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스크랩] 중용 제20장 해설

ria530 2012. 6. 14. 09:50
哀公이 問政한대
애공이 정사를 묻자

[본문 해설]
노나라의 인군인 애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질문한 것이다.
애공은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왕(BC494~BC468)으로 성은 희(姬) 이름은 장(蔣, 將)이다. 당시 노나라에는 삼환씨(三桓氏)라 불리는 공족(公族)의 힘이 강했으며, 대외적으로 오(吳)와 제(齊)나라의 공격을 받아 노나라는 정국이 불안하였다. 위(衛)나라에서 귀국한 공자도 BC479년 불우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 뒤 애공은 월(越)나라의 힘을 빌려 삼환씨를 제거하려 했으나, 도리어 삼환씨의 공격을 받아 재위 27년만에 죽었다.-[한국세계대백과사전 제18권, 동서문화]

哀公은 魯君이니 名은 蔣이라
애공은 노나라 임금이 이름은 장이라

蔣 : 수풀 장, 성 장

子ㅣ曰 文武之政이 布在方策하니 其人이 存則其政이 擧하고 其人이 亡則其政이 息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문왕과 무왕의 정치가 펼쳐진 것이 방책(목판과 책)에 있으니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가 마비되느니라.

策 : 대쪽 책(죽간(簡)을 말아놓은 두루마리 책을 말한다.)

[본문 해설]
애공의 물음에 공자는 정치를 잘한 문왕과 무왕의 정치에 방책에 모두 있으니 그것을 잘 알고 그대로 따르면 정치를 잘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정치를 잘못할 것이라고 답하는 내용이다.

方은 版也ㅣ오 策은 簡也ㅣ라 息은 有滅也ㅣ라 有是君有是臣則有是政矣라
방은 판자요 책은 죽간이라. 식은 멸(없어짐)과 같음이라 이와같은 군과 이와같은 신이 있으면 곧 이 정사가 있으니라.

道는 敏政하고 地道는 敏樹하니 夫政也者는 蒲盧也ㅣ니라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첩하고 땅의 도는 심는데 민첩하니 대저 정치라는 것은 부들과 갈대와 같으니라.

蒲 : 부들 포 盧 : 갈대 로

敏은 速也ㅣ라 蒲盧는 沈括以爲蒲葦是也ㅣ라 以人立政이 猶以地種樹니 其成이 速矣요 而蒲葦는 又易生之物이니 其成이 尤速也ㅣ라 言人存政擧ㅣ 其易如此라
민은 빠름이오, 포로는 심괄((1031~1095, 北宋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왕안석의 정치개혁 때 수리와 관개를 맡았다. 天地를 모시는 의식 절차를 南郊식으로 정리했다. 여기에서 심괄을 사람이름으로 보지 않고 ‘침괄’이라 읽고 ‘잠겨 모여’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이 써 포위(부들과 갈대)라 하니 이것이라. 사람으로써 정치를 세우는 것이 땅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으니 그 이룸이 빠르며, 포위는 또한 쉽게 나오는 물건이니 그 이룸이 또한 빠름이라. 사람이 있어서 정사가 거행되는 것이 그 쉬움이 이와같음을 말함이라.

括 : 모일 괄 葦 : 갈대 위

故로 爲政이 在人하니 取人以身이오 脩身以道ㅣ오 脩道以仁이니라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으니 사람을 취하는 것은 몸으로써 함이오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함이오 도를 닦은 것은 인으로써 함이라.

此는 承上文人道敏政而言也ㅣ라 爲政在人은 家語에 作爲政이 在於得人이니 語意尤備라 人은 謂賢臣이오 身은 指君身이라 道者는 天下之達道요 仁者는 天地生物之心而人得以生者니 所謂元者는 善之長也라 言人君爲政이 在於得人이니 而取人之則은 又在修身이니 能仁其身이면 則有君有臣而政無不擧矣라
이것은 윗글을 이어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감함을 말함이라. 정치가 사람에 있다는 것은 『공자가어』에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을 얻는 것에 있다’고 지어져 있으니 『논어』에 말뜻이 더 잘 갖추어져 있음이라. 인은 어진 신하를 말함이오 신은 인군의 몸을 가리킴이라. 도는 천하의 통한 도요 인은 천지생물의 마음이요 사람이 얻어서 써 나옴이니 원은 선의 어른이라. 인군이 정사를 함이 사람을 얻음에 있고 사람을 취하는 법은 또 몸을 닦는데 있으니 능히 그 몸을 어질게 하면 곧 인군이 있고 신하가 있어 정사가 일어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라. ‘元者는 善之長也’란 글귀는 주역에 있는 말로 중용 제16장 제2절의 앞주 해설을 참고하기 바란다.

仁者는 人也ㅣ니 親親이 爲大하고 義者는 宜也ㅣ니 尊賢이 爲大하니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이 禮所生也ㅣ니라
어질다는 것은 사람이니 어버이를 친함이 큼이 되고 의라는 것은 마땅함이니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이 큼이 되니 어버이를 친하면서 줄이는 것과 어진 이를 높이는 차등이 예가 생하는 바이니라

殺 : 덜 쇄

[본문 해설]
애공이 정사에 관해 묻자, 처음에 공자는 정치는 사람에게 있고 사람을 얻는 것은 자신이 도로 몸을 닦아야 하고, 인으로 도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인이라는 것은 바로 사람이라고 했다. 仁은 글자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人)끼리 서로(二) 사랑을 베푸는 뜻이 담겨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 애완동물이나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정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인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는가. 그것은 내가 나온 근원 즉 어버이라는 것이다. 仁은 봄이고 義는 가을에 해당하는 것으로 仁이 내적인 것이라면 義는 외적인 것이다. 仁을 體로 한다면 義는 用이 된다. 그러므로 내적인 가정에서 어버이를 친히 하는 것은 體가 되는 인을 실현하는 것이고, 외적으로 나아가 세상의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은 用인 의가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적인 체가 되는 인은 가장 근본이 되는 어버이를 친히 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바깥으로 점점 줄여나가야 하는데 즉 어버이는 나의 망극한 은인이시니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다음으로 형제간, 숙질간 등으로 줄여나가는 것이다. 喪을 당했을 때 3년복, 1년복, 9개월복, 5개월복, 3개월복 등이 이러한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어진 이를 높이는 데에도 차등이 있어야 하는데 가령 벼슬하는 이에게는 등급이 있고, 현인에게도 대현, 성현, 군자 등의 차등이 있고, 연장자에게 절을 해야 하듯이 바로 여기에서 절도가 있는 예가 나오는 것이다.

