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주 명언 :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사회는 참여에서부터 시작됨을 확인합니다.◈ [금주 명언] - 蓬生麻中이면 不扶自直하고, 白沙在泥면 與之皆黑이니라..◆ [독음] - 蓬生麻中 不扶自直, 白沙在泥 與之皆黑.◆ [한자] - 쑥 봉/ 날 생/ 삼 마/ 가운데 중/ 아니 불/ 도울 부/ 스스로 자/ 곧을 직// 흰 백/ 모래 사/ 있을 재/ 진흙 니/ 더불 여/ 어조사 지/ 다 개/ 검을 흑▶ [출전] - 『四字小學(사자소학)』〈交友〉◈ [해석] - 쑥이 삼 밭 가운데서 자라면 붙들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곧아지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물들이지 않아도 모두 절로 검게된다.▶ [어구풀이] ☞ 蓬生麻中 不扶自直(봉생마중 불부자직) : 삼 밭 속에서 난 쑥은 도와주지 않아도 절로 곧게 자란다는 뜻으로, 실제 환경요인의 중요성이나 벗과의 교제를 경계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어 온 구절입니다. "近墨者黑 近朱者赤(근묵자흑 근주자적)"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단속하는 용도로부터 건전한 교우관계와 자신의 주변 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용도로 사용해 왔던 것입니다.☞ 白沙在泥 與之皆黑(백사재니 여지개흑):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다면 서로 함께 모두 검어진다는 뜻으로, 역시 재차 환경요인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교우관계의 지침으로 활용되어오던 구절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의지여부와 관계없이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자신의 삶의 자세를 돌아보고 자성(自省)의 가치를 엿볼 수 있는 그런 구절들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설] - 삼천지교(三遷之敎)의 맹모(孟母) 고사로부터 금주의 명언인 마중지봉(麻中之蓬)이나 귤화위지(橘化爲枳), 근묵자흑(近墨者黑) 등 자신이 위치한 삶의 영역과 방향 속에서 환경요인의 중요성에 대한 잠언이나 그에 따른 논지들은 오랜 세월동안 무수하게 다루어왔던 바른 인간형을 만드는 기본적인 척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낱 액자 속의 구절로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삶의 가치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바로 그 잠언의 가치를 너무도 작은 한 방향에서만 바라왔기 때문입니다.이제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긍정적 방향은 분명 과거의 운명적이고 순종적인 모순의 틀을 벗어버리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삶의 척도를 정립하는 작업에 직접 참여해야 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우리 속담도 그래왔듯이 좋은 환경을 찾아 헤매는 맹모(孟母)의 모습이나 강북에서는 귤이 무조건 탱자가 되어버린다는 상황 논리는 언제나 우리 삶의 환경이 이미 선악(善惡)이나 호증(好憎)의 조건으로 무조건 양분되어 맹목적으로 '善'이나 '好'쪽을 동경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거나 나쁜 조건이나 환경을 무시한 체 무조건 좋은 환경만을 찾아 나서는 자세는 결국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크나큰 병폐인 과정보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토를 개선할 수 없는 것입니다.하지만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善'이나 '好'쪽에 속한 부류들의 아집이나 반대쪽 부류들의 맹목적 동경을 깨뜨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적극적 참여로 사회의 기본적인 양심과 정의를 바로 세우고 순간 순간의 과정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맹목적 상향 동경보다는 함께 어우러져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아름다움은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삼 밭 속이 쑥대'가 맹목적으로 삼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쑥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삼이 조금 양보해서 함께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그것이 훨씬 가치 있는 건강한 사회가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112주 명언 : 삶의 바탕을 강건하게 다져질 수 있는 생활 철학을 기대합니다.. ◈ [금주 명언] - 合抱之木은 生於毫末하고, 九層之臺는 起於累土니라..