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오해와 무지가 쌓여 사실과 진실을 왜곡시켜 이것이 마치 사실인양 또는 학문적 진실로 굳어진 경우가 많다. 수천년동안 동북아시아 문화를 형성하고 유지해온 한자 문자학과 한문으로 된 유학경전에 대한 해설 분야가 그렇다. 더욱이 아시아 전체가 서구의 물질문명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압도당하면서 한자와 유학경전은 시대에 뒤처진 퇴물이나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아 왔다.
이에 중국과 한국의 정치권력은 한자를 간체자로 바꾸거나 전면적인 한글전용 실시 등으로 자신들의 문자를 억압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은 오로지 서구학문이 최고인양 미국의 관점에서만 학문을 바라 보았다. 또한 동양학문을 한다는 이들조차 한자와 유학경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커녕 현실과 타협하여 안주하고 말았다.
한자와 유학경전의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왜곡(歪曲) 사례를 들자면
1) 사서삼경을 번역한 동양학부 교수가 『주역』을 강의하면서『주역』계사전에 나오는 ‘五十 大衍數’에 대해 공자가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나온지 모르겠다고 강의하고 있다.
<논어집주 역해(新) 메뉴의 '공자가 「위정편 4장」[술이편 16장]에 담아놓은 『주역』의 數의 이치‘ 참고 >
2) 정약용의『시경강의』를 번역한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한문학과 교수가 耐(참을 내)를 파자하여 해설하기를 “而(말이을 이)가 수염을 나타내고, 寸은 又(오른손 우)와 같이 쓰였기에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길 때 아파도 참는 것’에서 ’인내‘라는 뜻이 나왔다.’라고 풀이하였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耑(시초 단, 끝 단)은 실을 자아내고 한 줌씩 묶어 가지런히 묶어둔 모양의 삼(麻)실을 나타내는 모양에서 나온 글자이다. 들쑥날쑥한 모양과 구렛나루 수염(而) 모양처럼 생겼기에 그 끝을 잘라 반듯하게 가지런히 해 둔데서 시초와 끝이라는 뜻을 취했다. 가느다란 삼실(而)을 하나씩 분리해 잡아(寸 =又) 이으려면 끈기가 필요한데서 耐의 뜻이 나온 것이다.>
3) 조선시대 문헌 해설서의 베스트셀러 저술가이자 중세 국문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의 한문교재에 의하면, 한자가 매우 과학적인 언어라면서
‘日’에 대해 해설하기를
‘해의 모습을 그렸으며 가운데 획은 해의 충만한 기운 혹은 태양의 흑점을 상징한다. 태양을 다른 말로 金烏, 陽烏라고 하며, 고대사람들은 태양속에 세발달린 까마귀인 三足烏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는 해를 동경한 나머지 밀납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 높이 날다 태양열에 녹아 떨어져 죽는데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에 대한 경고이다.’라 하였다.
<아래 음양오행 관련 ① ② 참고>
이는 한자문화권에서 정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허신의 『설문해자』나 『강희자전』등의 문헌조차도 참고하지 않거나, 한자문화의 철학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음양오행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특히나 한자가 상형문자라고 하여(그림문자로만 보고는), 갑골문의 문자변천 과정에 대한 해설에서 상상력까지 가해지다보니 작의적이고 임의적인 해설이 난무하고 있다. 문자학에 대한 학문적 합의가 없다보니 발생하는 문제이다.
동서양은 문자가 형성되던 상고 시절 그 바탕이 되는 철학적, 문화적, 지리적 환경이 달랐다. 이에 근본적으로는 뜻글자와 소리글자의 차이로 인해 문자를 생성하고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단적인 사례로는 동서양의 동서남북에 대한 표현이 정반대라는 점이다.
