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浩生不害ㅣ 問曰樂正子는 何人也잇고 孟子ㅣ 曰善人也ㅣ며 信人也ㅣ니라 호생불해가 물어 가로대 악정자는 어떤 사람이니잇고? 맹자 가라사대 착한 사람이며 신실한 사람이니라. 趙氏 曰浩生은 姓이오 不害는 名이니 齊人也ㅣ라 조씨 가로대 호생은 성이오, 불해는 이름이니, 제나라 사람이라. 何謂善이며 何謂信이잇고 무엇을 일러 착하다 하며, 무엇을 일러 신실하다고 하니잇고? 不害ㅣ 問也ㅣ라 불해가 물음이라. 曰可欲之謂善이오 가라사대 가히 하고자 함을 일러 선이라 하고, 天下之理ㅣ 其善者는 必可欲이오 其惡者는 必可惡니 其爲人也ㅣ可欲而不可惡면 則可謂善人矣니라 천하의 이치가 그 선한 자는 반드시 가히 하고자 하고 그 악한 자는 반드시 가히 미워하니, 그 사람됨이 가히 하고자 하면서 가히 미워하지 않는다면 가히 일러 착한 사람이라 하니라. 有諸己之謂信이오 그 몸에 있음을 일러 신이라 하고, 凡所謂善을 皆實有之하야 如惡惡臭하고 如好好色하면 是則可謂信人矣니라 ○張子ㅣ 曰志仁無惡之謂善이오 誠善於身之謂信이니라 무릇 이른바 선을 모두 실제로 갖고 있어서 악취를 미워하는 것같이 하고 호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한다면 이는 곧 가히 일러 신실한 사람이라 하니라. ○장자 가라사대 인에 뜻하고 악함이 없음을 일러 착하다 하고, 진실로 몸에 착하게 함을 일러 신실하다 하니라.
[앞주 해설] ‘如惡惡臭 如好好色’은 『대학』착간고정 전문 제6장인 성의(誠意)장에 나오는 글귀이다. 참고하면, “所謂誠其意者는 毋自欺也ㅣ니 如惡惡臭하며 如好好色이 此之謂自謙이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ㅣ니라”(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악한 내음을 미워하는 것같이 하며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것같이 함이 이 이르되 스스로 쾌족함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니라)라 하였듯이 신실하다는 것은 반드시 자기 몸에 성실해야 하므로 홀로 있을 때라도 삼가야 한다.
充實之謂美오 충실함을 일러 미라 하고, 力行其善하야 至於充滿而積實이면 則美在其中하야 而無待於外矣니라 그 선을 힘써 행하여 충만하고 쌓여서 알참에 이르면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에 있어 밖에서 기다림이 없느니라.
[앞주 해설] ‘美在其中’은 『주역』곤괘 문언절 제2절에 육오의 黃裳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는 내용에 나온다. “君子ㅣ 黃中通理하야 正位居體하야 美在其中而暢於四支하며 發於事業하나니 美之至也ㅣ라”(군자가 누런 가운데 이치를 통해서 바른 자리에 몸을 거하여,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 있어 사지에 빛나며 사업에 발하나니, 아름다움의 지극함이라.) 黃中通理는 중앙토색 즉 땅의 중덕에서 이치를 통하라는 뜻이고, 正位居體는 땅의 자리가 아래이므로 아랫도리를 가리는 치마 노릇을 하여 아래에서 바르게 거처하라는 뜻이다. 모든 초목과 조수, 동식물의 땅 속(中)에서 제각기 자리를 얻어(正) 안으로 생명의 아름다운 본성을 갖추고 밖으로 힘찬 생명활동을 한다. 사람도 내면의 아름다운 성품을 깨달아 자신의 본분에 바르게 거처하여 만물의 영장인 사람 구실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무도 뿌리를 내리면 그대로 줄기와 가지를 뻗어 잎새와 열매를 맺듯이 여자도 여자의 본분을 지키면 아기를 잉태하고 가정을 이루게 된다(美在其中而暢於四支 發於事業). 바싹 마른 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축축한 음에서만 아름다운 생명이 나오는 것이다. 黃中通理와 正位居體는 사람이 가부좌를 하고 하단전에 마음을 두면서 觀공부 또는 호흡, 명상 등으로 심신 수양을 하여 본성을 깨우치는 것을 뜻하며, 美在其中而暢於四支와 發於事業은 사람의 심장에서 피가 온몸으로 흘러 아름다운 생명활동을 뜻하는 것이니, 아름다움의 지극함이라 한 것이다. 充實而有光輝之謂大오 충실하면서 빛남이 있음을 일러 대라 하고, 和順積中而英華發外하야 美在其中而暢於事支하고 發於事業이면 則德業至盛而不可加矣니라 조화롭고 온순함이 (마음) 가운데 쌓여서 아름답게 빛남이 밖으로 드러나(‘和順積中而英華發外’는『禮記』樂記편에서 나오는 표현으로, 좋은 음악에 대한 정의로 쓰인 말이다.)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 있어 사지에 빛나며 사업에 발하면 덕업이 지극히 성하여 가히 더하지 못하니라. 大而化之之謂聖이오 크면서 화하게 함을 일러 성이라 하고, 大而能化하야 使其大者로 泯然無復可見之迹이면 則不思不勉하야 從容中道하야 而非人力之所能爲矣니라 張子ㅣ 曰大可爲也어니와 化不可爲也니 在熟之而已矣니라 크면서 능히 화하여 그 큰 것으로 하여금 없어져 다시는 가히 볼 자취가 없다면 생각하지 않고 힘쓰지 않아도 조용히 도에 맞아서 사람의 힘이 능히 하는 바가 아니니라. 장자 가라사대 큼은 가히 하거니와 화함은 가히 하지 못하니 익숙함에 있을 뿐이니라.