人은 指人身而言이라 具此生理하야 自然便有惻怛慈愛之意하니 深體味之면 可見이라 宜者는 分別事理하야 各有所宜也ㅣ라 禮則節文斯二者而已라
인은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라. 이 생리(생하는 이치)를 갖추고 있어 자연히 문득 슬퍼하고(惻怛) 자애로운 뜻이 있으니 깊이 체득하여 맛들이면 가히 볼 수 있느니라. 宜는 사리를 분별하여 각각 마땅한 바를 두는 것이라. 예는 이 두 가지(仁과 義)를 절도있게 조절하여 무늬나게 할 뿐이라.

便 : 문득 변 惻 : 슬플 측 怛 : 슬플 달

[앞주 해설]
사람은 아무리 악한 이일지라도 슬퍼하고 자애로운 마음이 있어 어린 아이가 기어가다 물에 빠지려고 하면 달려가 구해준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타고난 이치를 갖추고 있어 깊이 몸에 체득하여 맛들이면 가히 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生理와 관련해서 맹자는 四端으로써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惻隱之心은 仁之端也ㅣ오 羞惡之心은 義之端也ㅣ오 辭讓之心은 禮之端也ㅣ오 是非之心은 知之端也ㅣ니라 人之有是四端也ㅣ 猶其有四體也ㅣ니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는 自賊者也ㅣ오 謂其君不能者는 賊其君者也ㅣ니라 凡有四端於我者를 知皆擴而充之矣면 若火之始然하며 泉之始達이니 苟能充之면 足以保四海오 苟不充之면 不足以事父母ㅣ니라 - 『맹자』 公孫丑章句上에서(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니라.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음은 그 사체를 있음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요. 그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니라.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다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니 진실로 능히 이것을 채운다면 족히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 진실로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도 족히 섬기지 못하느니라.)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아래 자리에 있어서 위에서 얻지 못하면 백성을 가히 얻어 다스리지 못하리니라.

[본문 해설]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인 자기 상관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그런 사람이 어찌 자기 부하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鄭氏曰 此句在下하니 誤重在此라
정씨(鄭玄)이 말하기를, “이 글귀는 아래에 있는데, 잘못으로 거듭하여 여기에 있느니라.”

故로 君子ㅣ 不可以不脩身이니 思脩身인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思事親인댄 不可以不知人이오 思知人인댄 不可以不知天이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가히 써 몸을 닦지 않음이 없으니 몸을 닦음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어버이섬김을 아니치 못하고 어버이 섬김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사람을 알지 아니치 못하고 사람 앎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하늘을 알지 아니치 못하느니라.

[본문 해설]
군자가 인을 행하려면 수신을 해야 한다. 이렇게 몸을 닦을 것을 생각하면 먼저 백행의 근본인 효도를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먼저 어버이를 섬겨야 할 것이고, 어버이를 섬기려고 생각하면 어떻게 섬겨야 할지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하고, 사람을 알려면 먼저 하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치를 하려면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그 철학이 바로 하늘, 곧 자연의 이치에서 나왔음을 깊이 새기게 해주는 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고대부터 형성된 동양정치철학이다. 동양정치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홍범구주가 바로 정치를 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으로 자연의 이치인 오행을 첫째로 들고 있으며 인군이 되는 왕은 바로 가운데(中) 자리에서 不偏不倚하고 無偏無陂하며 無黨無偏의 자세로 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爲政在人하고 取人以身이라 故로 不可以不修身이오 修身以道하고 修道以仁이라 故로 思修身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欲盡親親之仁댄 必由尊賢之義라 故로 又當知人이오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이 皆天理也ㅣ라 故로 又當知天이라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고 사람을 취하는 것이 몸으로써 함이라. 그러므로 가히 써 몸을 닦지 않음이 없고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하고 도를 닦는 것은 인으로써 함이라. 그러므로 몸을 닦음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어버이를 친하지 아니함이 없고, 어버이 친하는 그 사랑을 다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어진 이를 높이는 의리로써 말미암음이라. 그러므로 또 마땅히 사람을 알아야 하고 어버이를 친하면서부터 덜어지는 것과 어진 이를 높이는 데서부터 차등을 두는 것은 모두가 하늘의 이치이라. 그러므로 또 마땅히 하늘을 알아야 하느니라.

殺 : 덜 쇄

天下之達道ㅣ 五에 所以行之者는 三이니 曰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交也五者는 天下之達道也ㅣ오 知仁勇三者는 天下之達德也ㅣ니 所以行之者는 一也ㅣ니라
천하의 통한(공통된) 도가 다섯에 써 행하는 바는 삼이니 가로되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형제와 벗의 사귐, 다섯 가지는 천하의 통한 도이고, 지 인 용 셋은 천하의 통한 덕이니 써 행하는 바는 하나이니라.

[본문 해설]
達道는 체가 되고 達德은 용이니 윗글은 5체3용(五體三用)을 말하고 있다. 道는 가는 길이고, 德은 길을 가면서 베푸는 것이기에 達道는 체가 되고 達德은 용이 된다. 그렇지만 달도를 행하나 달덕을 행하나 행하는 것은 한 가지일 뿐이다. 공자의 “吾道는 一以貫之니라”와 통하는 내용이다.

達道者는 天下古今所共由之路니 卽書所謂五典이오 孟子所謂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是也ㅣ라 知는 所以知此也ㅣ오 仁은 所以體此也ㅣ오 勇은 所以强此也ㅣ니라 謂之達德者는 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ㅣ라 一은 則誠而已矣라 達道는 雖人所共由나 然이나 無是三德이면 則無以行之오 達德은 雖人所同得이나 然이나 一有不誠이면 則人欲이 間之하야 而德非其德矣니라 程子ㅣ曰所謂誠者는 止是誠實此三者니 三者之外에 更別無誠이니라
달도라는 것은 천하 고금에 한 가지 말미암은 바의 길이니 즉 『서경』에 이른바 五典이오, 『맹자』에 이른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이 이것이라. 지는 써 이것(달도)을 아는 바이오 인은 써한 바 이것을 체득하는 것이고 용은 써한 바 이것을 강제로 이끌어가는 것이니라. 달덕이라 하는 것은 천하 고금에 한 가지 얻은 바의 이치이라. 일은 즉 정성일 뿐이라. 달도는 비록 사람이 한 가지 말미암은 바이나 그러나 이 삼덕이 없으면 즉 써 행하지 못함이오 달덕은 비록 사람이 한가지로 얻어진 바이나 그러나 하나라도 성실함이 없으면 즉 사람 욕심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덕이 그 덕이 아니니라. 정자 말씀하시길 “이른바 정성이라는 것은 다만 이 세 가지를 성실히 하는 것이니 세 가지 외에는 다시 별도로 성실이 없느니라.”

