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집

오늘의명언180-185

ria530 2012. 12. 4. 15:54

181번째 명언 : 배려와 관용의 바른 사회정의가 우선시 될 수 있도록...[금주 명언] - 禁未然之前이요, 施已然之後니라.[독음] - 예 금미연지전, 법 시이연지후.[한자] - 예절 례/ 금할 금/ 아닐 미/ 그럴 연/ 어조사 지/ 앞 전// 법 법/ 베풀 시/ 이미 이/ 그럴 연/ 어조사 지/ 뒤 후[출전] - 史記(사기)』 《太史公自序(태사공자서)[해석] - 예의는 발생하기 이전에 금지하는 것이고, 법은 이미 발생한 이후에 처벌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자서에서 <사기>를 저술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春秋>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春秋>는 예의(禮義)의 대종(大宗)’이라 칭하면서, 예의와 법치의 상관관계를 논하고 역사를 통한 도덕적 심판과 함께 미래에 대한 교훈적 가치를 다룬 내용의 일부입니다. }[해설] - 교수 사회에서 올 한 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사자성어로 '旁岐曲逕(방기곡경)'을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샛길과 굽은 길의 의미인 '旁岐曲逕'은 정당하고 순탄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고 그릇되고 왜곡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하는 것을 비유합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특히 위정자들의 왜곡된 행태를 힐난하는 의미에서 선정되었다고 하니, 완력과 독단으로 갈등과 알력을 조장하고 있는 세태에 대한 시의적절한 성어가 아닌가 합니다.작금의 우리 사회는 법치만능의 통치를 현실론으로 정당화하며 당당하게 여기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 교묘한 법망의 회피를 통한 부의 축적을 정당한 재산형성으로 자랑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현상을 비판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왜곡된 현상을 개선할 수 있는 바탕에서 금주의 명언이 작용하길 바래봅니다. 이는 공정함이 바탕이 된 도덕적 평가가 일벌백계 중심의 처벌만능의 법보다 우선시될 수 있는 사회의 건강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예의와 법치의 실천성에 대해 법이 시행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으나, 예의가 금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法之所爲用者易見, 而禮之所爲禁者難知. <同文>]’라고 이어갑니다. 그만큼 예의 인식이나 실천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우리가 지난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도덕적 교훈이나 현실을 넘어선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사회적 건강도의 척도는 상식과 원칙이 바로 설 수 있는 사회정의의 정도일 것입니다. 결국 올바른 사회정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법 이전에 배려와 관용의 상식이 바탕이 된 정도(正道)를 바르게 인식할 때, 아집과 독단이 만연한 우리 사회의 부도덕성도 함께 치유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것입니다.감사합니다.

 

[금주 명언] - 道吾善者, 是吾賊이요, 道吾惡者, 是吾師니라.[독음] - 도오선자, 시오적, 도오악자, 시오사.[한자] - 말할 도 / 나 오 / 선할 선 / 놈 자 / 이 시 / 나 오 / 도적 적 // 말할 도 / 나 오 / 악할 악 / 놈 자 / 이 시 / 나 오 / 스승 사[출전] - 明心寶鑑(명심보감)』 《正己篇(정기편)[해석] - 나의 좋은 점을 말하는 사람은 나를 해치는 이요, 나의 나쁜 점을 말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니라.道吾善者(도오선자) : 나의 선을 말하는 자라는 뜻으로, ‘는 서술어로 말하다는 의미입니다. [) 報道(보도) ][해설] - 늘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려는 노력과 함께 타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德目(덕목)들은 재론을 거듭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자신에 대한 충고와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자기 修養(수양)의 노력과 경지는 언제나 處世(처세)의 이상적 話頭(화두)임에 분명합니다. 더욱이 작은 글귀 한 구절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名言으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치 있는 의미를 지닌 글귀라 하더라도 그저 액자 속에 쓰인 멋진 예술품 정도로 인식되고 만다면, 이 또한 퇴색해버린 口頭禪(구두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금주의 명언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은 고금을 관통할 수 있는 보편적 價値(가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일면 食傷(식상)하더라도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가치는 충분합니다. 과거 爲政者(위정자)로부터 庶人(서인)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素養(소양)으로 전해오면서 무한하리만큼 수양의 본질에 대한 공고한 위치를 점유해 왔습니다. 물론 누구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과찬(過讚)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 그 경계도 모호할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남을 비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자기 수양의 노력과 함께 타인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자기 연마의 단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함은 당연합니다.또한 모두가 빼어나려 하면 누구도 빼어날 수 없습니다. 慾心(욕심)으로부터 야기되는 수많은 병폐들에 대해서도 덜어내고 버릴 줄 아는 수양이 필요합니다. 집착과 고집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수양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莊子(장자) 역시 고집과 집착의 병폐를 이렇게 말합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모두 남들이 자기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남들이 자기와 다른 것을 싫어한다. 자기와 같으면 이것을 바라고 자기와 다르면 바라지 않는 것은 뭇사람들 보다 뛰어난 것으로 마음을 삼은 것이다. ” [ 世俗之人, 皆喜人之同乎己, 而惡人之異於己也. 同於己而欲之, 異於己而不欲者, 以出乎衆爲心也. 莊子在宥篇]자신을 낮추고 덜어낸 만큼 또 다시 새로운 것이 채워집니다. 맹목적 비교와 경쟁이 나눔과 배려보다 우선시되고 우월하게 취급되는 안타까운 우리 사회의 천박한 모습을 치유할 수 있는 일은 무엇보다 욕심을 버리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그런 사회 풍토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천박성을 희석시켜 진정한 國格(국격)’을 높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합니다.감사합니다.