◆ [독음] - 합포지목, 생어호말, 구층지대, 기어루토.◆ [한자] - 합할 합/ 안을 포/ 어조사 지/ 나무 목/ 날 생/ 어조사 어/ 터럭 호/ 끝 말/ 아홉 구/ 계단 층/ 어조사 지/ 누대 대/ 일어날 기/ 어조사 어/ 쌓을 루/ 흙 토▶ [출전] - 『老子(노자)』〈64장〉◈ [해석] - 한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도 털끝 같은 작은 싹에서 시작되고, 구 층이나 되는 높은 누대(樓臺)라도 한줌의 쌓아놓은 흙으로부터 시작된다..▶ [어구풀이] ☞ 合抱之木, 生於毫末(합포지목 생어호말) : 아름드리 나무도 터럭 같은 싹에서 생겨났다는 뜻으로, 나열된 두 번째 예시도 마찬가지로 모두 인간의 욕심과 집착, 고집 등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근본에 대해 생각, 곧 무위(無爲)의 자연(自然)에 순응해야 함을 역설하는 예시로 사용한 것입니다.☞ 九層之臺, 起於累土(구층지대 기어루토) : 구 층의 樓臺라도 한 줌 흙더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으로, 앞 선 예시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되었으며 원문에는 다음 구절 역시 동일한 의미의 예시를 하나 더 들고 있습니다. [ 千里之行 始於足下(천리지행 시어족하): 천리의 먼 길이라 하더라도 발 밑의 한 걸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해설] - 노자(老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가치는 곧 무위(無爲)의 정치(政治)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고집과 집착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욕심을 극복하고 무욕(無慾)과 무위(無爲)의 가치가 실현되는 자연(自然)에 순응하는 삶과 그러한 순수한 정치를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과 부패 속에서 수많은 사회 병리와 병폐가 야기되고 있는 현대 우리 사회상을 돌아보면 노자(老子)가 말하고자 한 무욕(無慾)과 무위(無爲)의 가치는 다시금 되새겨야 할 소중한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병폐들 가운데 특히 학벌 만능과 일류 지향은 단순한 개인 능력의 개발이나 선의의 경쟁이 가져다 주는 긍정적 효과를 넘어서 이제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삶의 가치는 허공 속에 떠도는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까지 치부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러한 맹목적 출세지향과 천박한 실용추구가 가져다 준 삭막한 사회 풍토로 인해 우리가 희망하고 추구하는 아름다운 공동체 삶의 가치가 훼손된다면 그 폐해는 한 두 개인에게 미치는 정도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어두운 앞날이 예고될 것입니다.모두가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의 기반이 공고하고 누구나 인정하고 지켜나가야 할 최소한의 기본적인 사회 정의가 확고할 때, 그 사회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한 두 특출한 개인이 만들어 가는 기형적 사회가 아닌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사회일 것입니다. 소수 사회의 여론을 이끌고 갈 수 있는 계층의 이기적 사고와 행위가 줄어들고,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맹목적 수혜만을 바라는 수동적 삶의 자세를 버릴 때, 진정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는 아주 가깝게 다가올 것입니다.노자가 말한 自然에 순응하는 無爲의 가치가 본래의 바탕과 본래의 상태에 순응하는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본연의 도라는 것은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현재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허망한 피상적 물질을 극복하는 또 다른 접근방법이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감사합니다.