[앞주 해설]
공통된 도라는 것은 천하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두 행해야 할 길이다. 五體인 달도를 『서경』우서 순전(虞書 舜典)에서는 五典(다섯 가지 전법)이라 했으며, 『맹자』에서는 오륜(五倫)으로 설명(滕文公章句上편)하고 있다. 이 五體를 아는 것이 知이고, 五體를 체득하여 그대로 베풀고 행하는 것이 仁이며, 알고 행하는 것을 힘써 나가는 것이 勇이다. 『주역』중천건괘 대상전에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느니라(象曰 天行이 健하니 君子ㅣ 以하야 自彊不息하나니라)”고 했듯이 강하게 이끌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달덕이라는 것은 천하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그 길을 가면서 한 가지로 얻은 이치이다. ‘德은 得也라’ 하였듯이 덕은 얻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정성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다. 『중용』을 ‘정성 誠’ 한 글자로 압축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실한 정성이 아니면 달덕이나 달도는 모두가 한갓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정자의 인용구절도 知仁勇 세 가지에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글이다.

或生而知之하며 或學而知之하며 或困而知之하나니 及其知之하야난 一也ㅣ니라 或安而行之하며 或利而行之하며 或勉强而行之하나니 及其成功하야난 一也ㅣ니라
혹 날 때부터 알며 혹 배워서 알며 혹 곤해서 아느니 그 앎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이니라. 혹 편안하면서 행해지며 혹 이롭게 하여 행하며 혹 힘써서 행하나니 그 성공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이니라.

[본문 해설]
앎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공자나 노자 같은 성인처럼 날 때부터 저절로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이 있는 반면(生而知之), 현인은 성인처럼 저절로 알지는 못하나 열심히 공부하여 알고(學而知之), 또 현인처럼 재주가 훌륭하지 못하나 투철한 사람은 열심히 애쓰고 갖은 고초를 감내하며 이치를 알아가는(困而知之) 방법이 있는데 결국에 가서 아는 것은 모두가 한 가지로 같을 뿐이다.
『주역』계사상전 제12장에 “神而明之는 存乎其人하고 黙而成之하며 不言而信은 存乎德行하니라(신비스러워 밝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고, 묵묵해서 이루며 말을 아니 해도 믿음은 덕행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알면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데 나면서부터 저절로 안 사람은 곧 묵묵히 이루며 말을 하지 않아도 덕행을 행하듯이 편안하게 행하고, 열심히 배워서 안 사람은 이롭게 하는 가운데 행하고, 어려움을 감내하며 안 사람은 힘써서 행하니 곧, 安而行之(用)는 生而知之(體)와 같고 利而行之(用)는 學而知之(體)와 같으며, 勉强而行之(用)는 困而知之(體)와 같다.
윗글 역시 體用의 이치로 설명하였는데, 지적인 것은 체가 되고, 공을 이루는 것은 용으로 하였으나 모두가 한 가지임을 밝혔다.

知之者之所知와 行之者之所行은 謂達道也ㅣ라 以其分而言하면 則所以知者는 知也ㅣ오 所以行者는 仁也ㅣ오 所以至於知之成功而一者는 勇也ㅣ니라 以其等而言하면 則生知安行者는 知也오 學知利行者는 仁也오 困知勉行者는 勇也ㅣ라 蓋人性이 雖無不善이나 而氣禀이 有不同者라 故로 聞道에 有蚤莫하며 行道에 有難易나 然이나 能自强不息이면 則其至는 一也ㅣ니라 呂氏曰 所入之塗雖異나 而所至之域則同하니 此는 所以爲中庸이어니와 若乃企生知安行之資하야 爲不可幾及이라 하고 輕困知勉行하야 謂不能有成이라 하면 此는 道之所以不明不行也ㅣ니라
아는 자의 아는 바와 행하는 자의 행하는 바는 달도라 이르니라. 써 그것을 나누어서 말한다면 써한 바 아는 자는 아는 것이요 써한 바 행하는 자는 어진 것이요 써한 바 알아서 성공에 이르러서 하나라는 것은 용맹이니라. 써 그것을 등급으로 말하면 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히 행하는 것은 지(순임금의 大知)이고, 배워서 알고 이롭게 행하는 것은 어짊(안자의 克己復禮, 克己爲仁)이오, 곤해서 알고 힘써서 행하는 것은 용맹(자로의 용맹)이라. 대개 사람의 사람의 성품이 비록 선하지 않음이 없으되 기품이 같지 않음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도를 들음에 빠름과 늦음이 있으며, 도를 행함에 어렵고 쉬움이 있느니라. 그러나 능히 스스로 강하여 쉬지 않는다면 즉 그 이르는 것은 하나이니라. 여씨가 말하기를 들어가는 바의 길이 비록 다르나 이르는 바의 경계는 같으니 이것이 써 중용을 하는 바이어니와 만약에 (성인이 행하는) 生知와 安行의 바탕을 바래서 가히 거의 미치지 못한다 여기고, 困知와 勉行을 가벼이 여겨 이르되 능히 이룸이 있지 못하다고 이르면, 이는 도가 밝아지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하는 바이니라

蚤 : 일찍 조 莫 : 저물 모 企 : 바랄 기

(子ㅣ曰) 好學은 近乎知하고 力行은 近乎仁하고 知耻는 近乎勇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배움을 좋아함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어짊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맹에 가까우니라

子曰 二字는 衍文이라 此는 言未及乎達德而求以入德之事라 通上文三知爲知요 三行爲仁이니 則此三近者는 勇之次也ㅣ라 呂氏曰 愚者는 自是而不求요 自私者는 徇人欲而忘返이요 懦者는 甘爲人下而不辭라 故로 好學이 非知나 然이나 足以破愚요 力行이 非仁이나 然이나 足以忘私요 知耻가 非勇이나 然이나 足以起懦니라
'子’와 ‘曰’ 두 자는 연문(혹처럼 붙음)이라. 이것(好學 ․ 力行 ․ 知恥)은 달덕에 아직 미치지는 못하고 써 덕에 들어가는 일을 구함을 말함이라. 윗글을 통해서 三知(生而知之 ․ 學而知之 ․ 困而知之)는 지요, 三行(安而行 ․ 利而行 ․ 勉强行)은 인이 되는 것이니 즉 이 세 가지 가까움은 勇의 다음이라. 여씨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옳다고는 하면서 구하지 못하고 스스로 삿된 자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서 (옳은 생각, 본성에) 돌아올 줄을 잊어버리고 게으른 자는 남의 아래가 됨을 좋아하고 사양하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知는 아니나 족히 써 우매함을 깨는 것이요, 힘써 행하는 것이 仁은 아니나 족히 써 사사로움을 잊어버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勇은 아니나 족히 써 게으름에서 일어남이니라.