특히 한자는 뜻글자로서 소리글자와 달리 문자형성과정에서 음양오행이라는 천자자연의 이치이자 철학적 원리를 근거로 만들어진 문자이기에 그 해설에서 반드시 음양오행적 관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자를 상형(象形)문자라고 하는 것이나, 한자로 된 가장 오래된 문헌인『역경』을 상수리(象數理)학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알파벳 등의 소리글자에는 象과 數와 理致가 들어 있지 않은데 반해, 뜻글자인 한자에는 소리글자와 달리 천지자연의 현상과 철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① 가령 ‘日’ ‘月’에는 숫자 一 二가 있으며, 해와 달의 象인 ○나 冂이 있으며, 一 과 二나 日과 月은 음양(陰陽)이치를 상징한다. 이에『설문해자』는 日.月을 음양의 정화(精華)로 정의하고 있다.
② 그리고 水.火.木.金.土인 五行의 五는『설문해자』에 ‘음양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서로 사귀어 교차하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水가 방향으로는 북쪽을, 계절로는 겨울을, 색깔로는 흑색을 나타내는데서 보듯이 한자 생성에는 천지자연 현상을 나타낸 음양오행에 의한 세계관이 담겨 있다.
③ 음양오행의 철학적 개념은 陽을 뜻하는 ‘一’과 天地人 3才를 표상하는 大(『설문해자』에 ‘道大 天大 地大 人亦大’로 나온다)로 이루어진 ‘天’이라는 글자에서 잘 드러난다. 즉 ‘天’에는 공간과 시간과 형이상적 개념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天理’는 음양오행의 이치를 뜻하는 한편 동양철학을 상징하는 말이다.
④ 반면에 소리글자인 영어 Sun과 Moon이나 Heaven이나 한글인 ‘해’와 ‘달’ ‘하늘’에는 이러한 象과 數와 理가 없다. 따라서 음양오행은 뜻글자인 한자의 낱글자 해독이나 한문문헌 해설을 올바로 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열쇠이다. 문제는 근대 교육과정에서 서양식으로 배운 이들이 음양오행에 대한 지식이 없이 뜻글자를 소리글자 처럼 해설하게 될 경우 오류와 왜곡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에 위의 1),2),3)같은 자의적인 풀이방식이 횡행하는 것이다.
한자는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생성되었고 동양학문 역시 음양오행의 이치를 토대로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동양학문 전공자들은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신화나 기적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제기를 못하면서, 음양오행에 대해서는 오히려 미신이나 신화로만 여겨 학문적인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거듭 지적하지만 음양오행(象數理) 이치에 대한 공부없이 동양경전을 해설하는 것은 독어나 영어나 러시아 경전을 번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사실상 단순 번역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논어』옹야편 16장에 나오는 ‘質勝文則野요 文勝質則史니(質이 文을 이기면 촌스럽고, 文이 質을 이기면 사치스러우니) 文質彬彬然後에 君子니라’에 대한 해설에서 대부분이 質은 內面을 강조하여 본바탕 또는 내용, 내면의 인격이란 뜻으로, 文은 外部로 드러내는 측면을 강조하여 文飾(문식), 장식, 태도 , 학식, 겉꾸밈 등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文質彬彬(아롱질 빈)’은 겉(外)과 속(內)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뜻의 사자성어로도 많이쓰고 있다.
논어는 공자의 유가사상이 집약된 압축된 문헌이다. 따라서 논어 전체를 흐르는 유가사상이 각 장의 문장에 서로 연계되어 있다. 옹야편 16장이 대표적인 문장이다. 이 문장과 연계된 내용을 보자면,
① 文의 출처는 논어 학이편 6장의 學文이다. 學은 학이편 1장에 나온다. 『설문해자』에 文은 ‘서로 섞어 그리는 것 또는 사귀는 것을 상형하였다‘로 나온다. 學은 臼(절구 구, 어린 아이의 머리모양) +爻(본받을 효) +冖(덮을 멱)+子(아이 자)로 이루어져 있다. 學의 핵심인 爻에 대해『설문해자』는 ‘易의 6효가 사귀는(交) 것을 상형하였다’로 나온다.
