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주 명언 : 정의의 바탕 속에 절제가 겸비된 진정한 노력의 가치를 되새깁니다..◈ [금주 명언] - 知足可樂하고 務貪則憂니라.◆ [독음] - 지족가락 무탐즉우.◆ [한자] - 알지/ 족할 족/ 가할 가/ 즐거울 락// 힘쓸 무/ 탐낼 탐/ 곧 즉/ 근심할 우▶ [출전] - 『明心寶鑑(명심보감)』〈安分篇(안분편)〉◈ [해석] - 만족할 줄 알면 즐거울 수 있고, 탐욕에만 힘쓰면 근심할 것이다..▶ [어구풀이] ☞ 知足可樂(지족가락) : 만족할 줄 알면 즐거울 수 있다는 뜻으로, 분수를 알고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으면 걱정이 없는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단순한 포부가 없는 현실 안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노력과 성취의 원대한 목표 속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발전 지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정당성을 담보하지 못한 욕심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현대적 감각의 바른 해석일 것입니다. ☞ 務貪則憂(무탐즉우) : 탐욕에 힘쓰면 근심할 것이라는 뜻으로, 정당한 노력이 아닌 아집과 집착으로 점철된 탐욕의 방법이라면 끊임없는 욕심의 결과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고금을 막론한 당연한 논조의 가르침이라 할 것입니다.▣ [해설] - 우리 일상에서 통용되는 여러 상식의 논리 가운데는 다소 가치의 왜곡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의 통념들이 있습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인습의 전형에 구속시키고 변화의 가치가 정착되지 못하는 몰가치의 논리 적용을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뱁새가 황새를 쫓다가 가랑이 찢어진다' 등의 속담은 긍정적인 교훈을 논함에도 한편으로 변화와 노력으로 인한 성취의 가치를 억제하고 안주와 정체의 굴레를 씌우고 있다는 비판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점입니다.전통의 정신가치를 바르게 인식하고 재평가하는 노력은 그러한 정신가치가 현대의 사회 정의와 가치 규범 속에 어떠한 영향과 방향으로 작용될 수 있는가 내지는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른 가치 체계 속의 든든한 밑거름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월드컵대회의 준결승까지 오른 우리의 축구 대표팀의 노력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분수를 모르고 욕심을 냈다거나, 그저 운이 좋았다는 식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바로 우리 대표팀의 각고의 노력과 철저한 분석을 통한 준비의 결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세기 동안 5번의 출전에 단 1승도 하지 못했던 팀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외국의 시샘이 나올 정도로 우리 대표팀의 선전은 정당한 노력의 결과였기에 그 가치가 더 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과거 전통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계승은 맹목적 답습으로 박물관의 박제구경과 같은 추종이 아니라,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실 사회의 정의 속에서 절제를 바탕으로 한 부단한 노력과 미래지향적 가치체계의 실천이 밑거름이 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탐욕이 배제된 정당한 노력과 원대한 성취를 위한 정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바로잡아야 할 가치일 것입니다. 그럼 사회 정의의 바탕 속에 절제가 겸비된 진정한 노력의 가치를 다음 명구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 남이 한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에 능하도록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에 능하도록 할 것이니라. [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中庸》] "감사합니다.