徇 : 좇을 순 返 : 돌아올 반 懦 : 게으를 나 耻 : 恥(부끄러울 치)의 俗字

[앞주 해설]
연문이라 함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는 말이다(제20장은 애공의 물음에 공자가 계속 답변하는 내용으로 이미 앞에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知斯三者則知所以脩身이오 知所以脩身則知所以治人이오 知所以治人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리라
이 세 가지를 알면 수신을 알고, 수신을 알면 사람 다스림을 알고, 사람 다스림을 알면 천하국가 다스림을 앎이라.

[본문 해설]
대학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몸 닦을 줄을 알면 明德을 알고 新民할 수 있어 나라와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음을 밝힌 글이다.

斯三者는 指三近而言이라 人者는 對己之稱이라 天下國家는 則盡乎人矣라 言此하야 以結上文修身之意하고 起下文九經之端也ㅣ라
이 세 가지는 삼근을 가르쳐서 말함이라. 남이라는 것은 자기와 상대해서 일컬음이라. 천하국가는 곧 사람에게 다함이라. 이것을 말하여 써 윗글의 수신의 뜻을 맺고, 아랫글의 九經의 실마리를 일으킴이라.

凡爲天下國家ㅣ 有九經하니 曰修身也와 尊賢也와 親親也와 敬大臣也와 體群臣也와 子庶民也와 來百工也와 柔遠人也와 懷諸侯也ㅣ니라
무릇 천하국가를 함(다스림)이 구경이 있으니 가로대 몸을 닦음과 어짊을 높임과 어버이를 친함과 대신을 공경함과 여러 신하를 몸소 체득함과 여러 백성을 내 자식처럼 여김과 백공들을 오게 함과 먼 곳의 사람들을 회유함과 제후들을 포용함이라.

子 : 아들같이 여길 자, 사랑할 자

[본문 해설]
여기서 九經은 『書經』 「洪範九疇」에서 연원했다. 홍범구주는 치수법이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통치철학이 되는 글이다.
**** 메인화면에서 古典을 클릭한 뒤 서경으로 들어가면 홍범구주의 내용을 볼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經은 常也ㅣ라 體는 謂設以身處其地而察其心也ㅣ라 子는 如父母之愛其子也ㅣ라 柔遠人은 所謂無忘賓旅者也ㅣ라 此는 列九經之目也ㅣ니라 呂氏曰 天下國家之本이 在身이라 故로 脩身이 爲九經之本이라 然이나 必親師取友然後에 脩身之道ㅣ 進이라 故로 尊賢이 次之하고 道之所進이 莫先其家라 故로 親親이 次之하고 由家以及朝廷이라 故로 敬大臣體群臣이 次之하고 由朝廷以及其國이라 故로 子庶民來百工이 次之하고 由其國以及天下라 故로 柔遠人懷諸侯가 次之하니 此는 九經之序也ㅣ라 視群臣을 猶吾四體하고 視百姓을 猶吾子하니 此는 視臣視民之別也ㅣ니라
경은 떳떳함이라. 체는 몸으로 베풀어 그 곳에 거처해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을 이름이라. 자는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음이라. 유원인은 (외국에서 오는) 손님과 나그네를 잊음이 없음이라. 이것은 구경의 조목을 벌려 놓음이라. 여씨가 말하기를 천하국가의 근본은 (인군) 몸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수신이 구경의 근본이 됨이라. 그러나 반드시 스승을 친하고 벗을 취한 후에 수신의 도가 나아감이라. 그러므로 尊賢이 그 다음이고, 도가 나아가는 바가 그 집보다 먼저 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親親이 그 다음하고, 가정으로 말미암아 써 조정에 미치느니라. 그러므로 敬大臣體群臣이 그 다음하고, 조정으로 말미암아 써 그 나라에 미침이라 그러므로 子庶民來百工이 그 다음하고, 그 나라로 말미암아 써 천하에 미침이라 그러므로 柔遠人懷諸侯가 그 다음이니 이것은 구경의 순서이라. 여러 신하 보기를 나의 팔다리와 같이 하고 백성 보기를 나의 자식처럼 하니, 이는 신하를 봄과 백성을 봄의 다름이라.

修身則道立하고 尊賢則不惑하고 親親則諸父昆弟ㅣ 不怨하고 敬大臣則不眩하고 體群臣則士之報禮ㅣ 重하고 子庶民則百姓이 勸하고 來百工則財用이 足하고 柔遠人則四方이 歸之하고 懷諸侯則天下畏之니라
몸을 닦으면 도가 성립되고, 어짊을 높이면 미혹되지 아니하고, 친척을 친하면 제부(諸父 : 아버지의 형제들)와 형제들이 원망하지 아니하고, 대신을 공경하면 어지럽지(혼란하지) 아니하고, 여러 신하를 직접 체감(체험)하면 선비들이 보답하는 예가 후중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면 백성이 서로 권면(勸勉)하고, 기술 있는 이들을 모두 오게 하면 재물 씀(나라 경제)이 풍족해지고, 먼 데의 사람들을 유화하면(잘해주면) 사방(각처)에서 돌아오고, 제후들을 모두 품으면 천하가 두려워하니라.

[본문 해설]
옛날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먼저 자기 몸을 닦는 것, 곧 수신을 가장 근본으로 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수신의 효력에 대해 열거하고 있는데, 가까운 내 주변부터 점차 나아가 먼 곳의 사람은 물론 신분이 하찮은 이들까지 모두 잘 대해 주어야 하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면 집안이 화목해지고 신하들 사이에 질서가 잡히고 백성들이 서로 힘써 일함은 물론 기술가진 이들이 나라를 위해 더욱 그 기술을 개발하여 경제가 풍족해지고 덕분에 그 나라를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많은 관광객들까지 몰려옴을 얘기하였다. 임금은 不惑하고 不眩함이 없이 나라를 다스리되 백성을 풍족하게 하려면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
주역에서 이러한 교역의 이치를 계사하전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日中爲市하야 致天下之民하며 聚天下之貨하야 交易而退하야 各得其所케 하니 蓋取諸噬嗑하니라(한낮에 저자를 만들어 천하의 백성을 이르게 하며 천하의 재물을 모아서 교역하고 물러나 각각 그 바를 얻게 하니 대개 저 서합괘에서 취하니라)”
참고로 관광(觀光)이라 함은 본래 ‘觀國之光’으로 ‘나라의 빛을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빛은 정치를 말하는 것으로 나라의 정치가 잘되어 빛이 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잘사는 나라를 보기 위해 많은 나라 사람들이 구경을 간다는 데서 ‘觀光’의 뜻으로 사용된다. 주역 20번째괘인 風地觀괘 六四효에 나오는 말이다.

