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해설] 성인이 지으신 『예기』를 보면 사람이란 짐승과 다르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야 하므로 예의와 위의가 있어야 하기에, 예의는 삼백편이나 되고 위의는 삼천 편이나 된다는 말이다.
優優는 充足有餘之意라 禮儀는 經禮也ㅣ오 威儀는 曲禮也ㅣ라 此는 言道之入於至小而無間也ㅣ라 우우는 충족하여 남음이 있는 뜻이라. 예의는 경례(법도의 예)요, 위의는 곡례라. 이것은 도가 지극히 작은 데까지 들어가 틈이 없음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앞 문장에서 양양은 바깥이 없음을 말한 반면 이곳에서는 남음을 얘기하고 있다. 성인의 도가 큰 데에 이르러서는 한없이 커서 내외가 없고, 작은 데 미쳐서는 한없이 작아 틈이 없음을 대비하여 말하는 것이다. 『예기』에 보면 ‘예의’와 ‘곡례’가 있다. ‘예의’는 經禮로 법도가 되는 큰 예이고, 이것이 줄기라면, ‘위의’는 곡례로 가지가 되는 작은 예를 말한다. 이러한 줄기가 되는 예의가 3백편이고, 가지가 되는 곡례는 3천편이 되는 도가 지극히 작은 데까지 들어가서 틈이 없다는 것이다. 앞 문장의 ‘至大而無外’는 외적인 것을 말하고 ‘至小而無間’은 내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는 아무나 행하는 것이 아니다. 주역 계사하전 제8장에서 “苟非其人이면 道不虛行하나니라(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가 헛되이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모든 것은 진실로 도를 펼 수 있는 성인만이 가능한 일이다.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하느니라.
總結上兩節이라 위의 두 마디를 다 맺음이라.
故로 曰苟不至德이면 至道ㅣ 不凝焉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진실로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엉겨지지 않느니라” 하니라
至德은 謂其人이오 至道는 指上兩節而言이라 凝은 聚也ㅣ며 成也ㅣ라 지극한 덕은 그 사람을 말함이오, 지극한 도는 위 두 마디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응은 모임이며 이룸이라.
[앞주 해설] 지덕은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에서 ‘其人’을 말하는 것이고, 지도는 “洋洋乎發育萬物하야 峻極于天이로다”와 “優優大哉라 禮儀三百과 威儀三千이로다”의 두 마디를 가리켜 한 말이다.
故로 君子는 尊德性而道問學이니 致廣大而盡精微하며 極高明而道中庸하며 溫故而知新하며 敦厚以崇禮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니, 광대함을 이르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함을 다하고 중용을 이르며,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며, 두터움을 돈독히 하고 써 예를 숭상하느니라.
[본문 해설] 군자는 지극한 도가 엉기는 사람이다. 그러한 군자는 하느님으로부터 타고난 선한 본성인 덕성을 높이고 밖으로 학문적인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 광대함을 이루게 되고 깨끗하고 은미한 데까지도 다하게 된다. ‘致廣大’는 ‘洋洋乎發育萬物’의 외적인 것이고(至大), ‘盡精微’는 ‘禮儀三百 威儀三千’의 내적인 것이다(至小). 또한 높고 밝음을 다하고서 중용지도를 말해야 하고,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며, 두터움을 돈독히 해서 예절을 숭상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윗 글에서 尊德性, 致廣大, 極高明, 溫故는 내적인 체가 되고, 道問學, 盡精微, 道中庸, 知新은 외적인 용이 되는 관계이다. 이 체와 용이 표리가 되어 ‘敦厚以崇禮’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尊者는 恭敬奉持之意라 德性者는 吾所受於天之正理라 道는 由也ㅣ라 溫은 猶燖溫之溫이니 謂故學之意니 復時習之也ㅣ라 敦은 加厚也ㅣ라 尊德性은 所以存心而極乎道體之大也ㅣ오 道問學은 所以致知而盡乎道體之細也ㅣ라 二者는 修德凝道之大端也ㅣ라 不以一毫私意自蔽하며 不以一毫私欲自累하여 涵泳乎其所已知하며 敦篤乎其所已能이니 此皆存心之屬也ㅣ라 析理則不使有毫釐之差요 處事則不使有過不及之謬요 理義則日知其所未知요 節文則日謹其所未謹이니 此皆致知屬也ㅣ라 蓋非存心이면 無以致知오 而存心者ㅣ 又不可以不致知라 故로 此五句는 大小相資하고 首尾相應하야 聖賢所示入德之方이 莫詳於此하니 學者ㅣ 宜盡心焉이니라 높힌다는 것은 공경하고 봉지한다는(받들어 갖는다는) 뜻이라. 덕성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게서 받은 바 바른 이치이니라. 도는 말미암음(연유)이라. 온은 심온(불을 때서 따뜻하게 익힌다)의 온과 같으니 옛 것을 배우고 다시 때로 익힘을 말함이라. 돈은 더욱 두터움이라. 덕성을 높인다는 것은 써 마음을 존해서 도체의 큰 데에 다하는 것이오, 문학을 이룬다는 것은 써 앎을 이루어 도체의 세밀한 데까지 다함이니라. 이 두 가지는 덕을 닦고 도를 엉기는 큰 단서이라. 한 터럭 사사로운 뜻으로 스스로 가리지 아니하며 한 터럭 사사로운 욕심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해서 그 이미 아는 바를 무젖게 하며 그 이미 할 수 있는 바에 돈독해야 하니 이는 모두가 마음을 존한다는 등속이라. 이치를 분석하면 터럭 끝 만큼의 차이도 있지 아니하게 하고, 일에 처하게 되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어긋남도 있지 아니하게 하고, 의리를 다스린다고 하면 날마다 그 알지 못하는 바를 알고, 글을 절도있게 한다면 날로 그 삼가지 못하는 바를 삼갈 것이니 이는 다 앎을 이루는 등속이라. 대개 마음을 존하지 아니하면 앎을 이룰 수 없고, 존심한 자는 또 가히 써 치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 다섯 글귀는 큼과 작음이 서로 바탕하고,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응하여 성현이 덕에 들어가는 방법을 보여준 바가 이보다 자세함이 없으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을 다할 지어니라.