113주 명언 : 개인의 삶의 철학이 건강한 사회 정의의 실현으로 승화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금주 명언] - 終身行善이라도 善猶不足이요, 一日行惡이라도 惡自有餘니라..◆ [독음] - 종신행선 선유부족, 일일행악 악자유여.◆ [한자] - 마칠 종/ 몸 신/ 행할 행/ 선할 선/ 선할 선/ 오히려 유/ 아니 불/ 족할 족// 한 일/ 날 일/ 행할 행/ 악할 악/ 악할 악/ 스스로 자/ 오히려 유/ 남을 여▶ [출전] - 『明心寶鑑(명심보감)』〈繼善篇(계선편)〉◈ [해석] - 한 평생 착한 일을 행하더라도 선행은 오히려 부족하고, 단 하루 악한 일을 행하더라도 악행은 스스로 남음이 있을 것이다.▶ [어구풀이] ☞ 終身行善 善猶不足(종신행선선유부족) : 종신토록 선행을 행하더라도 선은 오히려 부족할 것이라는 뜻으로, 도덕적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일시적인 선행이나 한두 번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근본적인 행실이 보다 선하고 보다 이타적(利他的)인 행동일 때 가능하다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러한 실천은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이 이루어질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一日行惡 惡自有餘(일일행악 악자유여) : 하루 악한 행동을 하더라고 악행은 절로 남음이 있다는 뜻으로, 값진 인생의 가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역시 끊임없는 자기 절제와 자기 반성의 토대 위에서 삶의 가치를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 [해설] - 우리 사회가 지닌 많은 병폐 가운데 특히 전통적 공동체의 삶이 붕괴된 후 나타나는 윤리 도덕적 가치관의 해이는 점차 그 정도가 심화되어 단순히 염려하고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무감각해진 도덕불감증은 양심을 회복하는 수준을 넘어 부끄러워하는 수치심마저 망각한 후안무치(厚顔無恥)하고 파렴치한 행동들이 서슴지 않고 저질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언론을 통해 매일 접하게 되는 환경파괴 행위나 먹거리를 가지고 벌어지는 불법행위 등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새치기나 무단투기 등과 같은 비양심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고 벌이는 사람들의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도덕적 삶의 자세는 한 개인에 한정된 가치로 치부할 수 없듯이 그 사회 기저에 흐르고 있는 사회정의의 수준이나 정도 역시 각 개인들에게 무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건전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의 행실들이 사회의 구성원을 이루고, 사회 역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공동체 의식이 주류를 이루는 건강한 모습이 보일 때 그 사회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미래는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면에서는 아직 우리 사회의 건강의 척도는 만족할 수준이 아닌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요? 무엇이 개인을 건강하고 윤리적인 가치관에서 멀어지게 만든 것일까요? 일시에 한 두 가지로 그 원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멀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일시에 끊어버린 일제 강점기의 굴레와 함께 광복 후 우리 현대사에 점철된 비민주적이고 몰상식적인 행태들, 곧 친일 부역(附逆)자 등 민족의 반역자들이 그 더러운 수족을 아직까지도 당당하게 휘두르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역사에서부터 가까이는 극도의 이기주의로 인해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공동체의 사회 가치의 붕괴가 그 원인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일 것입니다.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의 공동체적 가치관을 회복하고 서로의 배려 속에 모두가 함께 하는 그런 아름다운 사회 정의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금주의 명언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바로 한 평생 삶의 자세가 아름다운 선행(善行)의 축적으로 인해 보다 값진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바른 삶의 자세가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값진 값어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의 건강한 삶의 가치를 충족하기 때문이고, 도덕적 삶의 가치를 인간성의 근본으로 설정하는 것 역시 인생의 여정 속에서 선행(善行)의 축적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금주의 명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감사합니다.