此는 言九經之效也ㅣ라 道立은 謂道成於己而可爲民表니 所謂皇建其有極이 是也ㅣ라 不惑은 謂不疑於理라 不眩은 謂不迷於事라 敬大臣이면 則信任專而小臣이 不得以間之라 故로 臨事而不眩야오 來百工이면 則通功易事하야 農末이 相資라 故로 財用이 足하고 柔遠人이면 則天下之旅ㅣ 皆悅而願出於其途라 故로 四方이 歸하고 懷諸侯면 則德之所施者ㅣ 博而威之所制者ㅣ 廣矣라 故로 曰天下ㅣ畏之라 하니라
이것은 구경의 효력을 말함이라. 도립은 도가 자기 몸에서 이루어져 백성의 표본이 되니 이른바 (『서경』 「홍범구주」에서 말하는) 황건기유극(황이 그 유극을 세움)이 이것이라. 불혹은 이치에 의심치 않음을 말함이라. 불현은 일에 아득하지 않음을 이름이라. 대신을 공경하면 신임이 전일(專一)해서 낮은 신하(小臣)들이 얻어 써 이간질을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일에 임해서 현혹됨이 없음이오, 모든 기술자들을 오게 하면 공(기술)을 통하고 일을 바꿔 하여(교역) 농업과 말업(상공업 등 기타 업종)이 서로 바탕함이라. 그러므로 재물 씀이 족하고, 먼 곳의 사람을 부드럽게 해서 오게 하면 모두가 기뻐서 천하의 나그네가 그(천자의 나라) 길에 나다니기(관광)를 원함이라. 그러므로 사방에서 돌아오고, 제후를 포용하면 덕을 베푸는 바가 넓어져 위엄을 짓는 바가 넓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천하가 두려워함이라’고 한 것이라.

齊明盛服하야 非禮不動은 所以修身也ㅣ오 去讒遠色하며 賤貨而貴德은 所以勸賢也ㅣ오 尊其位하며 重其祿하며 同其好惡는 所以勸親親也ㅣ오 官盛任使난 所以勸大臣也ㅣ오 忠信重祿은 所以勸士也ㅣ오 時使薄斂은 所以勸百姓也ㅣ오 日省月試하야 旣禀稱事난 所以勸百工也ㅣ오 送往迎來하며 嘉善而矜不能은 所以柔遠人也ㅣ오 繼絶世하며 擧廢國하며 治亂持危하며 朝聘以時하며 厚往而薄來난 所以懷諸侯也ㅣ니라
재계(齋戒)하고 밝게(깨끗이) 하고 옷을 성대하게 해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음은 몸을 닦는 바이오, 참소하는 이를 버리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덕 있는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진 이를 권면하는 바이오, 그 벼슬자리를 높여주며 그 봉록을 후하게 주며 그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한가지로 하는 것은 친척 친하는 것을 권면하는 바이오, 벼슬을 성대하게 하고 부림을 맡기는 것은 대신을 권면하는 바이오, 충성으로 대하고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선비를 권면하는 바이오, 때로 부리고 세금을 박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권면하는 바이오,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을 하여 봉록(희름, 旣稟)을 일에 맞추는 것은 백공을 권면하는 바이오, 가는 이를 전송하고 오는 이를 맞이하며 선한 이를 아름다이 여기고 능치 못한 이를 가긍히 여기는 것은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하는 바이오,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며 폐지된 나라를 일으켜 주며 난을 다스리고 위태로운 곳을 붙들어 주고 조회(朝會)와 빙례(聘禮)를 때로 써 하며 가는 이를 후하게 해주고 오는 이를 박하게 하는 것은 제후를 포용하는 바이니라.

讒 : 참소할 참 薄 : 엷을 박 斂 : 거둘 렴 旣 : 곳집 희(饎) 禀 : 곳집 름(廩) 稱 : 맞을 칭 嘉 : 아름다울 가 矜 : 불쌍히 여길 긍 聘 : 찾아갈 빙

[본문 해설]
앞 절에서는 몸을 닦는 효력을 말했고, 여기서는 몸을 닦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기본이 예를 갖추는 것으로 들고 있다. 『주역』 뇌천대장(雷天大壯)괘에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다’(象曰 雷在天上이 大壯이니 君子ㅣ 以하야 非禮不履하나니라)’고 하였다. 『논어』에서도 공자는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고 답하였다. 앞서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克己復禮爲仁)이며 하루라도 극기복례를 한다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一日克己復禮면 天下歸仁焉하나니)”라 하였듯이 수신의 제1단계는 먼저 자기 몸을 깨끗이 하는 齊明盛服을 들고 있다.
옷을 깨끗이 입는 것을 재계라 하고, 두루마기 등 예를 갖춰 옷을 입는 것을 성복이라 한다. 따라서 齊明盛服은 옷을 성대하고도 화려하게 입는 것이 아니라 갖출 것을 갖춰 깨끗하고 단정히 입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진 이를 권면(勸勉)한다는 것은 아첨하고 참소하는 이를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축재에 눈돌리지 말고 덕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어진 이들이 임금을 보필하기 위해 모여든다는 의미이다. 또한 친척을 친하게 권면한다는 것은 친척이라도 능력있는 이가 있으면 높은 벼슬도 주고 녹도 후하게 주어 집안에서 원망이 없도록 好惡를 똑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신을 권면하는 것은 벼슬을 성대히 하고 부림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官盛’이라 함은 오늘날 각 부처의 장관 밑에 차관, 국장, 과장 등을 두어 서로 맡은 바 업무를 분담토록 하고 장관은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결재권을 갖도록 하듯이 대신이 나라의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부서를 두어 일을 나누도록 한 것이며 ‘任使’란 아래 벼슬자리의 사람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들을 맡겨 부린다는 뜻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대신 혼자서 모든 일을 떠맡게 된다면 아무 일도 되지 않기에 대신을 권면하기 위해 ‘관성임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선비를 권면함은 충성되고 미덥게 하며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인데, 이것은 필요할 때만 부리다 버리는 ‘토사구팽(ꟙ死狗烹’)이 아니라 일을 의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을 권면하는 것은 아무 때나 데려다 부역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농번기는 피하고 농한기에 시켜야 하며 세금은 조금만 거둬들여 백성들을 살맛나게 하는 것이다.
백공을 권면하는 것은 물건을 제대로 만드는지 늘 살피고 매달 시험을 하여 더욱 잘 만들게 하고 일한 만큼 그 일의 성과에 맞춰 봉록(봉급)을 잘 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기술자가 더욱 기술 발휘에 노력하여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내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갈 때는 전송을 잘해주고, 오는 이는 환영하며, 잘한 일이 있으면 선양해주고 능치 못한 이는 가긍히(불쌍히) 여겨 많은 이들이 내 나라를 방문하고 싶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의 대가 끊기면 이어지도록 도와주고 기울어지거나 폐지된 나라는 다시 일으켜주며, 난이 일어나면 다스려주고, 위태로운 곳은 잘 붙들어주며(예 :『천자문』의 桓公匡合하여 濟弱扶傾이라) 일정한 때에 맞춰 제후들의 조회를 소집하고, 가끔씩은 일정 때마다 공물을 올리도록 하는 빙례를 하고, 갈 때는 후히 선물 등을 주어 잘 보내고 올 때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후의를 베풀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잘 대해주는 것이 제후를 품는 것이다.

