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ㅣ曰 道不遠人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이면 不可以爲道ㅣ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는데 사람을 멀리하면 가히 써 도라 할 수 없느니라
[본문 해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 이것이 곧 도이다. 사람은 도에서 나오고 도에서 살고 있으니, 도가 사람이고 사람이 곧 도이다. 도와 사람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明心寶鑑』에도 소강절(邵康節)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天聽이 寂無音하니 蒼蒼何處尋고 非高亦非遠이라 都只在人心이니라(하늘이 들으심이 고요하여 소리가 없으니 푸르고 푸름에 어느 곳에 찾을꼬. 높지도 않고 또한 멀지도 않음이라. 도무지 다만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라)” 하였듯이 하늘, 부처, 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道者는 率性而已니 固衆人之所能知能行者也ㅣ라 故로 常不遠於人하나니 若爲道者ㅣ 厭其卑近하야 以爲不足爲라 하고 而反務爲高遠難行之事면 則非所以爲道矣니라 도라 하는 것은 성품을 따를 뿐이니 진실로 모든 사람들이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바이라. 그러므로 항상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함이니 만약 도를 하는 자가 그 비근함을 싫어하여 써 족히 할 만한 것이 못한다고 도리어 고원난행(높고 멀고 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힘을 쓰면 곧 써 도를 하는 바가 아니니라.
固 : 진실로 고 反 : 도리어 반
[앞주 해설] 앞서 ‘天命之謂性이고 率性之謂道’라 하였듯이 도는 하늘이 준 성품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能知能行한 것, 곧 사람에게 있는 本之本能을 따르는 것이 도이다. 그런데 도를 하는 자가 당연히 가야 할 것들, 이를테면 부부관계나 일상적인 언어, 행동거지 등에 대해서는 비근하다고 하여 하찮게 여기고, 도가 마치 저 멀리 하늘이나 먼 산에 있는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서 엉뚱한 데서 찾아 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행동으로 일상생활에서 허물만 짓게 되니 이는 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詩云 伐柯伐柯ㅣ여 其則不遠이라 하니 執柯以伐柯호대 睨而視之하고 猶以爲遠하나니 故로 君子는 以人治人하다가 改而止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지 않다”하니 도끼자루를 잡고서 써 도끼자루를 베되 흘겨서 보고 오히려 써 멀다 하나니 고로 군자는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리다가 고치거든 그치느니라
伐 : 칠 벌 柯 : 도끼자루 가 睨 : 흘겨볼 예
[본문 해설] 위 시는 『시경』「국풍 빈풍 벌가(國風 豳風 伐柯)」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伐柯如何오 匪斧不克이니라 도끼자루 베려면 어찌 하오 도끼 아니면 아니 되지 取妻如何오 匪媒不得이니라 처를 얻으려면 어찌 하오 중매쟁이 아니면 아니 되지 伐柯伐柯여 其則不遠이로다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지 않도다我覯之子하니 籩豆有踐이로다 내 그 님을 맞아 예를 갖춰 혼례하네
원래 이 시는 예를 갖춰 혼례함을 노래한 것이다. 도끼자루와 도끼는 남자와 여자의 혼례를 비유한 것으로 각자의 짝을 찾는데 그 기준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을 맞대고 한 방을 쓰는 부부에게도 도가 있듯이 그 부부를 이루기 위한 성혼의 과정에도 도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道不遠人’의 예에 해당한다. 부부는 천생연분이니 서로를 배필이라고 하듯이 서로 닮은 구석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을 찾는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를 시에서는 도끼와 도끼자루에 비유하고 있다.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베는데, 베려는 나무는 도끼자루이니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도끼자루처럼 만들면 된다. 곧 도끼자루를 만드는 법이 바로 자기 옆에 있기에 바로 보면 될텐데 이는 생각지 못하고 마치 그 방법이 멀리 있는 것처럼 비스듬히 보고 있음을 꼬집은 내용이다. 사람이 곧 도이고 도가 곧 사람이므로,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려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를 미루어 남을 다스리면 된다. 남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남이 있기에 나를 미루어 다스리다가 그 사람이 허물을 고치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치는 것이다. 이는 『大學』 傳文 제10장 제1절에 나오는 絜矩之道(혈구지도)의 이치와 같다. "所謂平天下ㅣ 在治其國者는 上이 老老而民이 興孝하며 上이 長長而民이 興弟하며 上이 恤孤而民이 不倍하나니 是以로 君子는 有絜矩之道也ㅣ니라(이른바 “천하를 平함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위에서 늙은이를 늙은이로 섬기면 백성들이 孝에 일어나고,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면 백성들이 弟에 일어나며, 위에서 외로운 이를 불쌍히 여기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군자는 혈구의 도가 있느니라.)"