[앞주 해설] ‘不思不勉 從容中道’는 『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말이다.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誠者는 天之道也ㅣ오 誠之者는 人之道也ㅣ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야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ㅣ오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ㅣ니라”(誠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誠을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니, 성실이란 것은 힘쓰지 않아도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져 종용히 도에 맞으니 성인이요, 성실하게 하는 것은 선을 가려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니라) 聖而不可知之之謂神이니 성스러우면서 가히 알 수 없는 것을 일러 신이라 하니, 程子ㅣ 曰聖不可知는 謂聖之至妙하야 人所不能測이니 非聖人之上에 又有一等神人也ㅣ니라 정자 가라사대 성스러우면서 가히 알 수 없음은 성스러움이 지극히 묘하여 사람이 능히 헤아리지 못하는 바이니 성인의 위에 또한 한 등급의 신인이 있다는 것이 아님을 이름이라.
[앞주 해설] 『주역』건괘 문언전에서 “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ㅣ 其唯聖人乎인저”라고 하여 성인은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하고 망함을 알아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라고 하였고, 계사상전 제5장에서 “陰陽不測之謂ㅣ 神이라”고 하여 음과 양으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일컬어 신이라 하였다. 樂正子는 二之中이오 四之下也ㅣ니라 악정자는 두 가지의 중간이오, 네 가지의 아래하니라. 蓋在善信之間이니 觀其從於子敖하면 則其有諸己者ㅣ 或未實也ㅣ니라 張子ㅣ 曰顔淵 樂正子ㅣ 皆知好仁矣로대 樂正子는 志仁無惡하고 而不致於學이니 所以但爲善人信人而已오 顔子는 好學不倦하야 合仁與智하야 具體聖人하니 獨未至聖人之止耳니라 ○程子ㅣ 曰士之所難者는 在有諸己而已니 能有諸己면 則居之安하고 資之深하야 而美且大ㅣ 可以馴致矣어니와 徒知可欲之善而若存若亡而已면 則能不受變於俗者ㅣ 鮮矣니라 尹氏 曰自可欲之善으로 至於聖而不可知之神이 上下一理니 擴充而至於神이면 則不可得而名矣니라 대개 선과 신의 사이가 있으니 그 자오를 따른 것을 본다면(離婁章句上 제24장 참고할 것), 그 몸에 있는 것이 혹 알차지 못하니라. 장자 가라사대 안연과 악정자가 다 인을 좋아할 줄 알되, 악정자는 인에 뜻하여 악함이 없고 배움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니 써한 바 다만 착한 사람과 신실한 사람이 될 뿐이오, 안자는 배움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아 인과 더불어 지에 합하여 몸에 성인을 갖추었으니 다만 성인의 그침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이라. ○정자 가라사대 선비가 어렵다고 하는 바는 그 몸에 두고 있을 뿐이니 능히 그 몸에 두었으면 거처함에 편안하고 바탕함이 깊어, 아름답고 큼이 가히 써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거니와 한갓 가히 하고자 하는 선을 알아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은 것 같기도 할 뿐이라면 능히 세속의 변화를 받지 않을 자 드무니라. 윤씨 가로대 可欲之善으로부터 聖而不可知之神에 이르기까지 위아래가 한 가지 이치이니 확충하여 신에 이른다면 가히 얻어서 이름하지 못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