此는 言九經之事也ㅣ라 官盛任使는 謂官屬衆盛하야 足任使令也ㅣ니 蓋大臣이 不當親細事라 故로 所以優之者ㅣ 如此라 忠信重祿은 謂待之誠而養之厚니 蓋以身體之하야 而知其所賴乎上者ㅣ 如此也ㅣ라 旣는 讀曰餼니 餼稟은 稍食也ㅣ라 稱事는 如周禮 槀人職에 曰考其弓弩하야 以上下其食이 是也ㅣ라 往則爲之授節以送之하고 來則豐其委積以迎之라 朝는 謂諸侯ㅣ見於天子오 聘은 謂諸侯使大夫로 來獻이라 王制에 比年에 一少聘이오 三年에 一大聘이오 五年에 一朝라 厚往薄來는 謂燕賜厚而納貢薄이라
이것은 구경의 일을 말함이라.‘관성임사’는 관직에 속한 것을 여럿으로 성하게 해서 족히 사령(부려서 시키는 것)을 맡김이니, 대개 대신이 마땅히 세세한 일을 친히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를 우대하는 바가 이와 같음이라.‘충신중록’은 이르되 대접하는 것을 성실히 하고(忠信) 기르는 것을 후하게 함(重祿)이니, 대개 몸으로써 체감하여 그 위에 의뢰하는(힘입는) 바가 이와 같음을 아는 것이라. '旣(이미 기)’는‘희’로 읽음이니, 희름은 초식(稍食, 祿俸)이라. ‘칭사’는『주례』「고인직」에 가로되 ‘그 궁노를 상고하여 써 그 食(봉록)을 올리고 내리는 것’이 이것이라. 가는 이는 부절(符節, 신임장)을 주어서 써 보내고, 오는 이는 위자(생활필수품)를 풍부히 해서 써 맞이함이라. 朝는 제후가 천자께 알현하는 것을 이름이오, 聘은 제후가 대부로 하여금 천자국에 와서 공물을 받치는 것을 이름이라. 「왕제」에 보면 해마다(比年) 한번 작은 빙례를 올리고, 3년에 한번 큰 빙례를 올리고, 5년에 한번 조회함이라. 후왕박래는 (송별)잔치 베푸는 것은 후하게 하고 공물을 들이는 것은 박하게 함을 말함이라.

餼 : 녹봉 희 稍 : 나아갈 초, 점점 초 弩 : 쇠뇌 노 委 : 쌓을 위 積 : 쌓을 적, 저축할 자

凡爲天下國家ㅣ 有九經하니 凡以行之者는 一也ㅣ니라
무릇 천하국가를 함에(다스림에) 아홉 가지 법이 있으니 무릇 써 행하는 것은 한 가지이니라.

一者는 誠也ㅣ니 一有不誠이면 則是九經이 皆爲虛文矣라 此는 九經之實也ㅣ라
한 가지는 정성이니 하나라도 성실하지 않으면 이 구경이라는 것은 다 헛된 글이 되느니라. 이는 구경의 실제이니라.

凡事ㅣ 豫則立하고 不豫則廢하나니 言前定則不跲하고 事前定則不困하고 行前定則不疚하고 道前定則不窮이니라
무릇(모든) 일이 미리하면 성립되고 미리하지 아니하면 무너지나니, 말을 앞에(미리) 예정하면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일을 앞에 예정하면 곤하지 아니하고, 행하는데 앞에 예정하면 병들지 아니하고, 길을 가는데 앞을 예정하면 궁하지 않느니라.

跲 : 미끄러질 겁, 넘어질 겁 疚 : 오랜 병 구

凡事는 指達道達德九經之屬이라 豫는 素定也ㅣ라 跲은 躓也ㅣ라 疚는 病也ㅣ라 此는 承上文하야 言凡事ㅣ 皆欲先立乎誠이니 如下文所推ㅣ 是也ㅣ라
무릇 일은 달도와 달덕과 구경에 속한 것을 가르침이라. 예는 본디 정함이라. 겁은 미끄러짐이라. 구는 병듦이라. 이것은 윗글을 이어서 말하기를 모든 일이 다 먼저 성실함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니 아랫글에 미룬 바와 같은 것이 이것이라.

躓 : 미끄러질 지, 넘어질 지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獲乎上이 有道하니 不信乎朋友ㅣ면 不獲乎上矣리라 信乎朋友ㅣ有道하니 不順乎親이면 不信乎朋友矣리라 順乎親이 有道하니 反諸身不誠이면 不順乎親矣리라 誠身이 有道하니 不明乎善이면 不誠乎身矣리라
아래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가히 얻어 다스리지 못하리라. 윗사람에게 얻음이 도가 있으니 벗에게 믿음이 없으면 윗사람에게 얻지 못하리라. 벗에게 믿음을 얻음에 도가 있으니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면 벗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리라. 어버이에게 순함이 도가 있으니 저 몸을 돌이켜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리라. 몸을 성실히 함에 도가 있으니 선에 밝지 못하면 몸에(자신에게) 성실하지 못하리라.

此는 又以在下位者로 抽言素定之意라 反諸身不誠은 謂反求諸身하야 而所存所發이 未能眞實而無妄也ㅣ라 不明乎善은 謂不能察於人心天命之本然하야 而眞知至善之所在也ㅣ라
이것은 또 아래 지위에 있는 자로써 본디 정해야 하는 뜻을 미루어 말함이라. 저 몸에 돌아가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저 몸에 반성하여 구해 존하는 바와 발하는 바가 능히 진실해서 망령됨이 없지 못함을 이르니라. 선에 밝지 못하다는 것은 능히 인심과 천명의 본연을 살펴 참으로 지극히 선한 것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함을 이르니라.