114주 명언 : 구습에서 탈피한 새로운 건강한 가치관의 성립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금주 명언] - 苟日新이어든 日日新하고 又日新하라.◆ [독음] -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한자] - 진실로 구/ 날 일/ 새 신// 날 일/ 날 일/ 새 신// 또 우/ 날 일/ 새 신▶ [출전] - 『大學(대학)』〈2장〉◈ [해석] - 진실로 하루가 새로웠다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어구풀이] ☞ 苟日新(구일신) : '진실로 하루가 새로웠다면'이라는 뜻으로, 구습(舊習)과 구태(舊態)에 안주(安住)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음가짐과 새로운 자세로 실천한 날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삶의 가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와 단초가 되기에 충분하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日日新 又日新(일일신 우일신) :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뜻으로, 아무리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마음가짐과 실천을 하더라도 일회성에 그치는 행동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희망을 바랄 수 없는 것이기에, 끊임없는 실천과 정진의 자세가 뒤따르는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라 할 것입니다.▣ [해설] - 누구나 어떠한 목표를 향해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한 준비와 노력의 과정은 충분히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과정이 단순한 개인적 치부(致富)만을 위한 것이라면 고운 모습으로만 비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 역정 속에서 많은 목표들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단순한 한 개인적인 삶의 과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바른 방향과 일치될 때 진정한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이 자신의 몸을 씻는 그릇에 새겨놓은 일종의 잠언구(箴言句)인 금주의 명언은 유학(儒學)의 본질적 가치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구체적 실천은 역시 명명덕(明明德)의 강령으로 제시된 철저한 자기 수양(修養)의 완성이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지만, 자기완성의 바탕 위에서 사회 정의의 바른 실천이 이루어지는 것이라야 만이 진정한 유학(儒學)의 가치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현대 우리사회의 지식인의 사명과도 같은 대명제를 제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습(舊習)을 벗고 날마다 새로운 마음 자세를 지니는 것이 바로 백성들까지 새롭게 만드는 단서(端緖)가 될 수 있다고 여긴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자세는 중세 암흑기의 시대에서도 위정자(爲政者)의 지위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각인(刻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현대 우리 사회가 양산해내고 있는 수많은 병폐들을 들춰보면, 과연 건강한 사회 정의는 존재하는가하는 의문까지 드는 안타까운 현상들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과 대비해 보면 보다 빠른 치유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고, 그러한 치유책은 결국 바른 가치관이 정립된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길일 것입니다..과거 우리 선조가 실천 가치로 여기던 신독(愼獨)의 수양을 바탕으로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추구해왔던 전통의 값진 유산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원칙과 상식의 범주에서 관용과 포용의 인생 목표를 실천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도 다시 한 번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자세로 실천하는 시간이기를 되새기면서 그것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를 올바로 세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한 것임을 되새겨봅니다.감사합니다.
115주 명언 : 건강한 가치관이 전제된 삶의 자세는 바른 사회관으로부터 시작함을 확인합니다.◈ [금주 명언] - 見善如不及하고, 見不善如探湯하라.◆ [독음] - 견선여불급, 견불선여탐탕.◆ [한자] - 볼 견/ 착할 선/ 같을 여/ 아니 불/ 미칠 급// 볼 견/ 아니 불/ 착할 선/ 같을 여/ 찾을 탐/ 끓일 탕▶ [출전] - 『論語(논어)』〈季氏篇(계씨편)〉◈ [해석] - 선한 것을 보거든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보거든 끓는 물을 만지는 것과 같이 하라.▶ [어구풀이] ☞ 見善如不及(견선여불급) : 선한 것을 보거든 마치 미치지 못하듯 하라는 뜻으로,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끊임없이 그 선행을 실천하면서 바른 선의 가치를 좇아 나가는 마음자세로 중단 없는 삶의 여정과 함께 여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見不善如探湯(견불선여탐탕) : 선하지 못한 것을 보거든 마치 끓는 물에 만지는 것 같이 한다는 뜻으로, 끓는 물에는 손을 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손을 가까이 할 수도 없이 곧바로 빼야 하듯이 잠시의 순간이라도 악행을 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 그러한 악행은 가까이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해설] -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나 인간 군상들이 벌이는 수많은 행위들에 대해 선(善)과 악(惡)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이란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모든 현상과 행위들이 단편적인 하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관계와 이해(利害)의 충돌과 결합 속에서 발생되고 나타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흑백논리(黑白論理)가 횡행하고 피아(彼我)의 구별이 어려운 경우도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선악에 대한 구분과 규정은 자신의 삶의 근간을 형성하는 척도일 뿐만 아니라, 인생 역정에 있어 중요한 가치 판단의 척도가 되기에도 충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선악(善惡)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전재되어야 우리 주변에서 발생되는 현상과 행위들에 대해 호오(好惡: 좋아하고 싫어함)의 결정도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어정쩡한 타협이나 결정, 혹은 판단 유보로 인해 선악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은 우리 사회, 우리 생활 속에서 원칙과 상식이 상실된 모습으로 흔하게 접하게 됩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나 '세상사는 것이 다 그렇다'는 식의 구폐(舊弊)와 구습(舊習)이 가져다 준 유산은 안타깝게도 원칙과 상식이 무너진 건강하지 못한 사회상을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공자(孔子)는 금주의 명언에서 선악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바탕으로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바로 잡는 사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재야에 은퇴해 있으면서도 바른 도리의 가치를 실천하거나, 몸소 참여와 실천 속에서 정의를 사회에 구현하는 사람을 더 큰 가치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 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 (<論語> 同句)] 곧, 금주의 명언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소중한 가치는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사회정의의 정도와 수준을 판단하는 큰 기준으로 삼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원칙과 상식이 무시된 권위주의와 비민주적인 폐해가 오래도록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정작 자신 역시 그러한 권위주의와 비민주적인 작태에 만성적으로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의식으로 자각할 수 있는 자성(自省)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인 것입니다. 더 이상 구습에 물든 낡은 가치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밝고 건강한 가치관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정의가 제자리 잡는 사회를 희망하고 만들기 위해 참여 속에서 실천할 때 우리의 미래는 희망찬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른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정의가 명확한 선악(善惡)의 판단 기준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모두의 바른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감사합니다.
