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曰 衣錦尙絅이라 하니 惡其文之著也ㅣ라 故로 君子之道는 闇然而日章하고 小人之道는 的然而日亡하나니 君子之道는 淡而不厭하며 簡而文하며 溫而理니 知遠之近하며 知風之自하며 知微之顯이면 可與入德矣리라 시에 가로되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니 그 무늬의 나타남을 미워함이라.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우면서 날로 빛나고 소인의 도는 밝으면서 날로 없어지나니, 군자의 도는 담박하되 싫지 아니하며, 간략하되 무늬가 있으며, 온화하되 조리가 있으며, 먼 것이 가까운 곳부터라는 것을 알며, 바람이 부터함(어느 곳에서부터 일어남)을 알며, 은미함이 드러남을 알면 가히 더불어 덕에 들어가리라.
絅 : 홑옷 경
[본문 해설] 『시경』에 나오는 衣錦尙絅이란 말은 비단옷을 입었다고 으스대며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덧옷을 입어 그 비단옷의 화려함을 가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려함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해 가렸다는 것인데 여기서 비단옷이라 함은 많이 알고 아름다운 것을 많이 품은 군자를 말하고 덧옷은 겸양을 뜻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조금만 알아도 그것을 확대해 남들에게 자랑하려고 야단이지만 군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감추려고 애쓴다는 말이다. 『주역』地火明夷괘 大象傳에 “밝음이 땅 가운데 들어감이 ‘명이’니, 군자가 이로써 무리에 다다름에 그믐을 써서 밝히느니라(象曰 明入地中이 明夷니 君子ㅣ 以하야 莅衆애 用晦而明하나니라)”라 하였다. 군자의 도란 겉으로는 어두운 그믐인 체하면서 세상을 밝힌다는 것이다. 그믐이 다하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훤히 밝아지듯, 군자의 도는 어두우면서 날로 자연히 빛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소인의 도는 겉으로 굉장히 밝은 것 같지만 그 밝은 것이 날로 없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는 담백한 물과 같이 아무리 마셔도 싫지 아니하며, 간략하지만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무늬가 나오고, 늘 온화하면서도 조리가 있어 잘 다스리고, 먼 곳이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됨을 알고, 바람이 어느 곳에서부터 불기 시작했는지 다시 말해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알며, 은미하게 시작하여 후에 훤히 드러나는 것까지 알게 된다. 이런 정도가 되면 가히 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前章엔 言聖人之德이 極其盛矣오 此는 復自下學立心之始로 言之而下文에 又推之하야 以至其極也ㅣ라 詩는 國風 衛碩人 鄭之丰에 皆作衣錦褧衣하니 褧은 絅으로 同이니 襌衣也ㅣ라 尙은 加也ㅣ라 古之學者는 爲己라 故로 其立心이 如此라 尙絅故로 闇然이오 衣錦故로 有日章之實이며 淡簡溫은 絅之襲於外也ㅣ오 不厭而文且理焉은 錦之美ㅣ 在中也ㅣ라 小人은 反是則暴於外而無實以繼之니 是以로 的然而日亡也ㅣ라 遠之近은 見於被者ㅣ 由於此也ㅣ오 風之自는 著乎外者ㅣ 本乎內也ㅣ오 微之顯은 有諸內者ㅣ 形諸外也ㅣ라 有爲己之心하고 而又知此三者면 則知所謹而可入德矣라 故로 下文에 引詩하야 言謹獨之事하니라 앞장(제32장)에서는 성인의 덕이 그 성함을 다함을 말하고 여기서는 다시 아래에서 배우는 이가 마음을 세우는 시작부터 말하였으며 아랫글에 또 이것을 미루어서 써 그 지극함에 이르게 한 것이라. 시는 「국풍」의 ‘위풍 석인편’과 ‘정풍 봉편’에 모두 ‘의금경의’로 되어 있으니 ‘褧’은 ‘絅’으로 같으니, 홑옷이라. ‘尙’은 더함이라.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를 위함이라. 그러므로 그 마음을 세움이 이와 같으니라. 홑옷을 덧입었기 때문에 어두움이오, 비단옷을 입었기 때문에 날로 빛나는 실제가 있느니라. 담담하고 간략하고 온화함은 홑옷이 밖에서 껴입어짐이오. 싫지 않고 무늬가 나며 또 조리가 있음은 비단의 아름다움이 속에 있음이라.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하니 밖에 드러나되 실제로써 이어짐이 없으니, 이로써 밝되 날로 없어짐이라. ‘원지근’은 저기에 나타남이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풍지자’는 밖에 나타난 것이니 안에 근본함이요, ‘미지현’은 저 안에 있는 것이 저 밖으로 형체가 됨이라.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고 또 이 세 가지(遠之近, 風之自, 微之顯)를 알면 삼갈 바를 알아 가히 덕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아랫 글에 『시경』을 인용하여 홀로를 삼가는(謹獨) 일을 말하였느니라.