詩는 豳風伐柯之篇이라 柯는 斧柄이오 則은 法也ㅣ라 睨는 邪視也라 言人이 執柯伐木에 以爲柯者ㅣ 彼柯長短之法이 在此柯耳이라 然이나 猶有彼此之別이라 故로 伐者ㅣ 視之를 猶以爲遠也어니와 若以人治人은 則所以爲人之道ㅣ 各在當人之身하야 初無彼此之別이라 故로 君子之治人也에 卽以其人之道로 還治其人之身이라가 其人能改어든 卽止不治하나니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이오 非欲其遠人以爲道也ㅣ라 張子所謂以衆人望人則易從이 是也라 시는 빈풍장 벌가편에 있느니라. 가는 도끼자루요 칙은 법이라. 예는 흘겨봄이라. 사람이 도끼자루를 가지고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드는 것은저 도끼자루의 길고 짧은 법이 이 도끼자루에 있는 것을 말함이라. 그러나 오히려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있느니라. 고로 베는 자가 보는 것을 오히려 써 멀다하거니와, 만약에 사람으로써(사람의 도리로써)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하는 바 각각 마땅히 사람의 몸에 있어서 애당초 피차의 분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는데 곧 사람의 도리로써 도리어 그 사람의 몸을 다스리다가 그 사람이 능히 고치거든 곧 그쳐서 다스리지 아니하나니 대개 그 능히 알고 능히 행하는 바로써 꾸짖는(가르치는) 것이오. 그 사람을 멀리하여 써 도를 하고자 함이 아니니라. 장자(張載)가 이른바 ‘여러 사람으로써 사람을 바라보게 하면(촉망하게 하면) 쉽게 따름’이 이것이라.
豳 : 땅이름 빈 斧 : 도끼 부 柄 : 자루 병
[앞주 해설] 도끼자루를 새로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벨 때 길게 해야 할지 짧게 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것은 도끼자루를 베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것이 조금 짧아 불편하다 하면 다소 길게 만들면 될 것이고 자루가 길어 불편하다 싶으면 조금 짧게 다듬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라고 다스리는 것이기에 그 도리는 마땅히 모든 사람의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도끼자루처럼 짧고 긴 분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도리란 각각의 몸 속에 있기에 능히 알고 능히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깨우쳐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高遠難行한 것은 아니다. 장자도 말했듯이 사람의 개성은 각각 다르지만 사람의 도리(본성)는 거의 같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게 하면 쉽게 따른다고 하였다. 즉 사람에게는 대중적 심리가 있어 누가 이렇게 해야 한다면 따르는 습성이 있기에 사람을 다스리는 군자가 항상 자기 몸에 있는 사람의 도리 곧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성품 그대로 나간다면 모두가 이를 따를 것이다.
[참고] 張子(1020~1077)에 관해 이름은 載. 북송 사람. 자는 子厚. 봉상미현(鳳翔郿縣 : 지금의 陝西省 眉縣) 횡거진(橫渠鎭)출신이라 橫渠선생이라 일컬어진다.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외숙. 神宗에게 三代의 治의 부활을 진언했고 古禮를 설명하면서 井田制를 주장했으나 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강학에 힘썼다. 陝西, 즉 관중(關中)에서 강학을 했기 때문에 이 학파를 관학(關學)이라고 했다. 장재는 특히 사상적으로 불교와의 대립, 환망설(幻妄說)의 배격을 의도하여 ‘太虛卽氣論’을 주장했다. 또한 불교의 心性說에 대항할 氣의 존재론과 心性論의 통일을 시도했다. 虛無와 空無를 부정하고, 기가 모이면 萬物이 생기고 기가 흩어지면 太虛가 된다는 생각과 인간의 인식 여하에 관계없이 만물의 변화는 기에 의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물질의 생성을 둘러싼 기와 음양의 관계, 기질이라는 개념의 제기는 천지의 性과 기질의 性이라는 性論 및 기질을 변화시킨다는 修養論과 함께 朱子學 형성에 크게 관여하게 된 결과를가져왔다. (동서문화, 한국세계대백과사전 23권에서)
忠恕ㅣ 違道不遠하니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이니라 충과 서가 도에게 어김(거리)이 멀지 아니하니 저 몸에 베풀어 보아 원치 않거든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지니라.
