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命之謂性이오 率性之謂道ㅣ오 修道之謂敎ㅣ니라 하늘이 명한 것을 성품이라 이르고, 천명의 성품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르고, 그 성품을 따르는 길을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이르느니라
[본문 해설] 천명 = 성(性), 솔성 = 도(道), 수도 = 교(敎)는 대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삼강령인 명명덕(明明德)과 친민(親民)과 지어지선(止於至善)과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중용도 天地人 삼재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우리에게 명해준 것이 성품이므로 곧 天命之謂性이고, 하느님에게서 타고난 성품을 내가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길(道)이므로 곧 率性之謂道이고, 그 성품을 따르는 도를 잘 닦아 나가 마름질 해놓은 것이 가르침이므로 곧 修道之謂敎이다. 도를 잘 닦아 나가는 것, 즉 마름질하는 것이 바로 교육적인 가르침(敎)이 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받아 道를 따라가는 것이며, 그 도를 가다 보면 率性이 되고 결국 천명을 그대로 받드는 것이 된다. 성품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역 계사상전 제8장에서 공자가 “이루어진 성품을 존하고 존함이 도의의 문이라(成性存存이 道義之門이라)” 하신 말씀과 통하는 글귀이다. 주역 계사상전 제5장에서는 “한 번은 陰을 하고 한 번은 陽을 하는 것이 道이고, 이를 이어나가는 것은 善이 되며, 이를 이룬 것은 性이라(一陰一陽之謂ㅣ 道ㅣ니 繼之者ㅣ 善也ㅣ오 成之者ㅣ 性也ㅣ라)”하였다. 사람은 원래 善하게 타고 난다. 그 선을 바탕으로 이어나가면서 이룬 것이 性이 된다. 繼之者善은 1년으로 말하면 元亨의 봄과 여름을 말하고, 成之者性은 利貞의 가을과 겨울에 해당한다. 하늘 그대로 이어받기는 받았지만 어떻게 여물지 모르는 상태가 繼之者善이고 가을이 되면 부여받은 성질대로 여무는 것이 成之者性이다. 그 成之者性이 계속 存存하는 成性存存만 된다면 道義의 문이 된다는 것이다. 도는 그 體이고 義는 그 用이다. 곧 도덕과 의리이다. 성성존존하게 된다면 이것은 곧 도덕과 의리를 행하는 문이 되어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이나 우리 몸은 모두가 역의 이치로 만들어졌다. 자신의 몸을 자연과 더불어 순수하게 천명 그대로 이끌어나갈 때 率性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存存하는 것이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모습 그대로 천성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주역의 본체로 들어가서 역을 깨닫고 도를 통하게 되는데, 중용을 소주역이라 하는 이치를 맨 먼저 중용 머릿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黃帝陰符經을 보면 “天性은 人也요 人心은 機也ㅣ니 立天之道하야 以定人也니라(하늘의 성품이 곧 사람의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기틀인 것이니 하늘의 도를 잘 세움으로써 사람을 정립하느니라)”라 하였다. 또한 물건에서 마음이 나오고 물건에서 죽으니 그 기틀이 눈에 있다(心生於物하고 死於物하나니 機在於目이니라) 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보는 것에 따라 항상 흔들리므로 항상 하늘의 도를 잘 세워 용맹정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논어의 가장 첫머리에서 ‘學而時習之(배우고 때로 익힌다)’를 내세워 항상 공부해야 함을 강조함도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命은 猶令也ㅣ요 性은 卽理也ㅣ라 天以陰陽五行으로 化生萬物하야 氣以成形하고 而理亦賦焉하니 猶命令也ㅣ라 於是에 人物之生이 因各得其所賦之理하야 以爲健順五常之德하니 所謂性也ㅣ리라 명은 영(令)과 같고 성은 즉 이치이니라.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써 화하여 만물을 내니 기운으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치를 부여해주니 (하늘이 사람에게) 명령함과 같음이라. 이에 사람과 모든 물건의 생함에는 각기 그 부여받은 바의 이치로 인하여 건순오상의 덕을 갖추고 나왔으니 성품이라 이르느니라.