褧 : 홑옷 경 襌 : 홑옷 단 襲 : 껴입을 습 暴 : 나타날 폭
[앞주 해설] 학문에는 ‘爲己之學’과 ‘爲人之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爲己之學’이란 남을 의식하거나 벼슬하고자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남이 뭐라고 하던 나를 위해서, 스스로 수신을 위해서, 사람이 되고자 학문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爲人之學’이란 자신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남에게 큰소리치거나 벼슬하려고 혹은 돈을 벌려고 하는 공부를 말한다. 옛날 성현이나 군자들은 위기지학의 자세로 공부를 했는데 처음 공부를 하려는 사람 또한 위기지학으로 임해야 한다. 윗 글에서 군자의 밖으로 드러난 행동을 ‘絅之襲於外’라 표현하고, 소인의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暴於外’라고 표현한 것은 잘 음미해야 한다. 군자는 겉으로 홑옷을 껴입어 밝음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실제는 속에 비단옷을 입고 있어 날로 밝아지지만, 소인은 큰소리만 치고 주먹을 휘두르고 폭력을 쓰니 금방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제 알맹이가 없어 날로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군자의 도는 밖으로나 멀리서나 은미한 가운데서도 드러나니 ‘遠之近’과 ‘風之自’와 ‘微之顯’으로 표현하였다. 『주역』계사상전 제8장에 風澤中孚괘 九二효사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자식이 화답하도다.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어 내가 너와 더불어 얽히노라(鳴鶴이 在陰이어늘 其子ㅣ 和之로다 我有好爵하야 吾與爾靡之하노라?)”에 대해 공자가 “군자가 그 집에 거해서 그 말을 냄에 선하면 천리 밖에서 응하나니, 하물며 그 가까운 데에서랴! 말이 몸에서 나와 백성에게 더하며, 행실이 가까운 데서 발해 먼 곳에서 나타나나니, 언행은 군자의 추기니 추기의 발함이 영과 욕의 주가 되느니라. 언행은 군자가 이로써 천지를 움직이는 바니 가히 삼가지 아니하랴!(子曰 君子ㅣ 居其室하야 出其言에 善이면 則千里之外ㅣ 應之하나니 況其邇者乎여 居其室하야 出其言에 不善이면 則千里之外ㅣ 違之하나니 況其邇者乎여 言出乎身하야 加乎民하며 行發乎邇하야 見乎遠하나니 言行은 君子之樞機니 樞機之發이 榮辱之主也ㅣ라 言行은 君子之所以動天地也ㅣ니 可不愼乎아)”라고 말씀하신 뜻과 같다. 이러한 군자이기에 말에는 항상 실지가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다는 것을 『주역』風火家人괘 대상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象曰 風自火出이 家人이니 君子ㅣ 以하야 言有物而行有恒하나니라(상에 가로되 바람이 불에서 나는 것이 가인이니, 군자가 이로써 말에는 실지가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게 하나니라).” 여기서 가인은 한 집안을 말하는데, 집에서 남들이 듣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 남들이 모두 알게 되듯이, 밖에 나타난 것은 바로 내 집안 내 마음 속에서 근본이 된 것이다. 즉 자기 몸을 위하여 공부하는 마음(爲己之心)이 먼저 있고, ‘遠之近’ ‘風之自’ ‘微之顯’의 세 가지가 진리라는 것을 알면, 삼갈 바를 알아서 가히 덕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래는 『시경』을 인용해서 ‘謹獨’을 말하고 있다.