諸 : 어조사 저
[본문 해설] 忠은 원이라는 도형으로 볼 때 中心과 求心力에 해당하고, 恕는 중심에서 둘레까지 이르는 반지름으로 밖으로 똑같이 작용하는 遠心力과 같은 것으로 如心이다. 다시 말하면 忠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진실함을 말하며 恕는 나 자신을 용서하듯이 남도 나 자신과 똑같이 대하는 마음을 말한다. 즉 나의 충서가 남의 충서요 남의 충서가 나의 충서요, 나의 도가 남의 도요, 남의 도가 나의 도요, 나의 마음이 남의 마음이요 남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니, 자신이 무슨 일을 해보고 나서 좋지 않다고 여기면 남 또한 좋지 않게 여길 터이니 그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대학』10장에서 말하는 혈구지도와 같은 의미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所惡於上으로 毋以使下하며 所惡於下로 毋以事上하며 所惡於前으로 毋以先後하며 所惡於後로 毋以從前하며 所惡於右로 毋以而交於左하며 所惡於左로 毋以而交於右ㅣ 此之謂絜矩之道니라(위에서 싫은 바로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싫은 바로 위를 섬기지 말며, / 앞에서 싫은 바로 뒤를 앞서지 말며, 뒤에서 싫은 바로 앞을 따르지 말며, / 오른쪽에서 싫은 바로 왼쪽을 사귀지 말며, 왼쪽에서 실은 바로 오른쪽을 사귀지 아니하는 것, / 이것을 일컬어 ‘혈구의 도’라고 하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善이 있은 뒤에 남에게 그것을 요구하며, 자기에게 不善이 없은 뒤에 남에게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 자기 몸에 간직한 것이 恕가 아니고서 다른 사람을 때우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是故로 君子는 有諸己而後에 求諸仁하며 無諸己而後에 非諸人하나니 所藏乎身이 不恕ㅣ오 而能喩諸人者ㅣ 未之有也ㅣ니라)고 하였다.
盡己之心이 爲忠이오 推己及人이 爲恕라 違는 去也ㅣ니 如春秋傳에 齊師ㅣ 違穀七里之違니 言自此至彼에 相去不遠이오 非背而去之之謂也ㅣ라 道卽其不遠人者ㅣ 是也ㅣ라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은 忠恕之事也ㅣ라 以己之心으로 度人之心하야 未嘗不同則道之不遠於人者를 可見이라 故로 己之所不欲을 則勿以施於人이니 亦不遠人以爲道之事라 張子所謂以愛己之心으로 愛人則盡仁이 是也ㅣ니라 자기 몸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 (중심에서 우러나는) 忠이 되는 것이오, 몸을 미루어서 남에서 미치는 것이 恕가 되느니라. 違는 거리인 것이니 『춘추전』에 ‘제나라 군사가 곡이라는 땅에서 7리의 거리가 있다’는 違와 같으니, 이로부터 저기에 이르는 것이 서로의 떠난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오 등져 간다는 것을 이름이 아니니라. 도라는 것은 곧 그 사람에게 멀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라. 저 몸에 베풀어 보아서 원치 않거든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은 충서의 일이라. 자기의 마음으로써 남의 마음을 헤아려서 일찍이 같지 아니하지 않다면 곧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을 가히 봄이라. 그러므로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곧 써 남에게 베풀지 말 것이니 또한 사람을 멀리해서 써 도를 하는 것이 아니니라. 장자가 이른바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사랑하는 것인즉 어짊(사랑, 仁)을 다한다’는 것이 이것이니라.
度 : 헤아릴 탁 背 : 등질 패, 거스릴 패
君子之道ㅣ 四에 丘未能一焉이로니 所求乎子로 以事父를 未能也하며 所求乎臣으로 以事君을 未能也하며 所求乎弟로 以事兄을 未能也하며 所求乎朋友로 先施之를 未能也ㅣ로니 庸德之行하며 庸言之謹하여 有所不足이어든 不敢不勉하며 有餘ㅣ어든 不敢盡하야 言顧行하며 行顧言이니 君子ㅣ 胡不慥慥爾리오 군자의 도가 네 가지에 나(모)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노니 자식에게 바라는 바로써 아비 섬김을 능치 못하며, 신하에게서 바라는 바로써 인군 섬김을 능치 못하며, 아우에게서 바라는 바로써 형 섬김을 능치 못하며, 붕우에게 바라는 바로써 먼저 베풂에 능치 못하노니, 떳떳한(항시) 덕을 행하며 떳떳한(항시) 말도 삼가하여 족하지 못한 바가 있거든 감히 힘쓰지 아니하지 못하며 남음이 있거든 감히 다하지 못하여 말은 행실을 돌아보며 행실은 말을 돌아볼지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고 독실하지 아니하리오.
