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告子ㅣ 曰生之謂性이니라 고자 가로대 생한 것을 일러 성이니라.
生은 指人物之所以知覺運動者而言이라 告子論性은 前後四章이 語雖不同이나 然이나 其大指는 不外乎此하니 與近世佛氏所謂作用是性者로 略相似하니라 생은 사람과 물건의 써 알고 깨닫고 움직이는 바를 가리키는 말이라. 고자가 논한 성은 앞뒤 네 장이 말은 비록 같지 아니하나 그러나 그 큰 가리킴은 이에 벗어나지 아니하니, 근세에 불씨(佛家)의 이른바 ‘작용시성(작용하는 것이 성이다.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잡고 발로 걷는 등의 모든 작용을 性이라 한다)’라는 것과 더불어 대략 서로 비슷하니라.
孟子ㅣ 曰生之謂性也ㅣ는 猶白之謂白與아 曰然하다 白羽之白也ㅣ 猶白雪之白이며 白雪之白이 猶白玉之白與아 曰然하다 맹자 가라사대 생한 것을 일러 성이라 함은 하얀 것을 일러 희다 함과 같은가? 가로대 그러하다. 하얀 날개의 흼이 흰 눈의 흼과 같으며 흰 눈의 흼이 백옥의 흼과 같은가? 가로대 그러하다.
白之謂白은 猶言凡物之白者를 同謂之白이요 更無差別也ㅣ라 白羽以下는 孟子ㅣ 再問而告子ㅣ 曰然이라 하니 則是謂凡有生者는 同是一性矣니라 흰 것을 일러 희다 함은 무릇 물건의 흰 것을 똑같이 일러 희다하고, 다시 차별이 없다는 말과 같음이라. 맹자가 다시 묻고 고자가 가로대 그러하다 하니 곧 이는 무릇 생이 있는 것은 똑같이 한 가지 성이라고 이름이니라.
然則犬之性이 猶牛之性이며 牛之性이 猶人之性與아 그렇다면 개의 성이 소의 성과 같으며, 소의 성이 사람의 성과 같은가?
孟子ㅣ 又言若果如此면 則犬牛與人이 皆有知覺하고 皆能運動하니 其性이 皆無以異矣라 하시니 於是에 告子ㅣ 自知其說之非하고 而不能對也ㅣ라 ○愚ㅣ 按性者는 人之所得於天之理也ㅣ오 生者는 人之所得於天之氣也ㅣ니 性은 形而上者也ㅣ오 氣는 形而下者也ㅣ라 人物之生이 莫不有是性하고 亦莫不有是氣언마는 然이나 以氣言之면 則知覺運動은 人與物이 若不異也로대 以理言之면 則仁義禮智之禀이 豈物之所得而全哉아 此는 人之性이 所以無不善하야 而爲萬物之靈也ㅣ라 告子ㅣ 不知性之爲理하고 而以所謂氣者로 當之라 是以로 杞柳, 湍水之喩와 食色無善無不善之說이 縱橫繆戾하고 紛紜舛錯이로대 而此章之誤가 乃其本根이니 所以然者는 蓋徒知, 知覺運動之蠢然者는 人與物同하고 而不知仁義禮智之粹然者는 人與物異也ㅣ라 孟子ㅣ 以是折之하시니 其義精矣로다 맹자가 또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과연 이와 같다면 개와 소가 사람과 더불어 다 지각함이 있고 다 능히 운동할 수 있으니 그 성이 다 써 다름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에 고자가 스스로 그 말의 그릇됨을 알고 능히 대답하지 못함이라. ○우(주자)가 상고하건대 성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이치요, 생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기이니, 성은 형용해서 위에 한 것(形而上)이오, 기는 형용해서 아래한 것(形而下)이라. 사람과 물건의 남(生)이 이 성을 두지 아니함이 없고 또한 이 기를 두지 아니함이 없건마는 그러나 氣로써 말한다면 지각과 운동은 사람과 더불어 물건이 다르지 아니한 것과 같되, 理로써 말한다면 곧 인의예지의 부여받음이 어찌 물건이 얻어서 온전히 하는 바이랴. 이는 사람의 性이 써한 바 선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만물의 영이 됨이라. 고자가 성의 이치됨을 알지 못하고 이른바 기라는 것으로써 해당시켰음이라. 이로써 고리버들과 소용돌이 물의 비유와 식과 색이 선이 없고 불선이 없다는 설명이 종횡으로 얽히고 거슬리며 어지럽고 어그러졌으니 이 장의 오류가 이에 그 뿌리이니, 써한 바 까닭은 대개 한갓 지각과 운동의 움직이는 것이 사람과 다못 물건이 같은 줄만 알고, 인의예지의 순수함은 사람과 다못 물건이 다름을 알지 못함이라. 맹자가 이로써 꺾으시니 그 의가 정밀함이로다.