 

[금주 명언] - 父母敎而不學이면, 是子不愛其身也, 雖學而不勤이면, 是亦不愛其身也.[독음] - 부모교이불학, 시자불애기신야, 수학이불근, 시역불애기신야.[한자] - 아비 부 / 어미 모 / 가르칠 교 / 말이을 이 / 아니 불 / 배울 학 // 이 시 / 아들 자 / 아니 불 / 사랑할 애 / 그 기 / 몸 신 / 어조사 야 // 비록 수 / 배울 학 / 말이을 이 / 아니 불 / 부지런할 근 // 이 시 / 또 역 / 아니 불 / 사랑할 애 / 그 기 / 몸 신 / 어조사 야 [출전] - 古文眞寶(고문진보)』 《勸學文(권학문)[해석] - 부모가 가르치는데 배우지 않는다면, 이는 자식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비록 배운다 하더라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는 또한 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雖學而不勤(수학이불근) : 비록 배운다 하더라도 부지런하지 않다는 뜻으로, ‘비록 ~할지라도로 쓰이는 가정형 부사의 의미입니다.[해설] - 자식을 위한 우리 부모들의 정성은 지고지순(至高至純)하다 할 정도로 거의 맹목적인 사랑으로까지 표현하곤 합니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공동체의식과 다소 역행하는 왜곡된 현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높은 교육열과 치맛바람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고착화되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겠지요. 물론 상식과 원칙이 중심에서 지켜지는 그런 건강한 사회 정의가 전제되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한 사회 정의의 유지와 동일선상에서 함께 다루어져야 할 관건이 바로 끊임없는 자기 노력의 과정임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금주의 명언은 북송시대(北宋時代) 대표적 사인(詞人)인 유영(柳永)이 지은 勸學文(권학문)속의 구절로 古文眞寶(고문진보)에서 출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래의 첫구절에 이어 나오고 있습니다.부모가 자식을 기르면서 가르치지 않으면, 이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비록 가르치더라도 엄하지 않으면, 이 또한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父母養其子而不敎, 是不愛其子也, 雖敎而不嚴, 是亦不愛其子也. 勸學文]"위의 글 속에서도 늘 기본적인 전통적인 가치로 다루어지는 부모의 자세를 말하고 있지만, 역시 父爲子綱(부위자강)’이 지닌 모범적인 부모의 자세를 먼저 정립해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금주 명언] - 窮則獨善其身하고, 達則兼善天下니라.[독음] - 궁즉독선기신, 달즉겸선천하.[한자] - 궁할 궁 / 곧 즉 / 홀로 독 / 선할 선 / 그 기 / 몸 신 // 통달할 달 / 곧 즉 / 겸할 겸 / 선할 선 / 하늘 천 / 아래 하[출전] - 孟子(맹자)』 《盡心章句上(진심장구상)[해석] - 궁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한다.[해설] 높은 이상과 고결한 삶의 가치를 견지한 값진 인생을 살아갔던 전통사회의 선비들의 가치를 현재의 우리들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물질적 가치가 삶의 척도가 되어버린 세류에 홀로 독야청청할 수 있는 굳은 의지를 유지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삶의 굴곡 속에서 궁할 때와 달할 때를 알고 대처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맹자가 말하는 금주의 명언은 삶의 여정 속에서 뜻을 얻어 영달하게 되었을 때와 뜻을 잃어 궁색해졌을 때의 마음과 정신의 중심 척도를 명확하게 제시해주고 있어, 소중한 인생의 방향타를 설정할 수 있는 값진 교훈을 얻게 해 줍니다.反求諸己하는 삶의 자세는 부족함을 채우며 자기 완성을 이룰 수 있는 동력을 일으키는 원천이 되기에 자신을 수양하는 힘을 얻게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미 영달한 상태라면 우리와 사회를 건강하고 넉넉하게 이끌 수 있는 값진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이 역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보다 건전하고 가치 있는 삶의 자세는 편협된 자신을 버리고 보다 폭넓은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실천으로부터 가능하리라 봅니다. 이것이 바로 獨善其善을 말한 맹자의 본의를 옳게 실천하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감사합니다.