詩云 潛雖伏矣나 亦孔之昭ㅣ라 하니 故로 君子는 內省不疚하야 無惡於志나 君子之所不可及者는 其惟人之所不見乎인뎌 『시경』에 이르기를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 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안으로 살펴 병들지 아니해서 뜻(마음)에 미워함이 없으니 군자의 가히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 오직 사람이 보지 않는 바인저! 孔 : 심히 공
[본문 해설] 『시경』「小雅」正月편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魚在于沼하니 고기가 못에 있으니 亦匪克樂이로다 또한 능히 즐겁지 못하도다 潛雖伏矣나 물에 잠겨서 엎드려 있으나 亦孔之炤이로다 또한 심히 밝게 보이도다 憂心慘慘하여 마음에 근심하기를 심히 하여 念國之爲虐하노라 나라의 포악함을 염려하노라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는 것은 세상 속에 엎드려 있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 밝은 빛이 나온다는 말이다. 앞서 ‘衣錦尙絅’과 같이 비록 겉옷을 덧입었지만 결국은 빛이 나게 된다는 말을 이어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겉으로보다 안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안으로 스스로 가책을 느끼거나 마음의 병폐가 조금도 없어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군자가 남들과 다른 점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 나 홀로 있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이 제33장은『중용』을 마무리 지으면서 맨 처음 제1장의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ㅣ니 可離면 非道也ㅣ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를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는 대목이다.
詩는 小雅正月之篇이라 承上文하야 言莫見乎隱莫顯乎微也ㅣ라 疚는 病也ㅣ라 無惡於志는 猶言無愧於心이니 此는 君子謹獨之事也ㅣ라 시는 「소아 정월편」이라. 윗글을 이어 숨은 것보다 드러남이 없고, 은미한 것보다 나타남이 없음을 말한 것이라. 구는 병이라. 마음에 미움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군자가 홀로를 삼가는 일이라.
[앞주 해설] 주자 또한 자사가 예를 든 『시경』의 구절을 『중용』 제1장에 나오는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ㅣ니라”를 들어 ‘愼獨’을 ‘謹獨’으로 설명하고 있다.
詩云 相在爾室혼대 尙不愧于屋漏ㅣ라 하니 故로 君子는 不動而敬하며 不言而信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집안에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않다” 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느니라.
漏 : 샐 루, 서북모퉁이 루 * 屋漏 : 방구석, 아랫목 한구석
[본문 해설] 위에 인용된 시는 앞서 『중용』제16장에서도 인용된 바가 있다(인용 시 내용은 제16장에서 참조 바람). 앞글에 이어서 ‘謹獨’의 효험을 말하고 있다. 즉 남이 볼 때나 홀로 있을 때를 삼가 안으로 마음을 잘 닦아 正心修道를 하니 군자는 억지로 남에게 잘 보이려고 움직이지 않아도 결국은 세상에 진심이 드러나게 되어 남들이 공경하게 되고,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믿어주게 된다.
詩는 大雅抑之篇이라 相은 視也ㅣ라 屋漏는 室西北隅也ㅣ라 承上文하야 又言君子之戒謹恐懼가 無時不然하야 不待言動而後에 敬信하니 則其爲己之功이 益加密矣라 故로 下文에 引詩하야 幷言其效하니라 시는 「대아 억편」이라. 상은 봄이라. 옥루는 방의 서북쪽 귀퉁이라. 윗글을 이어 또 군자의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두려워함(戒謹恐懼)이 때로 그렇지 않음이 없어 말과 행동을 기다리지 않은 뒤에 공경하고 믿게 함을 말하였으니 ‘위기지공(몸을 위한 공력)’이 더욱더 주밀함이라. 그러므로 아랫글에 시를 인용해서 아울러 그 효험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屋漏를 방의 서북쪽이라 하고 귀퉁이라고 하는 이유는 보통 집을 남향으로 짓는데, 이 경우 문을 열고 들어 갈 경우 아랫목은 서쪽이 되고, 그 구석이 서북쪽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있으면서도 부끄럽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 ‘謹獨’의 자세이다. 戒謹恐懼는 누가 두려워서라기 보다 스스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삼가는 마음 자세이다. 만약 벌을 받을까봐 누구로부터 야단을 맞을까봐 삼가는 것은 ‘謹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용』 제1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불가(佛家)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만약 빛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영원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한 말도 바로 不睹하고 不聞이라 하여 도를 닦지 않음을 경계한 말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爲己之學)로 더욱더 주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爲己之功은 爲己之學과 같은 뜻이다.