102주 명언 : 의지와 노력의 아름다운 과정이 수반된 결과를 위해서...◈ [금주 명언] - 謂學不暇者는 雖暇라도, 亦不能學矣니라.◆ [독음] - 위학불가자 수가 역불능학의.◆ [한자] - 이를 위/ 배울 학/ 아니 불/ 겨를 가/ 놈 자/ 비록 수/ 겨를 가/ 또 역/ 아니 불/ 능할 능/ 배울 학/ 어조사 의▶ [출전] - 『淮南子(회남자)』〈說山訓篇(설산훈편)〉◈ [해석] - 배움에 겨를이 없다고 이르는 자는 비록 겨를이 있을지라도 또한 능히 배우지 않을 것이다..▶ [어구풀이] ☞ 謂學不暇者(위학불가자) : 배움에 겨를이 없다고 이르는 자라는 뜻으로, 학문의 자세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변 요소에 대해 핑계와 전가를 시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雖暇 亦不能學矣(수가 역불능학의) : 비록 겨를이 있더라도 또한 배울 수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수반된 학문 연마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주변 요소가 변하더라도 또 다른 요소에 전가하고 역시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접근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곧 학문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자세가 본질적으로 확고한 자신의 의지와 적극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해설] -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잘 되면 내 탓, 못되면 남 탓'이라는 말을 접하면서, 부정적인 의미를 지적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나 사고 역시 그러한 부분으로 기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된 사고와 사회 병리는 결국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수반된 참된 과정을 겪고 나서 얻어진 값진 결과를 논하는 것보다 출신과 배경 주변의 인맥과 학맥 등의 여부에 따라 왜곡된 결과만을 맹종하는 삐뚤어진 의식을 만들게 되고, 더 나아가 부정과 비리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득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다소 손해까지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자세에 대해 주변에서는 오히려 '왜 그러냐?', '바보 아니냐?'는 식으로 이상하게 여기는 상황을 많이 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그 잘못된 의식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이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면 된다는 식으로 외면과 회피하고 무시한다면 그것 역시 더욱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왜곡된 사고와 천박한 현상이 만연하는 이유를 단순히 바른 심성을 지니지 못한 개인들의 문제로만 돌리기에는 우리 사회가 그리 건강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부각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이러한 점이 더 근본적인 사회 병리 현상의 문제일 것입니다.'평생 동안 남에게 길을 양보해 비켜 간다고 하더라도 그 양보해 비켜준 거리의 합계는 일백 보에 지나지 않을 것[終身讓路 不枉百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부딪히며 살아가는 이웃들은 역시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이웃입니다. 그렇기에 반목과 질시가 아닌 포용과 화합의 정이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결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맹목적 화합과 맹목적 포용은 아닙니다.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심화되고 소외(疏外)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더 큰 시름과 한숨 속에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상황을 외면하고 피상적인 일회성 구호로 화합과 포용을 외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사회 왜곡과 병리를 만드는 결과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는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값진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을 때, 우리 사회의 건강한 가치 척도가 상승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 주변의 비민주적이고 비교육적인 수많은 왜곡된 현상들과 구폐(舊弊)를 극복하고 인정(人情)과 양심(良心)으로 함께 나누고 서로 사랑하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의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감사합니다.