 

185번째 명언 : 다시금 反求諸己(반구저기)의 가치를 되새겨 보는 계기를 마련합니다.[금주 명언] - 見善如己出하고, 見惡如己病하라.[독음] - 견선여기출, 견악여기병.[한자] - 볼 견/ 착할 선/ 같을 여/ 몸 기/ 날 출// 볼 견/ 악할 악/ 같을 여/ 몸 기/ 병 병[출전] - 小學(소학)』 《嘉言篇(가언편)[해석] - 선을 보면 자신이 주도하는 일처럼 열심히 하고, 악을 보면 자신의 병처럼 여겨 빨리 고쳐라.見善如己出(견선여기출) : ‘선을 보면 마치 나에게서 나온 것 같이 하라는 뜻으로, 의롭고 올바른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접할 때는 마치 자신의 주도해서 처리하는 일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見惡如己病(견악여기병) : ‘악을 보면 마치 나에게 병이 있는 것 같이 하라는 뜻으로, 불의나 부정한 것을 접할 때는 마치 자기에게 병이 생겨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듯 적극적으로 대처하라는 의미입니다.[해설] - 근자에 이 세상엔 완벽한 것이 없다. 그러니 지나치게 지적하지 말라는 일종의 자기 체면과 같은 논리의 주장을 접하곤 합니다. 중세의 면죄부가 연상되리만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나 봉합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용서와 화해를 바탕으로 한 포용과 자기변명에 사로잡힌 방어 수단으로 일방적 봉합을 하려는 것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특히 일부 여론 주도층에서 작은 선행은 針小棒大(침소봉대) 하듯 과시와 선전을 하면서 큰 악행은 관행과 실수로 봉합하는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무뎌지고 무감각해져 있기도 하지만, 근자엔 이보다 더 심각하게 악행을 정당화하고 일반화하려는 주장들까지 난무한 것을 보면 단순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넘어 불감증의 풍토가 만연해 있다고 할 것입니다.금주의 명언은 앞서 다루었던 <小學>의 내용 속에 송()나라 정이천(程伊川)의 제자인 장역(張繹) 선생의 좌우명(座右銘)중 한 구절입니다. 언행과 행실 등 14가지의 실천 덕목을 좌우명으로 삼고 머리맡에 써 붙이고 늘 경계했던 것들입니다. 선과 악은 우리의 일상에서는 복잡하게 혼재되어 우리의 이목을 가리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악의 규정과 구별은 절대적이리만큼 명확해야 그것을 인식하는 판단과 실천하는 자세가 분명해지고 그래야 보다 건강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가 가려지고 판단의 오류가 발생되는 바탕에는 보다 명확한 사회정의의 가치가 부재한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온정적인 대처가 자칫 묵인과 외면으로 일반화되면서 불감증을 가속화시키지 않도록 모두의 자성(自省)과 자경(自警)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자성과 자경의 출발은 역시 자기로부터 근원을 찾는 反求諸己(반구저기)’로부터 시작해야 함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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