116주 명언 : 화합과 포용의 가치는 자신의 건강한 삶의 자세로부터 나오리라 봅니다.◈ [금주 명언] - 欲量他人이어든, 先須自量하라.◆ [독음] - 욕량타인 선수자량.◆ [한자] - 하고자할 욕/ 헤아릴 량/ 다를 타/ 사람 인// 먼저 선/ 모름지기 수/ 스스로 자/ 헤아릴 량▶ [출전] - 『明心寶鑑(명심보감)』〈正己篇(정기편)〉◈ [해석] - 다른 사람을 헤아려 비평하려거든 먼저 모름지기 자신부터 헤아려 비평하라..▶ [어구풀이] ☞ 欲量他人(욕량타인) :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자 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에 인식하면서도 타인을 비방이나 욕을 하는 것은 쉽게 하는 사회 세태에 비유적으로 대비해 봅니다.☞ 先須自量(선수자량) : 먼저 반드시 스스로를 헤아려 비판해 보라는 뜻으로, 진정한 비판적 가치를 바탕으로 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출발점은 무엇보다 자신의 바른 가치관과 건강한 삶의 자세가 선결되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대비해 봅니다.▣ [해설] - 우리는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의 가치와 정의가 살아있음에 희망을 말하고 밝은 참여의 자세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의 일상을 돌아보면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배려와 칭찬의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비방과 비난이 앞서는 모습들을 쉽게 접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하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금주의 동양명언에서 앞서 이런 구절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 사람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어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비록 총명할지라도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어둡다. [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 곧 자기 반성에 인색한 사람들의 단면을 비판하는 계기로, 다시금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새겨넣어야 할 글귀로 전해옵니다.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글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단순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부정적인 분석보다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가치를 더 올바로 세워야 한다는 당위성을 재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밝고 희망찬 모습일 것입니다. 바로 자성(自省)의 가치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금주의 명언과 함께 말입니다.우리 사회 주변에서는 맹목적 부정과 비방으로 분열과 갈등의 혼탁함을 조장하고 그러한 혼탁함 속에서 허무와 냉소가 만연되게 만드는 더러운 병폐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것은 거창한 정치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기적인 개인의 욕심으로부터도 만연되어 왔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건전한 비판과 함께 건강한 대안이 함께 제시될 때 보다 발전적인 미래지향적 희망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더 이상 맹목적 고집이나 고착적(固着的) 현실 안주로는 희망찬 미래를 보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맹목적 권위나 차별적 인식으로 지속되어 온 잘못된 구습이 극복되고, 정당한 권위와 함께 모두가 공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원칙과 상식이 바로 선 사회 통념이 만들어질 때 보다 밝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그렇게 본다면 조금 더 가까이 바로 나 자신부터 타인을 배려하고 화합할 수 있는 건강한 가치관이 삶의 튼튼한 밑거름이 될 때 밝은 새시대는 훨씬 더 가까이 다가설 것입니다. 물론 더 이상 맹목적 권위가 건전한 비판을 매도하고 왜곡하는 일은 단호하게 배격하고 거부될 때 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합니다.오늘도 다른 사람을 칭찬할 수 있는 여유와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보도록 함께 노력합시다.감사합니다.