『주역』계사하전에서는 ‘爻는 천하의 움직임을(天下之動)을 본받음이라’ 하였다. ‘天下之動’은 천지자연의 운행을 뜻하며, 천지자연의 운행은 음양의 교차(사귐 : 交)에 의해 생긴다. 즉 爻는 천지자연의 운행이치를 본받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學에는 단순히 ‘배울 학’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에 어두운(冖) 어린 아이(子)가 천지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배운다(爻)‘는 뜻이 담겨 있다. 이렇듯 學과 文이라는 글자에는 음양의 이치가 들어 있다.
② 유학에서는 천지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만들어진 것을 節文이라고 한다. ‘節’은 하늘의 덕을 본받아 만든 인륜과 예절 및 법도를 말하며, 文은 시서육예(시경.서경과 禮.樂.射.御.書.數)를 뜻한다.
③ 공자는 학이편 6장 7장에서 ‘효제충신 인의예지’ 등의 덕행(節)을 잘 하고 나서 여력이 되면 學文을 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학에서의 學文은 천지자연의 이치가 담긴 詩書六藝를 배운다는 의미이다.
④ ‘質’ 역시 유명한 팔일편 8장의 繪事後素(회사후소 : 그림 그리는 일은 바탕을 이룬 뒤에 채색을 한다)의 素(횐 비단)와 같은 뜻이다. 素는 원래 횐 비단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바탕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공자가 (『周禮』冬官편) 고공기에 나오는 ‘繪事後素’를 인용하여 학이편 6장 7장과 같은 맥락에서 사람 역시 좋은 바탕(素=質= 착한 品性, 또는 덕행)이 있은 뒤에 문(文)을 더해야 함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素가 좋은 바탕을 뜻하는 質에 해당된다면 繪는 文을 나타낸다.
⑤ 덕행에 먼저 힘쓸 것이냐 학문에 진력할 것이냐의 논란은 공자의 주요 제자인 자하와 자유의 교육관을 나타낸 자장편 12장에서도 드러난다. 자하의 제자들이 節에 해당하는 灑掃應對進退를 비롯한 인륜 법도 예절에 힘쓰자, 자유는 그것은 공부의 말단이라며 좀더 수준높은 시서육예(文)에 정진할 것을 충고하였다. 이에 원칙주의자인 자하는 곧바로 자하의 말을 반박하였다. ‘군자가 무엇을 더 앞세우고 무엇을 더 먼저 하겠는가?’라며 節과 文에 모두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한편 동서양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에서 큰 차이가 나는데 이는 동서양간에 내재된 세계관의 근본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독교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서양은 모든 것을 선악(善惡)의 관점에서 바라보다보니 매사를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 방식에 익숙하다. 이러한 방식은 사물을분별하는데는 편리하지만 대립과 대결구조를 낳는 병폐가 있다.
반면에 음양오행 이치를 근간으로 삼은 동양은 '克而生, 生而克 (陽과 陰의 관계에서 서로 극하면서 생하게 하며, 생하면서 극함)에서 보듯이, 둘로 나누되 그 둘은 서로 전환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이에 동양은 통합적 사고가 발달되어 있다.
앞에서 質과 文에 대한 이분법적이며 대립적인 해석은 대표적인 서양식 관점이다. 반면에 동양은 결코 質과 文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다.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서로를 고무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학문의 정진(文)과 인격수양(質 : 덕행)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옹야편 16장의 뜻은 타고난 착한 성품(質)을 바탕으로 덕행(節)을 행하면서 文에 대한 진덕수업(進德修業『주역』 건괘)을 통해 인격수양과 학문 에 힘쓰라는 의미이다.
이렇듯 논어의 문장은 귀절마다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상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유학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논어에서 몇 문장 또는 몇 단어만 따로 떼내어 독해하면 경전의 본래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왜곡시키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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