燖 : 데울 심 蔽 : 가릴 폐 累 : 더러울 루 涵 : 젖을 함 釐 : 털끝 리
是故로 居上不驕하며 爲下不倍라 國有道에 其言이 足以興이오 國無道에 其黙이 足以容이니 詩曰 旣明且哲하야 以保其身이라 하니 其此之謂與인뎌 이런 고로 위에 거해서 교만하지 아니하며, 아래가 되어서 거스리지 않느니라. 나라에 도가 있음에 그 말이 족히 써 일어나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 그 묵묵함이 족히 써 용납할지니, 『시경』에 이르기를 그 밝고 또 밝아서 써 그 몸을 보존한다 하니 이것을 이름인저!
倍 : 거스릴 패, 배반할 배
[본문 해설] 『中庸』이란 책은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周易』乾卦 九二爻에 대한 文言傳의 해설에서 자사가 취한 내용으로, 君德 즉 군자가 나아가야 할 덕을 밝힌 내용이다. 그러기에 중용에는 주역의 원리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윗 글 내용 또한 『周易』乾卦 九三爻에 대한 文言傳의 해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九三曰 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는 何謂也오 구삼에 이르길 ‘군자종일건건석척약려무구’는 어찌 이름인고? 子曰 君子ㅣ 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이 所以進德也ㅣ오 공자 이르길 군자가 덕에 나아가며 업을 닦나니 충성되고 미덥게 함이 덕에 나아가는 바요 修辭立其誠이 所以居業也ㅣ라 말을 닦고 그 정성을 세움이 업에 거하는 바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ㅣ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ㅣ니 이를 줄을 알고 이르나니 더불어 기미(조짐)할 수 있으며, 마칠 줄을 알고 마치나니 더불어 의리를 보존할 수 있으니 是故로 居上位而不驕하며 在下位而不憂하나니 이런 까닭에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낮은 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아니하나니 故로 乾乾하야 因其時而惕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 그러므로 굳세고 굳세게 해서 그 때로 인하여(때에 따라)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하나 허물이 없으리라.
참고로 주역의 九三자리는 내괘이면서 양이 양자리에 있어 바른 자리이므로 군자이지만 내괘를 마치고 외괘로 넘어가기 직전이고 지나치게 강하여 위태로운 상태이다. 이때 군자는 진덕수업을 행하여 내적으로는 늘 덕을 행하고 외적으로는 늘 업을 닦는 것이다. ‘충성 忠’은 中心 즉 속마음 그대로 성실한 것을 말하고 ‘믿을 信’은 사람이 말한 그대로 행하여 미더운 것을 말한다. 이러한 충과 신에 바탕하여(忠信) 내적인 덕을 행하는 것이고(所以進德也) 밖으로는 늘 말 한마디마다 잘 닦아 헛되게 하지 않고 성실함이 있어(修辭立其誠) 그 정성을 다 바쳐서 업에 거처하는 것이다(所以居業也). 그렇게 진덕수업을 했을 때 이를 데를 알아 이르므로(知至至之) 필연코 일의 기미를 알고 일을 시작하게 되며(可與幾也) 또한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까닭에(知終終之) 필연코 결실(종결)을 알게 되니(知終終之) 그 결실과 의리를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可與存義也). 이렇기 때문에 구삼은 초구의 구이보다 윗자리에 있지만 교만하게 대하지 아니하고(居上位而不驕), 구사와 구오보다 아랫자리에 있지만 그보다 못한 처지를 부러워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在下位而不憂). 즉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교만해서는 안 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명에 따르지 않고 거스르거나 위배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사람이 왜 학문을 하고, 왜 덕성을 높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나라에 도가 있어 정치가 잘 이루어질 때에는 군자가 하는 말이 인정받아 흥기되고 반면 無道한 세상에서는 바른 말을 하면 잡아가두기 때문에 이런 때는 아무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용납될 뿐이다. 주역은 明哲保身의 학문이다. 밝음을 밝혀서 자기 몸을 보호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바로 윗글에서 인용한 『시경』의 “旣明且哲 以保其身”의 말이다. ‘明’은 밝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哲’은 입으로 딱딱 끊어서 말하는 것이다. 다 같은 밝음인데 明은 체가 되고 哲은 용이 된다. 그래서 哲學이라고 한다.
興은 謂興起在位也ㅣ라 詩는 大雅烝民之篇이라 흥은 흥기해서 지위에 있음을 이름이라. 시는 「대아장 증민편」이라.
[앞주 해설] 족히 써 일어난다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 많고 그것을 발표했을 때, 세상이 알아주고 높은 사람들이 끌어올려 벼슬자리에 있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시경』「대아 증민편」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肅肅王命을 仲山甫將之하며 엄숙한 왕명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며 邦國若否를 仲山甫明之로다 나라의 좋고 나쁨을 중산보가 밝히도다 旣明且哲하야 以保其身이며 이미 밝고 또 밝아서 그 몸을 보호하며 夙夜匪解하야 以事一人이로다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하니하여 한 사람을 섬기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