103주 명언 : 수양과 실천의 겸행(兼行)의 아름다운 가치를 기대합니다. ◈ [금주 명언] - 古之學者爲己러니 今之學者爲人이로다.◆ [독음] - 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 [한자] - 옛 고/ 어조사 지/ 배울 학/ 놈 자/ 할 위/ 자기 기// 이제 금/ 어조사 지/ 배울 학/ 놈 자/ 할 위/ 사람 인▶ [출전] - 『論語(논어)』〈憲問篇(헌문편)〉◈ [해석] - 옛날의 배우는 사람은 자기 수양을 위해서 했으나, 지금의 배우는 사람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한다..▶ [어구풀이] ☞ 古之學者爲己(고지학자위기) : 과거의 학자는 자신을 위했다는 뜻으로, 과거의 전형적인 학자의 자세는 지(知)와 덕(德)을 겸비된 올바른 인격을 완성하기 위한 자기 수양의 과정이 학문 수양의 과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실천적 방향으로 진전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학문이라는 것은 지덕과 실천의 조화로운 발전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학문수양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인격수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今之學者爲人(금지학자위인) : 지금의 학자는 남을 위한다는 뜻으로, 지금의 잘못된 학문 풍토는 남에게 알리기 위해서만 학문을 닦는 결과, 헛된 명예와 성취만을 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외적 학문의 자세는 노력하고 있는 듯 하지만, 학문의 사회 정의 실천이라는 진실성이 결여된 이기적인 독단의 학문이고 만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해설] - 학문의 수양이라는 것은 자기 수양을 통한 자아의 실현이라는 길을 닦는 과정으로 정의 내릴 수 있지만, 문제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의 과정이 자기만의 독단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자기 만족의 실현이냐, 아니면 자신의 학문수양의 과정과 그 결실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참여의 일환으로 함께 이루어지느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차이가 이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은 금주의 명언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학문을 탐구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학문 수양의 진정한 가치를 바로 인도하고 유도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기에 바른 학문 수양은 바른 인격수양이 겸비될 때 진정한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보다 더 크게 보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간의 공존과 공유의 가치는 그 사회가 추구하고 이끌어야 할 바른 정의의 가치가 먼저 정착이 되어야 그러한 사회 정의 속에서 구성원의 가치 실현 역시 진정한 가치를 얻게 된다는 점을 금주의 명언이 적절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동체 삶의 바른 사회 정의의 가치가 우리의 전통 속에서 제대로 알고 바로 계승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는 점 역시 되새기고 부각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가 지키고 이루어 나가야 할 사회 정의의 가치는 사회 구성원으로 각 개인이 수양의 과정에서 겸비해야 할 지덕(知德)의 조화로운 수양과 참여를 통한 실천의 가치가 함께 이루어져 나가는 것과 다름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개인의 가치가 사회 정의가 가치와 합치될 때 건강하고 건전한 개인의 가치관과 사회의 가치관이 함께 공유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인색하고, 사회 속에서 나눔과 공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진정한 학문 수양의 과정부터가 '爲己'의 자세가 아닌 '爲人'의 자세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학문자세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공생하는 함께 하는 사회 정의의 가치가 그 바른 위상을 정립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역시 자신의 바른 학문수양의 자세일 때 그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감사합니다..
104주 명언 : 겸양과 포용의 미덕으로 함께 하는 아름다움을 사회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 [금주 명언] - 弟子不必不如師요, 師不必賢於弟子라.◆ [독음] - 제자불필불여사, 사불필현어제자.◆ [한자] - 아우 제/ 아들 자/ 아니 불/ 반드시 필/ 아니 불/ 같을 여/ 스승 사// 스승 사/ 아니 불/ 반드시 필/ 어질 현/ 어조사 어/ 아우 제/ 아들 자▶ [출전] - 『古文眞寶(고문진보)』 韓愈(한유)의〈師說(사설)〉◈ [해석] -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같지 못한 것도 아니고,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한 것만도 아니다.▶ [어구풀이] ☞ 弟子不必不如師(제자불필불여사) :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같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직접적으로 무조건 모든 제자가 스승보다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참된 삶의 가치를 얻은 자는 스승이라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와 삶의 가치를 밝혀줄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면 그 사람 역시 스승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한유가 말한 진정한 師道(사도)는 바로 '師道[도를 스승으로 삼음]'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는 구절입니다.아울러 '不必+[서술어]'의 표현은 구절을 부분 부정으로 표현합니다. '반드시 ~것만은 아니다'로 해석되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부분 부정의 표현입니다. 