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誠明을 謂之性이오 自明誠을 謂之敎ㅣ니 誠則明矣오 明則誠矣니라 정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性’이라 이르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을 敎라 이르니,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으면 정성스러워지느니라.
[본문 해설] 『중용』은 이치가 깊은 글이니 생각을 많이 해야 뜻을 통할 수 있는 글이다.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훤히 밝아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그대로 받은 진실무망의 성품이고, 세상에 나와 배워 알면서 정성스럽게 하는 것은 하늘이 부여해준 본바탕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 이를 일러 교육이라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성과 밝음은 한 가지이기에 굳이 어떤 것이 더 먼저라고 구분할 문제는 아니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으면 자연 정성스러워지기에 ‘生而知之’거나 ‘學而知之’거나 ‘困而知之’거나를 막론하고 그 아는 데 이르러서 성공하는 것은 같다는 점이다.
自는 由也ㅣ라 德無不實而明無不照者는 聖人之德이 所性而有者也ㅣ니 天道也ㅣ오 先明乎善而後에 能實其善者는 賢人之學이 由敎而入者也ㅣ니 人道也ㅣ라 誠則無不明矣오 明則可以至於誠矣니라 自는 말미암음이라. 덕은 실하지 않음이 없고 밝음은 비추지 않음이 없는 것은 성인의 덕이 성품으로 해서 둔 것이니 하늘의 도요, 먼저 선에 밝은 뒤에 능히 그 선을 실지로 행하는 하는 자는 현인의 배움이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것이니 사람의 도라. 성실하면 밝지 않음이 없고 밝아지면 가히 성실함에 이르느니라.
右는 第二十一章이라
子思ㅣ 承上章夫子天道人道之意而立言也ㅣ라 自此以下十二章은 皆子思之言이니 以反覆推明此章之意니라 자사가 윗글 부자(공자)의 천도 ․ 인도의 뜻을 이어서 말을 세움이라(예전에는 세로로 글을 썼으므로 세운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로부터 써 아래로(제22장부터) 열두 장은 모두 자사의 말씀으로 이 장의 뜻을 반복하여 미루어 밝힌 것이라.
唯天下至誠이아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이오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이오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이오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니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어야 능히 그 성품을 다할지니, 능히 그 성품을 다하면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할 것이오,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하면 능히 물건의 성질을 다할 것이오, 능히 물건의 성질을 다하면 가히 써 천지의 화육을 도울 것이오, 가히 써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가히 써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느니라.
贊 : 도울 찬 參 : 석 삼, 참여할 참
[본문 해설] 지극한 정성을 가진 성인의 덕을 말하고 있다. 성인에 대해 『주역』 건괘 문언전 마지막 제6절에서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하고 망함을 알아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 그 오직 성인이실 뿐인저!(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ㅣ 其唯聖人乎인저)”라 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언급한 ‘大人’의 경지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夫大人者는 與天地合其德하며 與日月合其明하며 與四時合其序하며 與鬼神合其吉凶하야 先天而天弗違하며 後天而奉天時하나니 天且弗違온 而況於人乎ㅣ며 況於鬼神乎여(무릇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며,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며, 사시와 더불어 그 차례를 합하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하여, 하늘보다 먼저 해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며, 하늘보다 뒤에 해도 하늘의 때를 받드나니, 하늘도 또한 어기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며 하물며 귀신이랴!) 성인의 덕이 이러하기에 천하의 이치를 얻음에 자리가 하늘과 땅의 그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天下之理ㅣ 得而成位乎其中矣니라 - 『주역』 계사상전 제1장). 또한 ‘석 三’ ‘임금 王’, ‘사람 人’, 중천건괘의 모양 등은 모두가 『천부경』에서 말하는 ‘人中天地一’로서 지극한 정성을 가진 사람 곧 대인이나 성인이라면 가히 천지와 더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인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복희씨(伏犧氏)이다. 『주역』계사하전 제2장을 보면,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애 仰則觀象於天하고 俯則觀法於地하며 觀鳥獸之文과 與地之宜하며 近取諸身하고 遠取諸物하야 於是에 始作八卦하야 以通神明之德하야 以類萬物之情하니(옛적 포희씨가 천하에 왕이 되었을 때에 우러러서는 하늘의 형상을 보고 구부려서는 땅의 법을 보며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보며 가까이로는 저 몸에서 취하고 멀리로는 저 물건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팔괘를 지음으로써 신명의 덕을 통하여 만물의 실정을 같이하니)”에서 성인의 지극한 공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설괘전 제1장에서는 “昔者聖人之作易也애 幽贊於神明而生蓍하고 參天兩地而倚數하고 觀變於陰陽而立卦하고 發揮於剛柔而生爻하니 和順於道德而理於義하며 窮理盡性하야 以至於命하니라(옛적 성인이 역을 지을 때 그윽히 보이지 않는 데서 신명을 도와 시초를 내고 하늘은 셋으로 땅은 둘로 해서 수를 의지하고 음양의 변함을 보아서 괘를 세우고, 강유를 발휘해서 효를 내니, 도덕에 화순하고 의리를 다스리며, 이치를 궁구하고 성품을 다함으로써 명에 이르느니라)” 하였다. 위 본문의 마지막 문장인 ‘與天地參矣’에서 ‘參’을 ‘석 삼’으로 읽고 ‘천지와 더불어 셋을 이루니라’고 하거나, ‘참여할 참’으로 읽고 ‘천지와 더불어 참여하게 되니라’고 해석해도 두루 뜻이 통한다. 천지인 三才의 의미를 나타내는 글이다.
天下至誠은 謂聖人之德之實이니 天下에 莫能加也ㅣ라 盡其性者는 德無不實이라 故로 無人欲之私而天命之在我者를 察之由之하야 巨細精粗가 無毫髮之不盡也ㅣ라 人物之性은 亦我之性이로되 但以所賦形氣ㅣ 不同으로 而有異耳라 能盡之者는 謂知之無不明而處之無不當也ㅣ라 贊은 猶助也ㅣ라 與天地參은 謂與天地로 並立而爲三也ㅣ라 此는 自誠而明者之事也ㅣ라 천하지성은 성인의 덕의 실함이니 천하가 능히 더할 것이 없음을 이르느니라. 그 성품을 다하는 자는 덕이 실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람 욕심의 사사로움이 없고 천명이 내게 있는 것을 살피고 말미암아서 크고 가늘고 정하고 거칠음이 터럭끝만큼이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사람이나 물건의 성품은 또한 나의 성품이로되 다만 (하늘이) 부여해준 형체와 기질이 같지 않음으로 다름이 있느니라. 능히 (성품을) 다하는 자는 아는 것이 밝지 않음이 없고 처함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찬은 ‘도울 조’와 같으니라. 천지와 더불어 셋이라는 것은 천지와 더불어 나란히 서서 셋이 됨을 이르니라. 이는 정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자의 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