[앞주 해설] 윗글은 주자가 달아놓은 앞주이다. 천명은 하늘의 命令이며, 性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어떻게 살라고 부여해준 보이지 않는 이치를 말함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의 이치로 만물을 화생하여 그 기운으로써 형체를 이루고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이치를 준 것이다. 천명지위성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이치에는 건순오상의 덕이 있다. 주역 건괘 대상전에서 공자는 “하늘의 움직임은 굳건하여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다(天行이 健하니 君子ㅣ 以하야 自彊不息하나니라)”라고 하여 하늘은 순양으로써 굳셈을 나타내었고, 곤괘 문언전에서는 “곤의 도가 순한저! 하늘을 이어 때로 행하느니라(坤道ㅣ 其順乎인뎌. 承天而時行하나니라)”고 하여 땅은 순음으로써 유순함을 말하였다. 곧 사람은 하늘과 땅의 음양의 도에 따라 健順함을 부여받았으며, 음양이 사귀는 가운데 나온 오행에 따라 仁義禮智信이라는 다섯 가지의 떳떳한 덕인 五常의 덕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누구나가 健順五常이라는, 하늘이 명한 성품을 갖고 나왔다는 것이다. 중용을 ‘소주역’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머릿장에 천명을 언급하고 있으니 그것은 곧 주역의 음양 이치에 따른 글이기 때문이다.
率은 循也요 道는 猶路也ㅣ라 人物이 各循其性之自然이면 則其日用事物之間에 莫不各有當行之路하니 是則所謂道也ㅣ라 ‘솔’은 ‘따를 순’과 같고, ‘도’는 ‘길 로’와 같음이라. 사람이나 모든 물건이 각각 그 성품의 자연함을 따르면, 날로 쓰는 사물의 사이에 각각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도이니라.
[앞주 해설] 道와 路를 합하여 道路가 된다. 道는 ‘머리 수(首)’와 ‘갈 지(之)’가 합한 글자로 머리가 가는 것이 으뜸이요 원칙이고, 路는 ‘발 족(足)에 ’각기 각(各)‘을 합하였으니 각각 나아가는 것으로 道는 나아가는 길의 體가 되고, 路는 用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는 한편으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각기 처한 바 위치에 따라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있음을 말한다.
修는 品節之也ㅣ라 性道는 雖同而氣稟이 或異니라 故로 不能無過不及之差할새 聖人이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하야 以爲法於天下則爲之敎ㅣ니 若禮樂刑政之屬이 是也ㅣ라 수는 품절(마름질하는 것)이라. 성과 도는 비록 같으나 기품이 혹 다르니라. 그러므로 과하거나 불급함의 차이가 없지 않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과 물건의 마땅히 가야할 바를 인하여 잘 품절하여 써 천하의 법을 삼으니 이를 일러 교라고 하니 예를 들어 예절과 음악과 형벌과 정치 같은 등속이니라.
[앞주 해설] 닦는다는 것은 마름하는 것이다. 물품을 잘 손질하고 다듬어 절도있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명이 性이고 그 성품을 닦는 것이 道이므로 하늘이 부여하는 원리는 같으나 사람마다 타고 나는 기질적인 품성(稟性)은 각기 다르다. 타고난 성질이 급한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으며, 타고난 기질이 강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모두가 똑같이 중을 지켜나간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타고난 과불급의 차이가 있기에 성인이 사람마다 물건마다 마땅히 가야 할 바에 대해 잘 닦아나갈 수 있도록 마름질을 한다. 그것이 곧 ‘敎’, 가르침인데 이에는 예절과 음악, 형벌과 정치 등등의 여러 방법이 있다.
蓋人이 知己之有性호대 而不知其出於天하며 知事之有道호대 而不知其由於性하며 知聖人之有敎호대 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하야 裁之也ㅣ라 故로 子思ㅣ 於此에 首發明之하시니 而蕫子所謂道之大原이 出於天이라 하니 亦此意也ㅣ라 대개 사람이 자기에게 성품이 있음을 알되 그것이 하늘에서 나옴을 알지 못하며, 사물이 가야 할 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하늘이 부여해준 성품을 따라야 하는 연유는 알지 못하며,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면서 그 나의 진실로 둔 바를 인하여 마름하는 것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자사가 이에 (중용의) 머릿장에 밝히시니 동자(董子 ; 동중서)란 이가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 이르니 또한 이 뜻이니라.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ㅣ니 可離면 非道也ㅣ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도라 하는 것은 가히 잠깐이라도 떠나지 못할 것이며 가히 떠나면 도가 아니니라. 이런 고로 군자는 그 보지 못한 바에서 경계하고 삼가하며 그 듣지 못한 바에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느니라.