완전 부정의 경우는 '必不+[서술어]'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예) 鳳鳥必不食死肉 ]☞ 師不必賢於弟子(사불필현어제자) :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으로, 역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단순한 지식이나 나이, 학벌 등으로 편가를 수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면서 진정한 스승의 가치를 인간의 삶의 방향을 바로 설정하는 것이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 [해설] - 우리 사회 구성원간의 관계 체계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상대에 대한 배려와 포용으로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아름다운 관계의 가치보다는 맹목적 권위로 강압과 강요가 앞서는 비윤리적이고 비민주적인 관계 체계가 아직도 만연하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보다 변화와 발전을 위한 가치 체계의 저해요인이자 극복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될 난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건전하고 건강한 사회 정의가 바탕이 바른 권위와 지도의 힘은 사회의 중추적 역할과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맹목적이고 강압적인 아집과 억압은 오히려 사회 구성원간의 조화를 저해하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은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유가 <師說(사설)>에 말한 것처럼, "귀함도 없고 천함도 없으며, 나이의 많고 적음도 없으며, 도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 無貴無賤 無長無少 道之所存 師之所存也 ]"라는 표현은 작금의 편협된 아집과 맹목적 권위의 병폐를 깨뜨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성인이 더욱 성인다워질수록 어리석은 사람은 더욱 더 어리석어진다[ 聖益聖愚益愚 ]'는 안타까운 현실 모순의 지적은 우리들 마음을 다시금 되새기고 다잡을 수 있게 하는데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기능적 실용성만을 맹종하고 정신적 가치 체계를 천대시하는 풍토를 개선하고, 아집과 집착에서 벗어나 함께 배려하고 공유하는 아름다운 사회 정의를 정착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게 실천해야 할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105주 명언 : 바른 자아(自我)로 바른 사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잠언(箴言)을 소개합니다.. ◈ [금주 명언] - 居處恭하며, 執事敬하며, 與人忠하라.◆ [독음] - 거처공, 집사경, 여인충.◆ [한자] - 거할 거/ 곳 처/ 공손할 공// 잡을 집/ 일 사/ 공경할 경// 더불 여/ 사람 인/ 정성 충▶ [출전] - 『論語(논어)』 〈子路篇(자로편)〉◈ [해석] - 평상의 생활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공사(公事)의 일을 맡으면 공경히 신중하게 하며, 남과의 사귐은 정성스레 성실을 다하라..▶ [어구풀이] ☞ 居處恭(거처공) : 평상시에 공손히 하라는 뜻으로, 편안하고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도 항상 언행을 공손하게 하라는 뜻으로, 자신의 바른 마음가짐과 바른 행동으로 올바른 자아를 완성시킬 수 있는 바탕을 이룬다는 의미를 지닌 '修身(수신)'의 개념으로 연결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執事敬(집사경) : 일을 처리함에는 신중히 하라는 뜻으로, 공적인 사회 생활 속에서 사심(私心)이 결부되지 않은 깨끗하고 신중한 일 처리로 항상 정성을 다하는 공경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與人忠(여인충) : 남과 더불어 사귈 때는 정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타인과의 관계 설정은 언제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바탕에서 타인과 협조, 화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해설] - 동양세계에서 유학(儒學)의 본질적 목표로 표현할 수 있는 '修己治人(수기치인)'의 가치에 대한 무수한 연구와 수양법이 존재해 왔다하더라도, 언제나 중요한 기본 가치는 예(禮)와 애(愛)를 바탕으로 하여 자기 완성의 토대 위해 타인과의 조화를 추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자아를 완성시키는 일과 함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를 개선하고 변혁시키려는 일이 상호보완적인 체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한 것입니다..개인적 심성의 수양으로 예의가 바탕이 된 일상생활의 공손한 언행을 표현한 "居處恭"이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 공적 업무 수행에 성의와 정성으로 실천해 나간다는 "執事敬", 또한 항상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바른 결속과 화합을 말하고 있는 "與人忠" 모두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우리 삶의 지표에 핵심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자(孔子) 역시 이러한 덕성의 가치는 어떠한 상황이나 장소에서도 버릴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인 덕목으로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들의 삶의 가치를 보다 윤택하게 해줄 수 값진 경구(警句)와 잠언(箴言)을 접하면서 양심(良心)과 덕성(德性)으로 상식과 정직이 통하는 사회 정의를 되새기는 것은 최소한의 실천일 것입니다.감사합니다.