117주 명언 : 희망찬 새해 부단한 노력과 정진(精進)의 마음가짐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금주 명언] - 讀書百遍義自見이니라.◆ [독음] - 독서백편의자현.◆ [한자] - 읽을 독/ 글 서/ 일백 백/ 두루 편/ 뜻 의/ 스스로 자/ 나타날 현▶ [출전] - 『三國誌(삼국지)』〈魏志(위지)〉◈ [해석] - 책은 백 번을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구풀이] ☞ 讀書百遍義自見 : '뜻이 어려운 글도 여러 번 반복해서 송독(誦讀)하면 그 문의(文義)를 스스로 깨쳐 알게 된다'는 뜻으로, 특히 왕도(王道)가 없는 학문의 연마와 수양에 있어서는 자신의 노력 여부가 그 결과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見'은 '보다'는 의미는 (견)발음이고 '뵙다', '드러나다', '나타나다' 등은 (현)발음입니다.▣ [해설] - 금주의 명언은 학문 정진의 자세를 되새길 수 있는 유명한 고사를 소개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소망과 희망을 가슴 가득 안고 맞이한 새해에 새로운 마음가짐과 새로운 출발은 또 다른 새로움을 만들거나 내세우는 방식의 외형적인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끌 수 있도록 내실을 돈독하게 다지는 성실한 노력의 자세가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금주의 명언이 내포하고 있는 부단한 노력과 정진의 자세를 되새겨보는 시간이야말로 새해를 맞이하는 화두(話頭)의 하나로 제시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讀書百遍義自見'은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위(魏)나라 사람인 동우(董遇)라는 인물이 당시 항상 수불석권(手不釋卷)하며 학문적 명성을 날렸지만, 동우(董遇)는 자신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내게 배우기보다는 자네 집에서 읽고 또 읽고 하다 보면 자연 뜻을 알게 될 것이네.['讀書百遍義自見']" 라고 할 정도였답니다. 아울러 지나치게 세류(世流)에 영합하는 모습이나 잘못된 관행과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병폐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의 자세가 결국 단순한 개인을 넘어 사회 속에서 건강하게 표출되고 반영될 수 있도록 생활 속의 건강한 삶의 지표를 바로 잡는 것 역시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정진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 맹목적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특히 보다 미래지향적인 꿈과 희망을 지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다시금 마음 속에 되새길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합니다. 바로 "원대한 포부가 없으면 당장 근심에 사로잡힌다."는 의미를 지닌 "人無遠慮 必有近憂. <論語>"입니다. 농부가 풍성한 가을의 수확을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마음과 같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다잡을 수 있는 그런 다짐을 함께 해봅니다.감사합니다..