繆 : 얽을 무 紜 : 어지러울 운 蠢 : 꿈틀거릴 준
[앞주 해설 : 形而上과 形而下] ‘形而上과 形而下’에 관해서는 『주역』 계사상전 제12장에서 공자가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形而上者를 謂之道ㅣ오 形而下者를 謂之器오...(형용해서 위에 한 것을 도라 이르고, 형용해서 아래에 한 것을 기라 이르고..)’ 道라는 것은 형이상적인 것이고, 器는 형이하적이라고 하였다. 언뜻 생각하면 ‘형체라는 것은 이미 있는데 어떻게 형이상적인 도가 될 수 있나’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냥 ‘上者를 謂之道ㅣ오 下者를 謂之器오’라 하지 않고, 앞에 얼굴 形자를 놓고서 상하를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 형체가 없는 데에서는 上下 구별을 못한다. 사람이라는 물체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정신이 있음을 안다. 사람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사람의 형체가 없다면 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형체가 있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형이상적인 도, 즉 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형체가 있음으로써 눈에 보이는 형이하적인 器, 즉 사람의 몸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형체를 먼저 놓고, 형체의 양적인 것과 음적인 것이 있게 되며, 형이상적인 것이 있고 형이하적인 것이 있게 된다.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고 육체가 있다는 말이다. 이 우주만물이 변화생성하는 속에는 저 보이지 않는 이치로서의 근원자인 태극, 즉 ‘형이상자’의 도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원리에 의해서 ‘형이하자’가 변화하고, 살고, 변화생성하는 것이다. 천지라는 形이 있기 때문에 上者가 나오고 下者가 나와서, 道가 나오고 器가 나오듯이, 사람이라는 형체를 보고서 정신의 형이상과 육체의 형이하가 구별되는 것이다. 위에서 주자는 性과 氣를 형이상과 형이하로 나누고, 性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이치요, 氣는 곧 生이자 드러나 보이는(나타나는) 사람의 기질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형이하적인 기로써만 사람을 본다면 동물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사람에게는 하늘이 부여한 바의 인의예지라는 형이상적인 理가 있음을 역설하고, 맹자의 견해에 동조하며 고자의 ‘生之謂性’을 반박하고 있다.
<제4장>
告子ㅣ 曰食色이 性也ㅣ니 仁은 內也ㅣ라 非外也ㅣ오 義는 外也ㅣ라 非內也ㅣ니라 고자 가로대, 식과 색이 성이니, 인은 안이라, 바깥이 아니오, 의는 바깥이라, 안이 아니니라.