106주 명언 : 함께 공존하는 진정한 '우리'의 가치를 다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 [금주 명언] - 受享毋踰分外하고, 修爲毋減分中하라.◆ [독음] - 수향무유분외, 수위무감분중.◆ [한자] - 받을 수/ 누릴 향/ 말 무/ 넘을 유/ 나눌 분/ 밖 외// 닦을 수/ 할 위/ 말 무/ 덜 감/ 나눌 분/ 가운데 중▶ [출전] - 『菜根譚(채근담)』 〈前集(전집)〉◈ [해석] - 받아서 누리는 것은 분수 밖에 넘지 말고, 수양해서 실천하는 것은 분수 안으로 줄이지 말라..▶ [어구풀이] ☞ 受享毋踰分外(수향무유분외) : 받아서 누리는 것은 자신의 분수 밖을 넘지 말라는 뜻으로, 자신의 노동이나 노력의 대가로 외적으로 얻어지거나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들은 당연하지만 그 정도와 수준은 언제나 자신의 분수의 범주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탐욕의 폐해를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修爲毋減分中(수위무감분중) : 수양해서 실천하는 것은 자신의 분수 안으로 줄이지 말라는 뜻으로, 학문과 덕행을 닦고 실천하는 자기 수양의 모든 것들은 항상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의 연속이지 한도 안에서 그칠 수 있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해설] - 삶의 욕망(慾望)이라는 것은 영욕(榮辱)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그 명암에 따라 결과의 차이는 크게 나타나는 것을 흔히 봅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강한 동력기처럼 역동적 인생의 추진 역할을 하는 긍정적 가치로 작용할 수 있는 반면에 타락의 나락(奈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극단적 폐해를 안겨줄 수도 있는 부정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과정 속에서 타당하고 적절한 긍정적 요소의 가치를 바르게 실현할 때 값진 인생의 참 맛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만족(滿足)의 정도를 알 수 있는 큰 마음과 정신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학문이나 덕행(德行)을 수양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곧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될 때 그 과정 속의 결실들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자신의 바른 삶의 가치가 만들어져 간다는 것은 타인과 모든 관계들 역시 서로가 함께 공유하고 공존할 수 있는 삶의 토대가 다져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렇기에 금주의 명언은 작은 일례로 보기에는 그 가치가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병폐들 가운데 반드시 우리가 극복해야할 붕괴되고 있는 공동체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은 자신의 바른 삶의 가치를 바로 잡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사로운 이익은 남보다 앞서려 하지말고, 타인에게 베풀어지는 덕행은 남보다 뒤쳐지지 말라.[ 寵利 毋居人前, 德業 毋落人後. 《菜根譚》同句 ]'고 강조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이제는 '우리'라는 단어를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국한하는 식의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건전한 사회 정의가 살아 숨쉬고 그러한 사회정의 속에서 공동체의 참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신이 끊임없는 자기 노력의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맺어지는 결실의 참 맛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생활 자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금주의 명언이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감사합니다.