誠者는 天之道也ㅣ오 誠之者는 人之道也ㅣ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야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ㅣ오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ㅣ니라
誠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誠을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니, 성실이란 것은 힘쓰지 않아도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져 종용히 도에 맞으니 성인이요, 성실하게 하는 것은 선을 가려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니라.

[본문 해설]
정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늘의 도인 體가 되는 것이고, 정성스럽게 행하는 것은 사람의 도로 用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정성이라는 것은 굳이 노력해 힘쓰지 않아도 그 일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주역』19번째 지택림(地澤臨)괘 九二爻 象傳에 “象曰 咸臨吉无不利는 未順命也ㅣ라(상전에 이르길 ‘함림길무불리’는 명에 순하려 함이 아님이라)” 하여 命을 순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命이 순해진다 하였고, 25번째 망령됨이 없다는 천뢰무망(天雷无妄)괘 六二爻에서는 “六二는 不耕하야 穫하며 不菑하야 畬ㅣ니 則利有攸往하니라(육이는 밭 갈지 아니해서 거두며 묵히지 않았던 탈밭이 옥토가 되니 곧 나아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라 / 穫 : 거둘 확, 菑 : 일년 묵은 탈밭 치, 畬 : 삼년 묵은 탈밭 여)” 하였다. 또한 繫辭上傳 제10장에는 “唯神也 故로 不疾而速하며 不行而至하나니(오직 신인 까닭에 빨리 아니해도 빠르며 행하지 아니해도 이르나니)”라 하였다. 바로 이것이 不勉而中하고 不思而得이고, 소리없이 도에 맞으니 生而知之하고 安而行之하는 성인인 것이며, 하늘의 도이다. 그리하여 乾卦 文言傳 마지막 6절에서는 “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ㅣ 其唯聖人乎뎌(나아가고 물러남과 존하고 망함을 알아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 그 오직 성인이실 뿐인저!)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을 선택할 줄 알고 그것을 고집해 나갈 줄 아는 것은 어진 사람의 일이며 군자의 일이다. 그것이 성실해지는 것, 정성을 행하는 것이다. 정성을 행하려 하니 택선할 줄 알아야 하고, 고집해서 잘 붙잡고 나가야 한다. 위에서는 성인만을 언급했지만 이것은 學而知之하고 利而行之하는 현인에 해당하는 것이고 바로 사람의 도이다.

此는 承上文誠身而言이라 誠者는 眞實無妄之謂니 天理之本然也ㅣ오 誠之者는 未能眞實無妄而欲其眞實無妄之謂니 人事之當然也ㅣ라 聖人之德은 渾然天理하야 眞實無妄하야 不待思勉而從容中道하니 則亦天之道也ㅣ오 未至於聖이면 則不能無人欲之私하야 而其爲德이 不能皆實이라 故로 未能不思而得하야 則必擇善然後에 可以明善이오 未能不勉而中하야 則必固執而後에 可以誠身이니 此則所謂人之道也ㅣ라 不思而得은 生知也ㅣ오 不勉而中은 安行也ㅣ오 擇善은 學知以下之事오 固執은 利行以下之事也ㅣ니라
이것은 윗글의 성신을 이어서 말함이라. 정성이라는 것은 진실해서 망령됨이 없음을 말함이니 천리의 본연이오,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능히 진실무망하지 못하여 그 진실무망하고자 함을 이름이니 인사의 당연함이라. 성인의 덕은 천리에 혼연해서 진실무망하여 사면(힘써야 할 것을 생각함)을 기다리지 않고 종용히 도에 맞으니 곧 또한 하늘의 도요, 성인에 이르지 못하면 능히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지 못하여 그 덕됨이 능히 다 진실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능히 생각하지 않아도 얻을 수 없으면 반드시 선을 택한 후에야 가히 선을 밝게 할 수 있음이오, 능히 힘쓰지 않아도 맞지 못하면 반드시 고집한 후에 가히 써 몸을 성실히 하니 이것은 곧 사람의 도라고 하는 바이라. 생각지 않고도 얻음은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오, 힘쓰지 않아도 맞으면 편안히 행하는 것이오. 택선은 배워서 아는 것 이하의 일이요 고집은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 이하의 일이니라.

博學之하며 審問之하며 愼思之하며 明辨之하며 篤行之니라
널리 배우며 살펴서 물으며 삼가서 생각하며 밝게 분별하며 돈독히 행하느니라

審 : 살필 심

[본문 해설]
이 글은 학문하는 중용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학문은 널리 배워야 하며, 묻는 것은 쓸데없이 되나 안되나 묻는 것이 아니라 요점만 살펴서 물어야 하며, 생각은 삼가서 해야 하며, 분별은 밝게 해야 하며, 행실은 후중하고 돈독히 해야 한다. 『주역』 건괘 문언전 제6절에서 “君子ㅣ 學以聚之하고 問以辨之하며 寬以居之하고 仁以行之하나니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ㅣ라(군자가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별하며 너그러움으로써 거처하고 어짊으로써 행하나니 역에 이르길 ‘현룡재전이견대인’이라 하니 인군의 덕이라)”라 하였다. 여기에서 ‘學問’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學聚問辨은 내적인 체가 되고 寬居仁行는 외적인 용에 해당한다.

此는 誠之之目也ㅣ라 學問思辨은 所以擇善而爲知니 學而知也ㅣ오 篤行은 所以固執而爲仁이니 利而行也ㅣ라 程子ㅣ曰 五者에 廢其一이라도 非學也ㅣ니라
이것은 정성을 들이는 조목이니라. 학문사변은 써한 바 선을 가려서 知로 삼음이니, 배워서 아는 것이오. 독행은 써한 바 고집해서 仁으로 삼음이니 이롭게 여겨 행함이라. 정자 말씀하시길 “이 다섯 가지에 하나라도 폐하면 배움이 아니니라.”

有弗學이언정 學之ㄴ댄 弗能을 弗措也하며 有弗問이언정 問之ㄴ댄 弗知를 弗措也하며 有弗思ㅣ언정 思之ㄴ댄 弗得을 弗措也하며 有弗辨이언정 辨之ㄴ댄 弗明을 弗措也하며 有弗行이언정 行之ㄴ댄 弗篤을 弗措也하야 人一能之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어든 己千之니라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치 않음을 두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함을 두지 말며, 생각지 않을지언정 생각을 할진댄 얻지 못함을 두지 말며,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할진댄 밝지 못함을 두지 말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돈독하지 않음을 두지 말아서, 다른 사람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에 능하며, 다른 사람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에 능할지니라.

[본문 해설]
윗 글은 천하의 공통된 덕(達德)인 ‘知仁勇’ 가운데서 ‘勇’을 말하고 있다. 즉 남이 한번에 능하면 나는 백 번이라도 해서 능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해서 능하게 한다는 ‘困而知之’와 ‘勉强行之’를 말하고 있다.