丘 : 언덕 구, 공자의 휘(諱) 胡 : 어찌 호 慥 : 독실할 조 爾 : 어조사 이
[본문 해설] 丘는 공자의 휘이다. 옛날에 선비들은 성인의 이름을 그대로 읽을 수 없다하여 ‘某(모)’라고 읽었다. 여기서는 공자가 스스로를 지칭하며 일상적인 일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겸손해 하며, 도라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서 항상 떳떳하게 행하고 떳떳하게 말을 삼가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언행일치가 될 때 진정한 군자의 도를 이룰 수 있고, 군자가 세상에 나아가 덕을 베풀려면 말과 행동이 우선임을 말하고 있다. 『소학』외편에도 嘉言善行(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말하였다. 庸言과 庸行은 평상시에 하는 보통 말과 보통 행실을 말한다. 군자는 평범한 말에도 항시 믿도록 하며 평범한 행동에서도 항시 삼간다. 사람은 때로 간사한 마음이 생기지만 군자는 이런 정중한 덕이 있기 때문에 간사한 마음을 막고 그 정성을 늘 보존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온 천하를 덕으로 교화한다. 이러한 군자의 덕에 대해 주역 건괘 九二괘의 문언전에 잘 나타나 있다. 중용 서문(중용에 들어가기에 앞서)에서도 밝혔지만 다음 인용문은 자사가 『중용』이란 책명을 따온 글귀이기도 하다. “子ㅣ曰 龍德而正中者也ㅣ니 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야 閑邪存其誠하며 善世而不伐하며 德博而化ㅣ니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ㅣ라(공자 이르길 용덕이 바르게 가운데 한 것이니 떳떳이(항시) 말을 미덥게 하며, 떳떳이(항시) 행실을 삼가서 간사한 것을 막고 그 정성을 보존하며 세상을 착하게 하여도 자랑하지 않으며 덕을 넓게 하여 화하게 하니 역에 이르기를 ‘현룡재전이견대인’이라 하니 인군의 덕이라)”
求는 猶責也ㅣ라 道不遠人이니 凡己之所以責人者는 皆道之所當然也ㅣ라 故로 反之以自責而自脩焉이라 庸은 平常也ㅣ라 行者는 踐其實이오 謹者는 擇其可라 德不足而勉이면 則行益力이오 言有餘而訒이면 則謹益至니 謹之至則言顧行矣오 行之力則行顧言矣라 慥慥는 篤實貌라 言君子之言行이 如此하니 豈不慥慥乎아 하시니 贊美之也ㅣ라 凡此는 皆不遠人以爲道之事니 張子所謂以責人之心으로 責己則盡道ㅣ 是也ㅣ니라 구(求)는 질책하는 것과 같음이라.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은 것이니 무릇 자기가 남을 질책하는 것은 모두가 도의 당연한 바이니라. 그러므로 돌이켜 써 스스로 자기 몸을 꾸짖고 스스로 닦아야 하느니라. 용(庸)은 평상적이라, 행(行)은 그 실지를 밟는(실천하는) 것이오, 근(謹)은 그 옳음을 가리는 것이라. 덕이 부족한 것을 힘쓰면 행실이 더욱 더 힘쓸 것이오 말이 남음이 있는데 더듬적거리면 삼감이 더욱 지극함이니 삼감이 지극한즉 말이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오 행실을 힘쓰면 행동이 말을 돌아봄이라. 조조(慥慥)는 독실한 모양이라. ‘군자의 말과 행동이란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독실하고 독실하지 않으리오’라고 (공자가) 하셨으니 찬미하심이라. 무릇 이것은 모두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써 도를 행하는 일이니, 장자가 이른바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써 자신을 꾸짖는다면 도를 다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訒 : 말더듬을 인
右는 第十三章이라
道不遠人者는 夫婦所能이오 丘未能一者는 聖人所不能이니 皆費也요 而其所以然者는 則至隱이 存焉이라 下章放此하니라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않다는 것은 부부의 능한 바이오, 공자가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인도 능치 못한 바이니, 모두가 (용적인) 소비요 그러한 바(所以然)는 즉 지극히 은미함이 있는 것이라. 아래 장도 이를 모방함이라.
放 : 모방할 방
[앞주 해설] 費而隱에 대한 결말 장으로 아래 글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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