107주 명언 : 도덕적 의식의 여부는 사회 구성원의 기본 가치임을 확인해 봅니다.. ◈ [금주 명언] - 飽食煖衣하여 逸居而無敎면 則近於禽獸니라.◆ [독음] - 포식난의 일거이무교 칙근어금수.◆ [한자] - 배부를 포/ 먹을 식/ 따뜻할 난/ 옷 의/ 편안할 일/ 살 거/ 말이을 이/ 없을 무/ 가르칠 교/ 곧 즉/ 가가울 근/ 어조사 어/ 짐승 금/ 짐승 수▶ [출전] - 『孟子(맹자)』 〈등文公章句上(등문공장구상)〉◈ [해석] -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면서 편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교육이 없으면 새나 짐승에 가깝다..▶ [어구풀이] ☞ 飽食煖衣(포식난의) :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는다는 뜻으로, 삶에 대한 가치를 물질적인 향락에 맞추어 살아가는 생활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의 해결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만족이나 누릴 수 있는 생활은 언제나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모든 삶의 자세가 물질적 포만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逸居而無敎則近於禽獸(일거이무교 즉근어금수) : 편안하게 살면서도 교육이 없다면 짐승과 가까울 것이라는 뜻으로,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안락한 삶의 가치가 물질적 풍유만으로 정신적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간다면 결국 그 삶은 올바른 가치 부여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삶의 자세와 방향은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본적인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해설] - 한 개인의 삶의 자세는 그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가치를 완성하는 방향으로 실천한다면 자신에게 더 없이 값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원대한 꿈과 포부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과 인고(忍苦)의 과정이 필요한 것 역시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자세가 지나치게 물질적인 풍요로만 치우친다면 보다 건강한 정신적 가치를 조화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의 자세가 최소한의 이타적(利他的) 가치마저 외면하고 지나치게 자신에게만 국한된 이기적 가치라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으로서의 자격마저 위협을 할 것이라는 점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금주의 명언에서 제시하고 있는 맹자(孟子)가 말하고자 했던 금수(禽獸)와 다른 인간만의 도리이자 가치가 교육(敎育)이라는 것을 현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의 완성을 위한 배움의 노력이라고 말한다면, 그 이면에는 두 가지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개인적인 노력과 함께 그 노력이 단순한 물질적 가치나 비도덕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자세는 분명히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도덕적이지 못한 삶의 가치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가는 것을 사회 병폐라고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도덕적 병폐가 만연되고 있다는 점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상류계층이 벌이고 있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이타적이지 못한 숱한 그들의 언행들을 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흔히 수구적(守舊的) 논리만을 외치는 사람들의 입김이 지나친 무게를 지니고 그 힘을 멋대로 휘두르는 사회가 건강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자명하기 때문입니다.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인간의 도리(道理)를 논하는 차원을 넘어 진정한 인간적 가치는 사회 정의를 바로 말할 수 있는 도덕적 관념이 올바로 정립되고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점을 부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감사합니다.
108주 명언 : 자기 성실의 가치가 사회 정의로 확대되는 기반임을 확인해 봅니다.. ◈ [금주 명언] -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하라.◆ [독음] - 시저기이불원 역물시어인.◆ [한자] - 베풀 시/ 어조사 저/ 자기 기/ 말이을 이/ 아니 불/ 원할 원// 또 역/ 말 물/ 베풀 시/ 어조사 어/ 사람 인▶ [출전] - 『中庸(중용)』 〈十三章〉◈ [해석] - 나에게 베풀어져 원치 않는 것을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라..▶ [어구풀이] ☞ 施諸己而不願(시저기이불원) : 자기에게 베풀어서 원치 않다는 뜻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성실함을 실천하기 위한 모든 호악(好惡)의 조건을 모두 내포하기 위한 설정으로 거부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상황을 제시한 것입니다.☞ 亦勿施於人(역물시어인) :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으로, 진정한 개인적 삶의 가치를 완성하는 것은 인간적 도리로 유구하게 이어오는 성실(誠實)함의 실천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완성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설] - 삶의 여정에서 자신에게 맞닥뜨리는 모든 것은 항상 좋거나 기쁜 것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싫고 나쁜 상황을 접했을 때 단지 외면하고 회피하려 남에게 넘긴다면 그것은 역시 자신의 삶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실천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삶의 가치를 올바로 실천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전제된 상태에서 사회의 정의가 바로 서고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각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더라도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한 