[본문 해설] 우리가 가야 할 길, 곧 도라는 것은 내 몸에서 잠깐이라도 떠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길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도를 실천하지 않아 벌어질 무서움이나 두려움을 보고 난 뒤에야 어거지로 하는 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보지 않고(不睹) 듣지 않더라도(不問) 이것이 사람이 가야 할 길이겠구나 하는 원리에 입각해 스스로 늘 조심조심 도를 따라가야 한다(戒愼恐懼)는 것이다. 불가(佛家)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빛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영원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한 말도 바로 不睹하고 不聞이라 하여 도를 닦지 않음을 경계한 말이다.
道者는 日用事物當行之理니 皆性之德而具於心하야 無物不有하고 無時不然하니 所以不可須臾離也ㅣ라 若其可離면 則豈率性之謂哉ㅣ요 是以로 君子之心이 常存敬畏하야 雖不見聞이나 亦不敢忽이니 所以存天理之本然이요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ㅣ라 도라 하는 것은 날로 쓰는 사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이니 모두가 성품의 덕이요 그것이 마음에 다 갖추어져 물건마다 (도를) 두지 않음이 없고 때로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써한 바가히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음이니라. 만약 가히 떠나면 어찌 하늘이 정한 성품을 따른다고 할 수 있으리요. 이로써 군자의 마음이 항상 경외롭게 두어(곧 戒愼恐懼) 비록 보고 듣지 못하나 또한 감히 경솔히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써한 바 천리의 본연(곧 性道)을 존하는 것이고 잠깐의 경각이라도 떠나지 못함이니라.
[앞주 해설] 윗 글의 常存敬畏는 대학 전문 제6장 제2절의 “小人이 閒居에 爲不善호대 無所不至하다가 見君子而后에 厭然掩其不善하고 而著其善하나니 人之視己ㅣ 如見其肺肝이니 然則何益矣리오 此謂誠於中이면 形於外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ㅣ니라(소인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불선을 행함이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가 군자를 보고 난 뒤에 슬며시 그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내지만, 남들이 자기를 알아봄이 마치 나의 폐장과 간장을 보는 듯할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유익하겠는가. 이를 일컬어 ‘속마음에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니,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니라).”는 내용과 같이 항상 .戒愼恐懼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ㅣ니라 숨은 것보다 나타나는 것이 없으며 미미한 것보다 드러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가느니라
[본문 해설] 천자문에 屬耳垣墻(속이원장), 寓目囊箱(우목낭상)이라는 말이 있다. 귀는 담장에 붙어 있고, 눈은 내가 늘 쓰는 상자 속이나 천장에 붙어 있으니 말조심 행동조심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숨어있는 것이 절대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잘 나타나고, 미미한 것이라 하여 결코 드러나지 않으리라 여기지만 역시 다 드러나기 때문에 숨어 있을 때나 은미할 때나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때라도 다시 말해 홀로 있을 때라도 스스로를 삼가야 한다. 주역 풍화가인(風火家人)괘에서 언급한 ‘君子는 言有物而行有恒이라(말에는 실물이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다)’ 하여야 하고 앞서도 나왔듯이 必愼其獨해야 한다는 뜻이다.
