자는 雅詩 계열의 시를 각각 기준으로 하여 詩亡의 뜻을 설명했다. 한편 국풍시를 기준으로 하여 설명한 경우도 있다. 송나라의 申王柏의『詩疑』, 焦循의 『孟子正義』등에는 王者가 각 지방의 제후국을 巡狩하여 太師로 하여금 그 지방의 시를 늘어놓아 정교의 득실을 살피던 일을 폐하고, 또 採詩官이 각 지방의 시를 채집해 온 것을 중앙에서 諷誦하던 일이 없어져서 시가 더 모이지 않게 된 것을 말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른바 陳詩, 採詩의 설을 근거로 한 주장으로 지방가요인 국풍시를 중심으로 한 견해이다. 王者之跡熄은 謂平王이 東遷而政敎號令이 不及於天下也ㅣ라 詩亡은 謂黍離ㅣ 降爲國風而雅ㅣ 亡也ㅣ라 春秋는 魯史記之名이니 孔子ㅣ 因而筆削之하사대 始於魯隱公之元年하니 實平王之四十九年也ㅣ라 왕자의 자취가 사라졌다함은 평왕이 동으로 천도하면서 정교와 호령이 천하에 미치지 못함을 이름이라. 시가 없어졌다 함은 서리가 강등하여 국풍이 되고 아가 없어짐이라. 춘추는 노나라 역사 기록의 이름이니 공자가 인하여 기록하고 삭제하시되 노나라 은공 원년에서 시작하니 실제 평왕 49년이라. 晉之乘과 楚之檮杌와 魯之春秋ㅣ 一也ㅣ니라 진나라의 승과 초나라의 도올과 노나라의 춘추가 하나이니라.
檮 : 등걸 도, 악한 짐승 이름 도 杌 : 나무그루터기 올, 악한 짐승 이름 올 乘은 義未詳이라 趙氏ㅣ 以爲興於田賦乘馬之事라 하고 或 曰取記載當時行事하야 而名之라 하니라 檮杌은 惡獸名이라 古者에 因以爲凶人之號하니 取記惡垂戒之義也ㅣ라 春秋者는 記事者ㅣ 必表年하야 以首事하니 年有四時故로 錯擧以爲所記之名也ㅣ라 古者에 列國이 皆有史官하야 掌記時事하니 此三者는 皆其所記冊書之名也ㅣ라 승은 뜻이 상세하지 않음이라. 조씨가 써 田賦와 승마의 일에서 일어나 되었다 하고 혹자는 가로대 당시 행사를 기재함을 취하여 이름하였다 하니라. 도올은 나쁜 짐승의 이름이라. 옛날에 인하여 흉인의 부름으로 삼았으니 악한 일을 기록하여 경계를 드리우는 뜻을 취함이라. 춘추는 일을 기록하는 자가 반드시 해를 표시하여 일의 머리로써 하니 年에는 사시가 있는 고로 번갈아 들어서 써 기록하는 바의 이름으로 삼음이라. 옛날에 열국이 모두 사관을 두어 때의 일을 관장하여 기록하니 이 세 가지는 모두 그 기록한 바 책과 글의 이름이라. 其事則齊桓晉文이오 其文則史ㅣ니 孔子ㅣ 曰其義則丘ㅣ 竊取之矣로라 하시니라 그 일은 곧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이오 그 글은 곧 사이니(사관의 기록이니), 공자 가라사대 그 뜻은 곧 구가 그윽이 취호라 하시니라. 春秋之時에 五覇迭興而桓文이 爲盛하니라 史는 史官也ㅣ라 竊取者는 謙辭也ㅣ라 公羊傳에 作其辭則丘ㅣ 有罪焉爾라 하니 意亦如此하니라 蓋言斷之在己하니 所謂筆則筆하고 削則削하야 游夏ㅣ 不能贊一辭者也ㅣ라 尹氏 曰言孔子ㅣ 作春秋에 亦以史之文으로 載當時之事也ㅣ로대 而其義則定天下之邪正하야 爲百王之大法이니라 ○此는 又承上章에 歷敍群聖하야 因以孔子之事로 繼之而孔子之事는 莫大於春秋라 故로 特言之하시니라 춘추의 때에 오패가 갈마들어 일어나니 환공과 문공이 성대하였니라. 사는 사관이라. 그윽히 취했다 함은 겸손의 말이다. (춘추)공양전에 짓기를 그 말인즉 구가 죄있다 하니 뜻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개 결단함이 자기 몸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른바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여 자유와 자하가 능히 한 마디로 돕지 못했느니라. 윤씨(尹焞) 가로대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심에 또한 사관의 문체로써 당시의 일을 기재하되 그 의는 곧 천하의 그릇된 정치을 정하여 모든 왕의 대법이 되었음을 말씀하심이라. 이는 또 윗 장을 이어 여러 성인을 차례로 서술하야 인하여 공자의 일로써 이으니 공자의 일은 『춘추』보다 더 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특별히 말씀하시니라.
袒 : 웃통벗을 단 免 : 면할 면, 여기서는 '벗을 문' *** 袒免(단문) : 먼 친척의 喪에 오른쪽 소매와 冠을 벗고 四角巾을 쓰는 약식 상복을 가리킨다. 四世인 高祖가 같으면 팔촌 형제간으로 緦麻服을 입으며, 五世가 지나 팔촌을 넘으면 服이 없고 단지 袒免을 하여 哀悼를 표한다. 予ㅣ 未得爲孔子徒也ㅣ나 予는 私淑諸人也ㅣ로라 내 시러곰 공자의 무리가 되지 못하였으나 나는 그 사람을 그윽이 사모하노라(사숙하노라). 私는 猶竊也ㅣ라 淑은 善也ㅣ라 李氏 以爲方言이라 하니 是也ㅣ라 人은 謂子思之徒也ㅣ라 自孔子卒로 至孟子游梁時에 方百四十餘年으로 而孟子ㅣ 已老하시니 然則孟子之生이 去孔子未百年也ㅣ라 故로 孟子ㅣ 言予雖未得親受業於孔子之門이나 然이나 聖人之澤이 尙存하야 猶有能傳其學者故로 我得聞孔子之道於人하야 而私竊以善其身이라 하시니 蓋推尊孔子하고 而自謙之辭也ㅣ라 ○此는 又承上三章에 歷敍禹舜하고 至於周孔하야 而以是終之하시니 其辭ㅣ 雖謙이나 然이나 其所以自任之重이 亦有不得而辭者矣니라 사는 그윽함과 같으니라. 숙은 착함이라. 이씨가 써 방언이라 하니 이것이라. 人은 자사의 무리를 이름이라. 공자가 돌아가시고부터 맹자가 양나라에 유하실 때에 이르기까지 바야흐로 140여년으로, 맹자가 이미 늙으셨으니 그러한즉 맹자의 태어남은 공자와의 거리가 백년이 못되느니라. 그러므로 맹자가, “나는 비록 직접 공자의 문인에게 수업하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성인의 은택이 아직 남아있어 오히려 능히 그 배움을 전하는 자가 있는 고로 내가 공자의 도를 남에게 얻어 들어 그윽이 써 그 몸을 착하게 하니라” 하시니 대개 공자를 밀어 높이고 스스로 겸손하여 말씀하심이라. ○이는 또 위 삼장을 이어서 차례로 순임금과 우임금을 서술하고, 주공 공자에 이르러서 이로써 끝맺음하시니, 그 말씀은 비록 겸손하나 그러나 그 써 스스로 맡은 바의 무거움은 또한 사양하지 못함이 있음이라.
私淑 :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의 인격이나 학문을 본으로 삼고 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