기본적인 최소한의 공통 공유의 가치는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무수한 사회 병폐를 치유하는 근본적인 바탕 요소가 될 수 있는 그런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안타깝게도 지나친 이기주의에 따른 무관심과 함께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로서의 정의를 논하는 것조차 왜곡과 냉소 속에서 혐오주의를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나 사회 의식 개혁의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활 테두리 안에서도 진정한 정의의 가치는 얼마든지 축적해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자신과 타인이 함께 공유하고 공존할 수 있도록 성실함이 어긋나지 않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가치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옛 성인들이 남긴 명언은 액자 속에서만 음미하고 마는 글귀가 아닌 우리 사회 정의의 기본적인 가치를 간직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금주의 명언이 말하고 있는 충서(忠恕)의 가치 곧 '자신이 싫은 것은 남에게 베풀지 않는 기본적인 성실한 자세'가 지켜질 때 건강한 사회 정의의 가치도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상식이 통하는 세상, 우리 자식들에게 자신 있게 물려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가치와 인생을 완성하는 길과 다름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되새겨 보면서, 이제 우리 모두 '己所不欲勿施於人'합시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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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주 명언 : 삶의 바탕을 강건하게 다져질 수 있는 생활 철학을 기대합니다.. ◈ [금주 명언] - 自天子로 以至於庶人히 壹是皆以修身爲本이니라..◆ [독음] - 자천자 이지어서인 일시개이수신위본.◆ [한자] - 스스로 자/ 하늘 천/ 아들 자/ 써 이/ 이를 지/ 어조사 어/ 많을 서/ 사람 인/ 한 일/ 이 시/ 모두 개/ 써 이/ 닦을 수/ 몸 신/ 할 위/ 근본 본▶ [출전] - 『大學(대학)』〈修身〉◈ [해석] -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修身(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 [어구풀이] ☞ 自天子 以至於庶人(자천자 이지어서인) :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뜻으로, 최고의 권력과 최하의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을 총괄하는 표현입니다. 곧 사람이라면 어떠한 제도적, 인위적 예외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모든 인간을 공통의 범주 안에 끌어들일 수 있는 근거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自∼至∼ : ∼로부터, ∼에 이르기까지☞ 壹是皆以修身爲本(일시개이수신위본) : 일체 모두 수신으로 근본을 삼는다는 뜻으로, 유가(儒家) 사상이 수신(修身)을 정교(政敎)의 근본으로 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의미입니다. 곧 《大學》의 팔조목(八條目)의 제시 가운데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까지가 자신의 심술에 관한 내용이기에 '修身'은 그 근본 바탕이 될 수 있고, 또한 '修身'은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효험까지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설] - 유가(儒家) 사상이 정치와 교육의 근본을 자기 수양(修養)의 가치로 삼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몸을 닦으면 도가 선다[ 修身則道立 ]"는 《중용(中庸)》의 구절에서도 보이듯이 수신(修身)의 가치는 한 개인으로부터 사회와 국가의 모든 근간을 하나의 철학적 체계로 연결된 중추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 체계는 국가의 구심점 역할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적 삶의 방향을 유도하기까지 했기에 중세의 신분질서 체계를 공고하게 하고 그 질서 속에 인신(人身)을 구속했었던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중세 신분제 계급사회의 한계로 인한 문제를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겠지만, 중세의 유가사상이 개인의 삶의 방향에 어떠한 구심적 가치를 제공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현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무가치적이고 무철학적인 사회 병폐와 병리 현상을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엽말단(枝葉末端)적 병폐들은 개인의 삶의 가치를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철학적 가치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조건들 때문일 것입니다. 곧 이기주의와 배금주의에 사로잡힌 개인들과 근시안적인 정책과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의 심화를 야기하는 사회 정의의 부재를 만들어낸 근저에는 바로 건강하고 건전한 가치관과 사회정의를 공고하게 할 수 있는 가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부러워는 해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일확천금을 노리는 배금주의가 팽배해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만을 따지는 사고방식이 무수한 병폐를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렇다면 근본적 가치 철학이 무시된 맹목적 실용성 추구만을 우선시하는 천박한 사회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이제 그 노력의 작은 단초를 찾을 수 있는 우리의 전통 속에 가득 녹아있는 修身, 곧 자기 수양의 바른 실천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그것은 바로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고, 강자보다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기도 합니다.감사합니다.