隱은 暗處也ㅣ요 微는 細事也ㅣ라 獨者는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ㅣ라 言幽暗之中 細微之事에 跡雖未形이나 而幾則已動하니 人雖不知나 而己獨知之하니 則是天下之事ㅣ 無有著見明懸而過於此者ㅣ라 是而로 君子ㅣ旣常戒懼하야 而於此에 尤加謹焉ㅣ니 所以遏人欲於將萌하야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하야 以至離道之遠也ㅣ라 隱은 어두운 곳이요 微는 가느다란 일이라. 홀로란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바이며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것이라.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 세미한 일이 비록 자취라는 형체는 있지 아니하나 기미는 이미 움직이고 있어 남들이 비록 알지 못하나 나 홀로는 아는 것이 곧 천하의 일이니 나타나고 밝게 드러나 여기에 지남이 있지 않느니라. 이로써 군자가 항상 계신공구하야 이에 더욱 더 삼갈 것이니, 써한 바 사람의 욕심이 장차 싹 트는 것을 막아 은미한 가운데 푹 잠겨 차차 불어나고(潛滋) 어두운 속에서 점차 커져(暗長) 도를 떠나 멀리 이르지 않게 함이니라
[앞주 해설] 아무리 비밀스럽게 하는 일이라도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기에 형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기미는 드러나 있는 것이니 곧 만천하에 다 알려진다. 주역 14번째 화천대유(火天大有)괘에 보면 "遏惡揚善(알악양선)하야 順天休命(순천휴명)하나니라(악한 것을 막고 선한 것을 드날려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따르느리라)”하였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많아지고 풍성해지다보니 이를 탐하고 욕심을 내어 죄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물질이 풍요롭고 빈부의 격차가 나면 없는 사람는 없기에 가지려고 죄짓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지려고 죄를 짓는다. 그래서 遏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맹자에도 ‘遏人欲存天理(사람의 욕심을 막아 하늘의 이치를 보존해야 한다)’라 하였다. 즉 하늘이 부여해주 性道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戒愼恐懼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대목이다.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ㅣ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ㅣ오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ㅣ니라 희노애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를 中이라 이르고 나타났지만 節에 맞게 함을 和라 하니 中이라 하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和라는 것은 천하의 통한 道이니라(모두가 가야 할 길이니라)
[본문 해설] 여기서부터는 중용을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는 도를 말하였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슬퍼하거나 즐거워할 때가 있다. 이것이 아직 마음 속에 있을 때가 중이고, 그것을 잘 조절해 적절히 나타났을 때를 和, 곧 조화, 화합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中和이며, 中庸을 말한다. 中은 언제나 中이고, 和는 ‘떳떳함(庸)’, 正, 節로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中和라 하면 中庸이요, 中正이요 中節이요 中道로도 얘기할 수 있다. 中은 속에 있는 것이므로 뿌리가 되기에 大本으로 표현했고, 근본에서 나와 가지를 뻗어 나가는 것이 道이므로 누구나 다 가야할 길이기에 和를 達道로 표현했다. 곧 내적인 大本이 中, 外的인 達道가 和가 된다.
喜怒哀樂은 情也ㅣ니 其未發則性也ㅣ라 無所偏倚라 故로 謂之中이요 發皆中節은 情之正也ㅣ라 無所乖戾라 故로 謂之和라 大本者는 天命之性이니 天下之理ㅣ 皆由此出하니 道之體也ㅣ라 達道者는 循性之謂니 天下古今之所共由니 道之用也ㅣ라 此言은 性情之德이니 以明道不可離之意니라 희노애락은 (사람의) 감정(情)이니 그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를 性이라 함이라. 치우치고 기울어지는 바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를 중이라 함이요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감정의 바름이니라. 어긋나거나 거스리는 바가 없으므로 이를 和라 이르니라. 대본이라는 것은 천하의 성품이니 천하의 이치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도의 體이니라. 통한 도라고 하는 것은 성품을 따름을 이름이니 천하와 고금이 한가지로 말미암은 바이니 도의 用이라. 이것은 성정의 덕을 말함이니 써 밝은 도는 가히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니라.
[앞주 해설] 大本은 곧 道之體가 되며 中이 되며, 바로 중용 맨첫머리에 언급한 天命之謂性을 말한다. 達道는 곧 道之用이 되며 和가 되고 率性之謂道에 해당하고 性情之德을 말한다.