[본문 해설] 이 제4장이 이른바 고자의 유명한 ‘仁內義外說’과 맹자의 비판 내용이다. 맹자는 ‘仁義’가 인간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는 성선설의 입장이므로, 인의에 내외 구분을 한다는 고자의 설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고자편의 위 아래 내용을 죽 읽다보면 서로간의 설을 입증하기 위해 궤변적인 辯舌이 많이 동원되었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주역 계사상전 제5장을 보면 ‘顯諸仁 諸藏用’이란 대목이 있다. 여기서 仁은 씨앗을 말하는데 씨앗인 인이 세상에 드러나고 用은 감추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원칙대로 하면 仁은 감추어져 있어야 하고, 用은 드러나 있어야 한다. 그런데 仁이 드러나고 用이 감추어져 있다고 했다. 顯諸仁(현저인)이라는 것은 감추어져 있는 仁의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터 나온 것을 말하는 것이다. 春夏秋冬 四時를 仁義禮智 四德과 연관시킬 때 봄은 仁에 해당한다. 봄에 씨를 뿌렸으니 그 仁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 顯諸仁이다. 그런데 또 드러내놓고 쓰여야 할 用 자체는 諸藏用(장저용)이라 하여 감추어져 있다고 했다. 가을에 백곡이 결실을 보아 추수를 하면 그 곡식으로 음식을 해먹고 하는 것이 用이다. 그 用이 감춰진다는 것은 用的인 물건 자체가 씨앗이 되어 땅 속에 들어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곧 ‘顯諸仁 諸藏用’이란 뜻은 한 번은 나오고 한 번은 들어가고, 한 번은 봄이고 한 번은 가을이 되고, 한 번은 씨앗을 심고 한 번은 추수하는 生長收藏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仁義’는 이미 안(태극)에 내재되어 있는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다름 아니기에 고자의 ‘仁內義外’ 곧 仁이 안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義는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설은 易의 이론에 비춰볼 때 견강부회로 볼 수 있다. 조기(趙岐) 역시 주석을 통해 ‘일은 비록 외부에 있으나 그 일을 행하는 것은 모두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 맹자는 인의가 안에서부터 우러나옴을 밝혀 고자의 미혹을 깨우쳐 주었다’라고 하였다.
告子ㅣ 以人之知覺運動者로 爲性故로 言人之甘食悅色者ㅣ 卽其性이라 故로 仁愛之心은 生於內하고 而事物之宜는 由乎外하니 學者ㅣ 但當用力於仁이오 而不必求合於義也ㅣ니라 고자가 사람의 지각과 운동으로써 성을 삼는 고로 말하기를 사람의 먹을 것 좋아하고 색을 좋아함이 바로 그 성이라. 그러므로 인애의 마음은 안에서 나오고 사물의 마땅함은 밖에서 말미암으니, 배우는 자 다만 마땅히 인에 힘을 쓸 것이오, 반드시 의에 합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니라.
孟子ㅣ 曰何以謂仁內義外也오 曰彼長而我長之라 非有長於我也ㅣ니 猶彼白而我白之라 從其白於外也ㅣ라 故로 謂之外也ㅣ라 하노라 맹자 가라사대 어찌 써 인이 안이고 의가 바깥이라 이르느뇨? 가로대 저 어른이어든 내 어른이라 하는지라(저들이 어른이라 하니 나도 어른으로 여기느니라). 내게 어른이 있지 아니하니, 저 희거든 내 희다함이라, 그 흰 것을 바깥에 따름과 같은지라. 그러므로 바깥이라 이른다 하노라.
我長之는 我以彼로 爲長也ㅣ오 我白之는 我以彼로 爲白也ㅣ라 내 어른이라 함은 내가 저로써 어른을 삼음이오(여김이오), 내 희다 함은 내 저로써 흰 것을 삼음이라.
曰(異於)白馬之白也는 無以異於白人之白也ㅣ어니와 不識게라 長馬之長也ㅣ 無以異於長人之長與아 且謂長者ㅣ 義乎아 長之者ㅣ 義乎아 가라사대 말의 흰 것을 희다함은 써 사람의 흰 이를 희다함과 다름이 없거니와 아지 못게라, 말의 어른을 어른이라 함은 써 사람의 어른을 어른이라 함과 다름이 없는가? 또 이르되 어른이 의인가, 어른이라 하는 자가 의인가?
[본문 해설] 長馬之長과 長人之長은 이치로 볼 때 서로가 상이한 뜻을 품고 있다. 말의 어른이라고 하면 곧 늙은 말로 더 이상은 쓸모없다는 뜻이고, 사람의 어른이라고 하면 곧 경륜이 있는 지혜로운 늙은이로 본받을 점이 많기에 공경해야 할 대상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長馬之長’의 앞에 있는 長자는 쓸모없다는 뜻으로 ‘長人之長’의 앞의 長자는 공경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나이들었다고, 늙었다고 다 義라고 보는 것이 옳은가라는 맹자의 반격이다. 고자 첫장부터 고자가 性을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물에 비유하면서부터 논리의 전개와 서로간의 반박이 궤변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곧 보편성의 원리와 개별적인 원리를 분리시켜 논의를 진행시켜야 하는데 그러하지 아니하고 한데 묶어 얘기하다보니 충돌하는 현상이다. 참고로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춘추전국 당시에는 통상의 도를 넘어 궤변적인 변설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일컬어 名家 혹은 논리학파라 부른다.