110주 명언 : 함께 나눌 수 있는 배려와 공유의 가치관을 되새겨 봅니다. ◈ [금주 명언] - 松栢은 可以耐雪霜이요, 明智는 可以涉危難이니라..◆ [독음] - 송백 가이내설상, 명지 가이섭위난.◆ [한자] - 소나무 송/ 잣나무 백/ 가할 가/ 써 이/ 견딜 내/ 눈 설/ 서리 상// 밝을 명/ 지혜 지/ 가할 가/ 써 이/ 건널 섭/ 위험할 위/ 어려울 난▶ [출전] - 『明心寶鑑(명심보감)』〈省心篇(성심편)〉◈ [해석] - 소나무나 잣나무는 눈과 서리를 견디어 내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위태로운 난관을 건널 수 있다..▶ [어구풀이] ☞ 松栢可以耐雪霜(송백 가이내설상) : 소나무와 잣나무는 눈과 서리를 이겨낼 수 있다는 뜻으로, 눈과 서리가 내리는 겨울이 와도 다른 나무들과 달리 푸름을 변치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처럼 군자의 가치를 높여주기 위한 대구의 사용입니다.☞ 明智可以涉危難(명지 가이섭위난) : 밝은 지혜는 위태롭고 어려운 것을 건널 수 있다는 뜻으로, 군자의 굳은 지조와 절개의 힘은 아무리 어려운 역경도 모두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 계층의 선도적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곧 군자의 지조와 절개는 사회의 건전한 가치관과 사회 정의의 형성에 올바른 영향력이 미쳐야 됨을 내포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 [해설] - 사회의 여론을 선도하고 지도계층으로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은 신분제가 엄존(儼存)하던 예나 지금이나 그 존재 가치의 비중은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사회 선도 계층의 역할의 중요성을 반증하기도 하고, 아울러 그 계층에 속한다고 하는 부류의 자각과 분발이 더욱 더 크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작금의 시대에 사회 여론 선도 계층 내지는 사회 지도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부류를 여기서 명확하게 구분해서 규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의 선도, 지도 등의 계층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편견과 분열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삶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한 한 사람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모든 자신의 삶이 우리 사회를 이끌고 선도할 수 있는 개인이자 모두인 것입니다.전통시대의 사회 선도 계층은 신분제의 굴레를 논하기에 앞서 인격의 완성체로 그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 '君子'라는 대상이었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무수한 극찬 및 정의의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君子에 대한 찬미는 작금의 시대에도 그 긍적적 가치는 충분하게 인정되고 작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금주의 명언에서 제시하고 있는 君子의 지조와 절개에 관한 구절은 현대 우리 사회의 몰가치적이고 비철학적인 천박한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삼고자 합니다.<明心寶鑑(명심보감)> 원문에는 금주 명언 구절 앞에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흰 옥을 진흙 속에 던져도 그 빛을 더럽힐 수 없고, 군자는 혼탁한 곳에 갈지라도 그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다. [ 白玉 投於泥塗 不能汚穢其色, 君子 行於濁地 不能染亂其心. ]"위의 글에서는 백옥에 비유된 君子의 가치를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기에, 그 가치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한 편으로 君子라는 존재 자체의 막중한 비중이 무엇보다 전제되어야 그 가치도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대 우리 사회가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외형적 조건이나 형식적 지위로 대별되는 학벌이나 직업의 부류를 갖추고 있다하더라도 그가 지닌 가치관이 진정한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면 그러한 외형적 조건은 한낱 허울 좋은 가면에 불가한 것이라는 것을 쉽게 목격하고 있을 것입니다.아울러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또 다른 소중한 가치는 정녕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사회는 그 누가 만들어주거나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결국 우리가 희망하고 만들어 가야할 우리의 밝은 사회는 우리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정의를 외면하거나 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건전한 가치관과 사회 정서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각자의 노력과 감시가 그 어느 때 보다 크게 요구되고 있다 할 것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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