118주 명언 : 진정한 義로움의 가치관을 체득할 수 있는 의지를 키워야 합니다.◈ [금주 명언] - 人有不爲也而後.에 可以有爲니라.◆ [독음] - 인유불위야이후, 가이유위.◆ [한자] - 사람 인/ 있을 유/ 아니 불/ 할 위/ 어조사 야/ 말이을 이/ 뒤 후// 가할 가/ 써 이/ 있을 유/ 할 위▶ [출전] - 『孟子(맹자)』〈離婁章句下(이루장구하)〉◈ [해석] - 사람은 불의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은 연후에야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구풀이] ☞ 人有不爲也而後 可以有爲(인유불위야이후 가이유위) : 사람은 하지 않음이 있은 연후에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 바르지 못한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춘 후에야 올바른 정의로움을 실천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맹자의 주장 속에는 혼탁한 사회 속에서 진정한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의지가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가치관이 정립된 뒤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기에, 자신의 의지와 실천의 척도는 곧 정의(正義)와 불의(不義)의 구분으로 명확한 기준을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설] - 우리는 가끔 일상에서 매스컴이나 언론 매체를 통해 우리와 같은 평범한 범인(凡人)으로 살아가면서도 주변의 인물들보다 강인한 신념과 확고한 의지로 자신의 삶을 넘어 보다 투명하고 보다 깨끗한 사회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참여하고 실천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접하곤 합니다. 실제로 따뜻한 마음으로 조용히 자원봉사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나 사회 병폐를 들추어내고 바로잡기 위해서 적극적인 참여 활동을 하는 시민들을 예전보다 더 많이 볼 수 있어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한 모습을 되찾고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이 적극 참여를 하지는 못하지만 따뜻한 성원이라도 보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금주의 명언이 제시하고 있는 맹자(孟子)의 주장은 건강한 사회정의(社會正義)의 척도는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가짐 속에 진정으로 올바름을 체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의지가 바로 정립되어 있는가를 되새기는 일일 것입니다.맹자(孟子)는 진정으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이 옳고 바른 것을 가려서 선택할 줄 알게 된다면 불의(不義)와 부정(不正)에 눈감거나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뒤라면 진정 바른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결국 올바름을 가려서 선택할 수 있는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바로 정립하는 것이 바른 삶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입니다.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맹자(孟子)가 살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가 만연된 사회 구조 속이었기 때문에 맹자의 정의(正義)의 외침은 보다 더 강하게 외치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은 정의와 불의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거나 삶의 가치 척도의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에 그 주장과 실천의 가치는 모호하게 변질될 가능성이 많습니다.실제 만연된 사회의 비리나 비민주적 작태를 관행이란 명목으로 덮어 외면하거나 적당주의와 결과만능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폐해는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잘못에 대해서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너그러운 우리 현실을 보면 아직도 개선되고 정립되어야 할 사회 정의의 가치는 재론과 강조의 여지가 충분할 것입니다.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우리가 지향하고 나아가야 할 바른 정의의 가치는 '평범한 국민이 주인되는 그런 바탕 속에서 모두에게, 모두 함께, 모두를 위하는' 그런 정의의 가치를 정립하기 위해 자신의 강한 의지와 신념을 세우는 일일 것입니다.감사합니다..
119주 명언 : 공동체적 가치관으로 바른 사회 참여가 실천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금주 명언] - 有德者必有言이어니와, 有言者不必有德이니라.◆ [독음] - 유덕자필유언, 유언자불필유덕.◆ [한자] - 있을 유/ 덕 덕/ 놈 자/ 반드시 필/ 있을 유/ 말씀 언// 있을 유/ 말씀 언/ 놈 자/ 아니 불/ 반드시 필/ 있을 유/ 덕 덕▶ [출전] - 『論語(논어)』〈憲問篇(헌문편)〉◈ [해석] -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올바른 말을 하지만,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덕이 있는 것만은 아니라..▶ [어구풀이] ☞ 有德者必有言(유덕자필유언) :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바른 말은 한다는 뜻으로, 바른 덕성(德性)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올바른 정신을 바탕으로 인(仁)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바른 실천 행위가 뒤따르는 속에서 표현되는 언변(言辯) 역시 올바른 말을 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결국 언행일치의 바른 행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고 그러한 올바른 가치관을 실천에 옮기는 말과 행동은 올바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有言者不必有德(유언자불필유덕) :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반드시 덕이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으로, 앞서 강조되었듯이 실천이 바탕이 된 올바른 덕성(德性)의 표현 속에서 나오는 언변(言辯)은 항상 바른 가치를 내포하고 있지만, 본말(本末)이 전도(顚倒) 상태까지 말 자체에 올바른 인도(仁道)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언변이라는 것은 근본이 내재되어 있지 않아 한갓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해설] -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표현은 예나 지금이나 강한 교훈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은 자명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실천에 옮겨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특히 과거의 유가적(儒家的) 세계관이 지배하던 전통사회 속에서의 言行一致의 가치는 인간의 기본적인 실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금주의 명언에서 주장하는 덕성(德性)의 가치를 실현하는 위한 바른 언행과 바른 실천의 자세는 역시 고금을 막론하고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할 수 있습니다.