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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종대왕은 왜 하필이면 한글을 28자로 만들었을까

ria530 2012. 6. 16. 10:43

[다음은 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同人』지 2004년 4월호에 실린 반재원유종회 회장 /(사)한배달 훈민정음 연구소장의 글로 일부 수정 편집했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訓民正音解例 가운데 制字解 전문을 싣겠습니다. 여기에는 음양과 오행론에 의거해 훈민정음을 만들었음을 낱낱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한글은 이미 3~4천년전에 ‘가림토’라는 고한글로 존재했는데 이를 체계화해 다시 세상에 드러낸 것이 세종임금의 훈민정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글과 한문의 制字 원리를 살펴보면 우리 민족에게 이 두 개의 문자는 음양의 상생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家苑 註]

 

 

 


우리는 대부분 한글이 24자인 줄 알고 있습니다. 또 28자 중 없어진 4글자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동양천문학에는 ‘28수(宿) 천문방각도(天文方刻圖’라는 천문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구(天球)를 동 서 남 북으로 나누고 각각 7 별자리씩 배당하여 모두 28 별자리로 구성해 놓은 천문도입니다. 이 별자리들의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방 7수 : 각 항 저 방 심 미 기(角亢氐房心尾箕)
북방 7수 : 두 우 여 허 위 실 벽(斗牛女虛危室壁)
서방 7수 : 규 루 위 묘 필 자 삼(圭婁胃昴畢觜參)
북방 7수 : 정 귀 유 성 장 익 진(井鬼柳星張翼軫)

천문도를 보면(*이 글 속에 천문도를 편집해 넣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한문반 여러분들께는 별도로 복사해서 설명드릴 예정입니다.) 안쪽에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를 비롯한 12지를 표시하여 천문과 지리를 함께 나타내고 있지요. 세종 임금은 초성(初聲)을 12지에 배속시켰고, 중성(中聲)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의 10간의 자리에 배속시켰습니다.

보다 많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아무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하는 과정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훈민정음의 첫소리 5행 배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발성(發聲)과 관련해 오행과의 상관관계를 보면, 목구멍(水)을 근원으로 해서 어금니(木), 혀(火), 입술(土)로 나아가서 다시 이(金), 목구멍(水)으로 되돌아옴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상생(相生)의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木 : 어금니소리(牙音) : ㆁ ㄱ ㅋ : 寅 卯 辰
火 : 혓소리(舌音) : ㄴ ㄷ ㄹ ㅌ : 巳 午 未
土 : 입술소리(脣音) : ㅁ ㅂ ㅍ : 28수 중에서 星 房 虛에 배당
金 : 잇소리(齒音) : ㅅ ㅈ ㅊ : 申 酉 戌
水 : 목구멍소리(喉音) : ㅇ ㆆ ㅎ : 亥 子 丑


가운데소리의 위치를 보면,
ㅏ는 갑(甲)의 자리에 배속시켰습니다. 甲의 기운은 28수 가운데에서 心과 尾에서 발하므로 결국 ㅏ는 心과 尾라는 두 별자리 사이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또 ㅗ는 임(壬)의 자리에 배속시켰는데, 壬의 기운은 28수 중 危와 室에서 발하므로 결국 ㅗ는 危와 室이라는 두 별 자리 사이에 배당되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른 글자들도 이러한 원리에 바탕하였기 때문에 모두 28자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임금이 훈민정음 창제기간 동안 천문대에 행차한 횟수가 28회였음을 보아도 한글 창제와 천문이론이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한글 28자를 반포한 해도 세종 28년이었습니다.

세종 임금은 재위 16년 되던 해(1434년)에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자(6.3m), 길이 47자(9.1m), 너비 32자(6.6m)의 관측대를 쌓고, 그곳에 1년 만에 대간의(大簡儀 : 첨성대)를 만들었습니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규표(圭表)와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 등을 설치했습니다.

간의대 서쪽에 설치된 거대한 규표는 동표의 높이가 40자(8.3m)이고, 청석으로 만든 圭의 표면에는 장 척 촌 푼의 눈금을 매겨 한낮에 동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여 24절기를 확정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원나라 사람 곽수경이 세운 관성대(觀星臺)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간의대였다고 합니다. 이 간의대는 세종 20년(1438년)부터 서운관(書雲觀)이 주관하여 매일 밤 5명의 관리가 교대로 관측에 임하게 하여 실질적인 기능을 하였던 것이지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서운관은 세종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편하여 천문, 지리, 역수(曆數)에 관한 업무를 맡아본 관아로써 측우기, 물시계, 해시계의 발명도 여기서 이루어졌습니다. 창덕궁 옆과 지금의 현대건설 사옥 터에 걸쳐 있었으나 1907년에 폐지되었지요.

그보다 앞서 이용된 간의대는 옛 휘문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관천대, 즉 소간의대였습니다. 세종실록과 증보 문헌비고에 의하면 대간의대는 하늘원 365도 1/4의 눈금이 새겨진 적도환과 그 안쪽에 12시 100각의 눈금이 새겨진 백각환이 있고, 중심에 사유환이 있어 천체의 변화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15년조에 의하면 세자(뒷날 문종)가 간의대에 나아가 정초, 이천, 정인지, 김빈 등과 함께 간의와 혼천의의 제도를 강문하고 김빈과 내시 최습에게 명하여 간의대에서 숙직하면서 해와 달과 별들을 참고하여 그 문제점을 파악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숙직 때문에 고생하는 김빈에게는 옷까지 하사하였으며 이로부터 세종과 세자가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 그 제도를 의논하여 정했다고 합니다.

또 세종 16년(1434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세종 20년(1438년)에 준공된 흠경각(欽敬閣)은 경복궁 강녕전 곁에 있었습니다. 欽敬이란 함은 『書經』에 나오는 ‘넓은 하늘을 삼가 따르게 하시고,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여 사람들에게 때를 알린다(書經 제1장 虞書 제1편 堯典.에 나오는 글로 요임금이 희씨와 화씨에게 명한 내용이다. 즉 ‘欽若昊天하고 曆象日月星辰하여 敬授人時하시니라’).’는 뜻을 취한 것으로 12지로 상을 만들어 시각을 알렸습니다.

세종 19년에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는 관측기를 완성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북극 2성이 북신(北辰)에 가까울 뿐 아니라 북신보다 밝아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측후(測候)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종 15년(1433년)에는 세종이 직접 28수의 거리와 도수, 12궁에 드나드는 별의 도수를 일일이 측후하여 새로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기고 이순지에게 명하여 천문역법에 대한 책을 편찬케 하였습니다.

세종의 이러한 역법과 천문지식으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에 있어서 역법과 천문 이론이 그 바탕이 되었음은 조금도 낯선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한글이 28자로 창제된 이유는 바로 세종 임금께서 천부경의 진리를 회통하고 있는 태극, 음양 오행 이론을 포함한 역법과 동양 천문도의 ‘28수 천문 방각도’의 원리를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 내용은 우리가 한글이 왜 과학적이며 세계적인 문자인가를 우리 자신은 물론 외국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초 지식이 되는 것이지요. 이 기본 지식을 알아야만 비로소 한글이 왜 세계에서 그 유래가 없는 우수한 문자가 되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첫 관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 : 家苑 이윤숙의 庚衍學堂(한자와 유학경전)
글쓴이 : 家苑 이윤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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