張氏 曰上異於二字는 宜衍이라 하고 李氏 曰或有闕文焉이라 하니라 愚ㅣ 按白馬白人은 所謂彼白而我白之也ㅣ오 長馬長人은 所謂彼長而我長之也ㅣ라 白馬白人은 不異하고 而長馬長人은 不同하니 是乃所謂義也ㅣ라 義不在彼之長이오 而在我長之之心하니 則義之非外가 明矣니라 장씨 가로대 위의 ‘異於’ 두 글자는 연문임이 마땅하다 하고, 이씨 가로대 혹 빠진 문장이 있다 하니라. 우(주자)가 상고해보건대, 흰 말과 흰 사람은 이른바 저 희거든 내 희다 함이오, 어른 말과 어른 사람은 이른바 저 어른이거든 내 어른이라 함이라. 백마와 백인은 다르지 아니하고 장마 장인은 같지 아니하니 이에 이른바 의라 하니라. 의는 저 어른(나이 많음)에 있지 아니하고 내 어른으로 여기는(공경하는) 마음에 있으니 의가 밖이 아님이 분명하니라.
曰吾弟則愛之하고 秦人之弟則不愛也하나니 是는 以我爲悅者也ㅣ라 故로 謂之內오 長楚人之長하며 亦長吾之長하나니 是는 以長爲悅者也ㅣ라 故로 謂之外也ㅣ라 하노라 가로대 내 아우이면 사랑하고 진나라 사람의 아우이면 사랑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나로써 기쁨을 삼음이라. 그러므로 일러 안이오, 초나라 사람의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며, 또한 나의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나니 이는 어른으로써 기쁨을 삼음이라. 그러므로 일러 밖이라 하노라.
言愛主於我故로 仁在內요 敬主於長故로 義在外라 말하건대 사랑은 나를 위주로 하므로 인은 안에 있고, 공경은 어른을 위주로 하므로 의는 밖에 있음이라.
曰耆秦人之炙ㅣ 無以異於耆吾炙하니 夫物이 則亦有然者也ㅣ니 然則耆炙로 亦有外與아 가라사대 진나라 사람의 불고기를 즐김이 써 내 불고기를 즐김과 다름이 없으니 무릇 물건이 곧 그러함이 있으니 그러면 불고기를 즐김도 또한 밖인가?
耆 : 여기서는 嗜(즐길 기, 좋아할 기)와 같음. 炙 : 구운 고기 자(적)
言長之, 耆之ㅣ 皆出於心也ㅣ라 林氏 曰告子ㅣ 以食色爲性故로 因其所明者而通之하시니라 ○自篇首至此四章은 告子之辨이 屢屈而屢變其說하야 以求勝하고 卒不聞其能自反而有所疑也ㅣ하니 此正其所謂不得於言이어든 勿求於心者니 所以卒於鹵莽而不得其正也ㅣ라 어른이라 여기는 것과 즐기는 것이 다 마음에서 나옴을 말씀하심이라. 임씨 가로대 고자가 식과 색으로써 성은 삼은 고로 그 밝은 바로 인하여 통하게 하시니라. ○편 머리부터 이 4장에 이르기까지 고자의 변이 여러 번 굽히고 여러 번 그 말을 바꾸어서 써 이기기를 구하고 마침내 그 능히 스스로 돌이켜 의심하는 바가 있음을 듣지 아니하니, 이는 바로 그 이른바 말에서 얻음이 있지 아니하거든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이니, 써한 바 마침내 거칠어서 그 바름을 얻지 못함이라.
屢 : 여러 루 鹵 : 소금 로, 거칠 로 莽 : 우거질 망, 거칠 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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