詩曰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不賞而民勸하며 不怒而民威於鈇鉞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신 앞에) 나아가 (신이 감격해) 이름에 말이 없어서 때에 다툼이 있지 않다”하니, 이런 고로 군자는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하며,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이 작도와 도끼보다 더 두려워하느니라.
奏 : 아뢸 주, 나아갈 주 假 : 이를 격 鈇 : 작도 부 鉞 : 도끼 월
[본문 해설]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는 말은 『중용』제16장의 “神之格思를 不可度思ㅣ온 矧可射思아”라는 말과 같이 신은 오직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 때에 헤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신 앞에 나아가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면 신이 감격하여 이르게 되는데 이때에는 아무 말이 필요 없고 묵묵한 가운데 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 다툼이 있을 수가 없듯이 군자가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에게 임하면, 군자가 백성에게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은 서로 잘하자고 권하며, 군자가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은 형벌보다도 더욱 두려워하여 잘 따르게 된다.
詩는 商頌烈祖之篇이라 奏는 進也ㅣ라 承上章而遂及其效하야 言進而感格於神明之際에 極其誠敬하야 無有言說而人自化之也ㅣ라 威는 畏也ㅣ라 鈇는 莝斫刀也ㅣ오 鉞은 斧也ㅣ라 시는 「상송 열조편」이라. 주는 나아감이라. 윗글을 이어 드디어 그 효험에 미쳐 나아가 신명을 감격할 즈음에 그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여 말과 설명을 하지 않아도 사람이 스스로 감화됨을 말한 것이라. 위는 두려워함이라. 부는 여물을 써는 작도요, 월은 도끼라.
遂 : 드디어 수 際 : 즈음 제 莝 : 여물 좌 斫 : 벨 작
詩曰 不顯惟德을 百辟其刑之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篤恭而天下ㅣ平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않은 덕을 백벽(여러 제후)이 법으로 삼는다” 하니 이런 고로 군자는 공순함을 돈독히 하여 천하가 평평해지느니라.
詩는 周頌烈文之篇이라 不顯은 說見二十六章이라 此는 借引以爲幽深玄遠之意라 承上文하야 言天子ㅣ 有不顯之德而諸侯ㅣ 法之하니 則其德이 愈深而效愈遠矣라 篤은 厚也ㅣ니 篤恭은 言不顯其敬也ㅣ라 篤恭而天下平은 乃聖人至德이 淵微하야 自然之應이니 中庸之極功也ㅣ라 시는 「주송 열문편」이라. 불현은 설명이 제26장에 보이니라. 이는 빌리고 인용해서 써 그윽하고 깊고 아득하고 먼 뜻을 삼은 것이라. 윗글을 이어서 천자가 드러나지 않은 덕이 있어 제후가 그것을 법으로 삼으면 그 덕이 더욱 깊어 효험이 더욱 멀어지는 것을 말함이라. 독은 두터움이니 독공은 그 공경함이 나타나지 않음을 말함이라. 공순함을 돈독히 해서 천하가 평평해짐은 이에 성인의 지극한 덕이 깊고 은미하여 자연히 응함이니, 중용의 지극한 공효이라.
詩云 予懷明德의 不大聲以色이라 하야날 子ㅣ曰 聲色之於以化民애 末也ㅣ라 하시니라 詩云德輶如毛ㅣ라 하니 毛猶有倫이어니와 上天之載ㅣ 無聲無臭아 至矣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명덕의 소리와 다못(또) 색을 크게 여기지 않음을 생각한다”하거늘, 공자 말씀하시기를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하는데 끝이라” 하시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덕이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 하니 터럭은 오히려 비교할 수 있거니와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야만 지극하니라. 以 : 다못 이, 또 이 倫 : 비교 륜 載 : 일 재
[본문 해설] 『시경』「大雅 皇矣篇」에서 “予懷明德의 不大聲以色이라”는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고 하였듯이 사람은 모두 밝은 덕을 갖고 나왔다. 이것이 앞에서 나온 不顯惟德이다. 이 드러나지 않는 덕은 멋진 소리나 화려한 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시경에서 ‘밝은 덕의 소리와 색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지엽말단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덧붙여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하였다. 만약 덕이 무겁다면 누가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터럭조차 물건이라 큰 터럭, 작은 터럭이 있듯이 비교가 된다. 이렇게 비교가 되는 것으로 덕을 나타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주역 산천대축괘의 상구효에 보면 “어느 하늘의 거리인고, 형통하니라(上九曰 何天之衢ㅣ오 亨하니라)”하였고, 그 爻象傳에“何天之衢는 도가 크게 행함이라(象曰 何天之衢는 道ㅣ 大行也ㅣ라)”하였다. 주역의 易簡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하늘은 쉬운 법칙이 있기에 만물을 내고, 땅은 하늘의 쉬운 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간단한 법칙으로 만물을 기르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상천의 일은 易簡의 법칙에 따라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지극할 뿐인 것이다. 『중용』은 『시경』「文王篇」의 “上天之載 無聲無臭”를 인용하고 이 뒤에 “至矣라(지극하니라)”라는 두 단어만을 덧붙여 끝맺음을 하였다. 하늘의 덕은 지극하기에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는 것이다.