致中和ㅣ면 天地ㅣ位焉하며 萬物이 育焉이니라 중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하며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본문 해설] 주역 계사상전 첫머리에 “易簡而天下之理ㅣ 得矣니 天下之理ㅣ 得而成位乎其中矣니라(쉽고 간단함에 천하의 이치를 얻으니, 천하의 이치를 얻음에 위를 그 가운데에 이루느니라)’고 하였으며, 천부경에도 ‘人中天地一’라 하여 가운데 자리하는 것을 매우 소중함을 밝히고 있다. 하늘이나 땅이나 중화라는 제 위치를 잃는다면 만물이 길러질 수 없음을 표현해 중화는 곧 천지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致는 推而極之也ㅣ라 位者는 安其所也ㅣ오 育者는 遂其生也ㅣ라 自戒懼而約之하야 以至於至靜之中하야 無所偏倚而其守ㅣ 不失이면 則極其中而天地ㅣ 位矣요 自謹獨而精之하야 以至於應物之處에 無小差謬而無適不然이면 則極其和而萬物이 育矣ㅣ니라 蓋天地萬物은 本吾一體니 吾之心이 正이면 則天地之心이 亦正矣ㅣ요 吾之氣ㅣ 順이면 則天地之氣ㅣ 亦順矣이라 故로 其效驗이 至於如此하니 此는 學問之極功이요 聖人之能事라 初非有待於外나 而修道之敎로 亦在其中矣ㅣ라 是其一體一用이 雖有動靜之殊나 然이나 必其軆立而後에야 用이 有以行이면 則其實ㅣ 亦非有兩事也ㅣ라 故로 於此에 合而言之하야 以結上文之意ㅣ니라 치는 미루어 극함이라, 위라는 것은 그 곳에서 편안함이오, 육은 그 생함을 이룸이니라. 계신공구로부터 간략히 하여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이르러 치우치거나 미뤄지는 바가 없어 그 지키는 바를 잃지 않으면 그 중이 지극해져 천지가 위를 얻게 되고, 근독(홀로를 삼가함)으로부터 정미롭게 해서 써 물건을 응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어디를 가든지 그렇지 않음이 없으면(中이라는 體를 잘 잡는다면) 그 화함을 극하게 해서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대개 천지만물이라 함은 본래 내 한 몸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를 것이요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또한 순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은데 이르니 이것은 (중용이라는) 학문의 지극한 공이며 성인의 능한 일이니라. 처음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 아니하나(내 성품 밖으로 나가지 않으나) 도를 마름하는 敎(修道之敎)가 또한 그 가운데 있느니라(도를 잘 마름하고 밖으로 나가 가르치니 효험이 커짐이 있음이라). 이 그 일체일용이 비록 동하고 정하는 다름이 있으나 반드시 그 체가 선 뒤에 용이 써 행함이 있으면 즉 그 실지(실상)가 두 가지 일이 있지 않음이니 고로 이에 합해서 말하니 윗글의 뜻을 여기에 말함이라
[앞주 해설] 천지인이 모두가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 속에 있음을 부연설명하고 체용의 이치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체를 바로 세우고 행해야 함을 덧붙이면서 一體一用은 곧 一原을 밝히고 있다.
右는 第一章이라
子思ㅣ 述所傳之意以立言하야 首明道之本原이 出於天而不可易하니 其實은 體備於己而不可離이요 此言 存養省察之要하야 終言聖神功化之極하니 蓋欲學者로 於此에 反求諸身而自得之ㅣ니 以去夫外誘之私而充其本然之善이니라 楊氏l 所謂一篇之體要요 是也ㅣ니라 其下十章은 蓋子思ㅣ 引夫子之言하야 以終此章之意ㅣ니라 자사가 전한 바의 뜻을 지어서 써 말을 세워서 먼저 도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와서 가히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밝혀 놓았으니 그 실지는 체가 몸에 갖추어져 가히 떠나지 못함을 (머릿장에) 밝힌 것이오, 이 말은 살피고 살핌의 중요함을 잘 존양하고(말해놓고 ) 마침내는 성신(성인의 신비로움)의 공되고 화하는 지극함을 말해 놓았으니, 대개 배우는 자가 이에 저 몸에 돌이켜 구해(反求諸身) 스스로 얻어써 밖으로 유혹되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본연의 선함을 충족시키게 함이라 .양씨가 한편의 체요라고 말한 바가 이것이니라. 이하 십장은 대개 자사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써 이 장의 뜻을 마무리했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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