유가(儒家)의 가치 덕목 가운데 특히 올바른 덕성(德性)이 내재된 인도(仁道)를 체득(體得)하고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이루어내는 인(仁)의 가치[ 殺身而成仁 ]'이기 때문에 그 강한 실천력과 행동력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강한 실천력은 자연스럽게 강인한 용기를 수반하게 되는데, 이러한 용기 역시 맹목적인 만용(蠻勇)과는 달리 진정한 인도(仁道)의 바탕 속에서 나온 참된 용기라는 것이 공자(孔子)의 주장입니다.[ "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 " ]우리 주변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기만 하려고 하지 그러한 주장과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사회 규범에 반하는 상황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에 대해서는 다소 미흡한 상황을 쉽게 목격하고 경험합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길은 거창한 구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언행이 바른 덕성(德性)의 가치에 어긋나는 지의 여부를 먼저 살피고 되새기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지식을 쌓는 것과 올바른 정신과 참된 용기 등이 함께 쌓여져 갈 때 올바른 사회성을 갖춘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건강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로 넘치는 사회를 기원합니다..감사합니다.
120주 명언 : 知足의 가치에서 아름다운 사회의 희망을 엿봅니다.◈ [금주 명언] - 禍莫大於不知足하고, 咎莫大於欲得이니라.◆ [독음] - 화막대어부지족 구막대어욕득.◆ [한자] - 재앙 화/ 없을 막/ 큰 대/ 어조사 어/ 아니 불/ 알지/ 족할 족// 허물 구/ 없을 막/ 큰 대/ 어조사 어/ 하고자할 욕/ 얻을 득▶ [출전] - 『老子(노자)』〈46장〉◈ [해석] - 재앙은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허물은 끝없이 얻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어구풀이] ☞ 禍莫大於不知足(화막대어부지족) : 재앙은 만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뜻으로, 고대 당시의 전란과 혼돈의 시대상 속에 위정자의 입장을 내포한 표현이지만, 만족을 아는 知足(지족)의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절대 선의 가치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분수를 모르고 만족을 모르고 끝임 없는 욕심과 욕망 속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폐해와 재앙의 결과는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의 가치를 고귀하게 만드는 척도로 여겨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咎莫大於欲得(구막대어욕득) : 허물은 얻어 가지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뜻으로, 역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내용인데, 성취와 성장의 개념이 아닌 과욕과 탐욕의 허물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차원에서 성취하는 노력과 탐욕으로 빼앗으려는 욕심의 차이와 구별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해설] - "만족한 것을 아는 만족은 언제나 만족한다. [ 知足之足 常足 (老子, 同章) ]"이는 노자(老子)가 말한 지족(知足)의 가치로 얻어지는 무욕(無慾)의 정의를 역설한 내용입니다. 바로 금주의 명언에서 되새겨 얻어야 하는 결론인 것입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며 그것에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그 사람은 항상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속세의 굴레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인 것입니다.인간의 역사 속에서 무수한 전쟁, 그로 인한 파괴와 살상, 기아(飢餓)의 참혹함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인간의 탐욕(貪慾)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주장은 반론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생활 범주를 넘어 사회, 국가, 인류의 모든 진행 방향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이어져 온 무욕(無慾)과 지족(知足)의 정의는 역사와 사상을 막론하고 항상 그 값어치를 잃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전쟁의 참혹함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회 병폐의 원인 역시 근본적으로 과욕과 탐욕으로 나오는 것은 자명합니다. 더욱이 한 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이 높은 분야와 그 분야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양태들은 그리 건강하고 건전하지 못한 일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의 심화는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삶의 의욕까지 꺾는 일이기에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전반이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이 조성될 수 있도록 모두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사회 전반의 인식과 의식이 건전한 가치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사회 정의의 바른 정착을 위한 일은 타인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바른 인식과 참여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것 역시 자명합니다.아울러 우리는 항상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해주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들이 생소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그려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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