詩는 大雅皇矣之篇이니 引之하야 以明上文所謂不顯之德者ㅣ 正以其不大聲與色也ㅣ라 又引孔子之言하야 以爲聲色은 乃化民之末務어늘 今但言不大之已면 則猶有聲色者ㅣ 存하니 是未足以形容不顯之妙라 不若烝民之詩에 所言德輶如毛하니 則庶乎可以形容矣어니와 而又自以爲謂之毛면 則猶有可比者하니 是亦未盡其妙라 不若文王之詩所言上天之事無聲無臭니 然後에 乃爲不顯之至耳라 蓋聲臭는 有氣無形하야 在物에 最爲微妙어늘 而猶曰無之라 故로 惟此에 可以形容不顯篤恭之妙오 非此德之外에 又別有是三等然後에 爲至也ㅣ니라 시는 「대아 황의편」이니 이것을 인용하여 써 윗글에 이른바 드러나지 않는 덕을 정히 써 소리와 색을 크게 여기지 않음을 밝혔느니라. 또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소리와 색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끄트머리에 힘써야 하는 일이거늘, 이제 다만 크게 여기지 않게 여긴다고 말했을 뿐이라면, 이것은 오히려 소리와 색이 남아 있는 것이니 드러나지 않는 묘함을 형용하기에 충분하지 못함이라. 『시경』「증민」시에 말한 바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라고 한 것만도 못하니 즉 거의 가히 써 형용이 되었으되 또 스스로 이르기를 터럭이라고 하면 오히려 가히 비교가 되니 이 또한 그(불현지덕) 묘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리라. 「문왕시」에 말한 바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한 후에야 드러나지 않음의 지극함이 될 뿐이라. 대개 소리와 냄새는 기운만 있고 형체가 없어서, 물건에 있어 가장 미묘한 것임에도 오히려 없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오직 이것은 가히 써 드러나지 않은 공순함을 돈독히 한다는 묘함을 형용함이오, 이 덕의 밖에 또 별도로 이 세 가지 등수(성색→ 터럭→무색무취)가 있은 연후에 지극함이 된다고 함이 아니니라.
右는 第三十三章이라
子思ㅣ 因前章極致之言하야 反求其本하야 復自下學爲己謹獨之事로 推而言之하야 以馴致乎篤恭而天下平之盛하시고 又贊其妙하야 至於無聲無臭以後에 已焉하시니 蓋擧一篇之要而約言之하야 其反復丁寧示人之意가 至深切矣시니 學者ㅣ 其可不盡心乎아 자사가 앞 장 극치의 말을 인해서, 돌이켜 그 근본을 구하게 하여 다시 하학(초학)이 자기 몸을 위한 근독의 일로부터 미루어 말해서 써 공순함을 돈독히 해서 천하가 평해지는 성한 데까지 길들여 이루게 하시고, 또 그 묘함을 찬양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은 뒤에 끝나는 데 이르게 하시니, 대개 한 편(제33장)의 요점을 들어 간략하게 말씀하시어 그 반복하고 정녕하여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이 지극히 깊고 절실하시니, 배우는 자가 그 가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주 해설] 이상으로 『중용』은 마지막 제33장에 시경 8편의 시를 인용하여 지극한 정성의 의미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 지극한 정성의 덕은 드러나지 않아 소리나 빛, 터럭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무색무취의 지극함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 그러하므로 사람이 항상 지극한 정성으로 임한다면 신이 감격하여 이르니 하늘이 감동한다는 것(至誠感天)이 자사가 『중용』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려는 요체일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우리들은 그 마음을 다하여 中庸의 道를 배워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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