君子之學은 不爲則已어니와 爲則必要其誠이라 故로 常百倍其功하나니 此는 困而知勉而行者也ㅣ니 勇之事也ㅣ라
군자의 학문은 하지 않으면 그만이어니와, 하면 반드시 그 이룸을 요하느니라. 그러므로 항상 그 공을 백배로 하나니 이는 곤해서 알고 힘써서 행함이니 용감해서 하는 일이라.

果能此道矣면 雖愚ㅣ나 必明하며 雖柔ㅣ나 必强이니라
과연 이 도를 능히 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으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지느니라.

明者는 擇善之功이오 强者는 固執之效라 呂氏 曰君子所以學者는 爲能變化氣質而已니 德勝氣質則愚者ㅣ 可進於明이오 柔者ㅣ 可進於强이어니와 不能勝之則雖有志於學이라도 亦愚不能明하며 柔不能立而已矣라 蓋均善而無惡者는 性也ㅣ니 人所同也오 昏明强弱之稟이 不齊者는 才也ㅣ니 人所異也ㅣ라 誠之者는 所以反其同而變其異也ㅣ라 夫以不美之質로 求變而美라도 非百倍其功이면 不足以致之어늘 今以鹵莾滅裂之學으로 或作或輟하야 以變其不美之質이라가 及不能變하야는 則曰天質ㅣ 不美하야 非學所能變이라 하니 是는 果於自棄니 其爲不仁이 甚矣라
明은 선을 가리는 공이오, 强은 고집의 효력이라. 여씨 말하기를 군자가 써 배우려는 바는 능히 기질을 변화할 뿐이니 덕이 기질을 이기면 어리석은 자가 가히 밝은데 나아가고 유약한 자가 가히 강한데 나아가거니와, 능히 이기지 못하면 비록 뜻을 배움에 둔다 하더라도 또한 어리석은 이가 능히 밝지 못하며 유약한 이가 능히 서지 못할 뿐이니라. 대개 선을 고르게 하고 악함이 없는 자는 (하늘이 그대로 준) 성품이니 사람마다 같은 바요, 어둡고 밝고 강하고 유약한 품성이 가지런하지 못한 것은 재질이니 사람마다 다른 바라. 성실히 하는 것은 그 같은 것을 돌이키고 그 다름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대저 아름답지 못한 재질로서 변함을 구해서 아름답게 하더라도 그 공을 백배로 하지 않는다면 족히 써 이루지 못하거늘 이제 노모멸렬(아무렇게나 대충하는 것)한 배움으로써 혹 짓기도 하고 혹 그만두기도 하여 그 불미한 재질을 변하려고 하다가 능히 변치 못함에 미쳐서는 곧 ‘타고난 하늘의 기질이 불미하여 배워서 능히 변할 바가 아니라’ 하니, 이는 스스로 포기함에 과감하니 그 어질지 못하게 됨이 심하니라.

鹵 : 황폐할 로 莾 : 거칠 모(망), 莽과 같이 쓰임 輟 : 그칠 철

[앞주 해설]
『대학』에서도 “지극한 선에 그쳐야 한다(止於至善)”고 했다. 이러한 선을 가리는 공은 밝음이며, 그 가린 선을 굳게 잡고 가는 효력은 강함이다. 따라서 明은 體가 되고, 强은 用이 되므로 ‘擇善之功’은 體가 되고 ‘固執之效’는 用이 된다. ‘明者 擇善之功’은 내적으로 알기 위한 모든 방법으로 體가 되고, ‘强者 固執之效’는 굳게 지켜 외적으로 나아가 성공하기 위한 효력이니 用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는 성품이 선한데 기질이 달라 악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다. 군자가 학문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 서로가 다른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덕이 그 기질을 이기면 어리석은 자는 밝아지고 유약한 사람은 강해질 수가 있다. 그런데 학문에 뜻을 두고도 사적인 기질을 확고히 이기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는 밝아지지 못하고 유약한 자가 강해질 수가 없다는 것이 여씨의 설명이다.

右는 第二十章이라

此는 引孔子之言하야 以繼大舜文武周公之緖하야 明其所傳之一致하니 擧而措之라도 亦猶是爾라 蓋包費隱兼小大하야 以終十二章之意라 章內에 語誠이 始詳하니 而所謂誠者는 實此篇之樞紐ㅣ라 又按孔子家語에 亦載此章而其文이 尤詳하야 成功一也之下에 有公曰子之言이 美矣至矣로대 寡人이 實固不足以成之也ㅣ라 故로 其下에 復以子曰로 起答辭어늘 今無此問辭而猶有子曰二字하니 蓋子思ㅣ 刪其繁文하야 以附于篇而所刪이 有不盡者ㅣ니 今當爲衍文也ㅣ라 博學之以下는 家語에 無之하니 意彼有闕文이어나 抑此或子思所補也歟인저
이는 공자의 말씀을 이끌어서 대순과 문왕 무왕 주공의 실마리를 이어서 그 전한 바가 일치하니 들어다가 두더라도 또한 이와 같을 뿐임을 밝힌 것이라. 대개 비은을 포함하고 작고 큰 것을 겸해서 써 12장의 뜻을 마친 것이라. 이 문장 안에 정성을 말함이 비로소 자세하니, 이른바 정성이라는 것은 실지로 이 책의 추뉴(돌쩌귀와 단추, 지도리와 매듭)이니라. 또한 『공자가어』를 상고하건데 또한 이 문장이 실려 있는데 그 글이 더욱 자세하여 성공은 하나라고 한 아래에 “애공이 말하길 ‘선생의 말씀이 아름답고 지극하되 과인이 실은 족히 써 이루지 못함이라.”라는 내용이 있음이라. 그러므로 그 아래에 다시 ’子曰‘로써 답한 말씀을 일으킨 것인데 지금은 물은 말이 없는데도 오히려 ‘자왈’이란 두 글자가 있으니, 대개 자사가 그 번거로운 글을 깎아서 써 편에 붙이면서 깎은 바가 다하지 못함이 있으니 이제 마땅히 연문이 됨이라. ‘博學之’ 이하는 『가어』에 없으니 아마도 저 (『예기』의 가어편에) 빠진 글이거나 아니 이 혹 자사가 보충하신 듯함이라.

措 : 둘 조 爾 : 뿐 이 樞 : 지도리 추 紐 : 맬 뉴 按 : 살필 안 闕 : 빠질 궐 抑 : 아니 억, 누를 억 歟 : 누를 여
출처 : 家苑 이윤숙의 庚衍學堂(한자와 유학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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