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스크랩] 도덕경-6, 제3장 ― `현(賢)`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쉬어라

ria530 2013. 5. 6. 09:03

도덕경-6, 제3장 ― '현(賢)'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쉬어라

3장 ― '현(賢)'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쉬어라



       不尙賢, 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불쟁)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불견가욕 사민심불난)
    是以聖人之治, (시이성인지치)
    虛其心, 實其腹, (허기심 실기복)
    弱其志, 强其骨, (약기지 강기골)
    常使民無知無欲, (상사민무지무욕)
    使夫知者不敢爲也. (사부지자불감위야)
    爲無爲則無不治. (위무위즉무불치)

    尙―높일 상, 숭상할 상, 오히려 상, 賢―어질 현, 使―하여금 사, 부릴 사, 가령 사, 爭―다툴 쟁, 貨―재화 화, 盜―도둑 도, 훔칠 도, 亂―어지러울 란, 腹―배 복, 骨―뼈 골, 敢―감히 감, 也―어조사 야, 則―곧 즉, 법칙 칙

  해석:
    '현(賢)'을 높이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둑이 되지 않으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히 하며,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무릇 안다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나서지 못하게 한다.
    무위(無爲)하니, 다스려지지 않는 바가 없구나. 

    < 뜻풀이 >
    이 장(章)은 일반적으로 노자가 통치자의 윤리를 밝혀놓은 장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다스리는 자가 어짊(賢)이나 현자(賢者)를 높이고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도 각자 자신만의 존재와 삶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어 다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 뿐 다투지 않게 되고, 또한 임금이 먼저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겨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백성들도 그 마음을 본받아 스스로 도심(盜心)을 버리게 되며, 다스리는 자가 그 마음을 비워 욕심낼 만한 것을 눈에 띄게 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도 저절로 안정이 되고 질서가 잡혀 어지럽지 않게 된다……" 등으로 푼다. 그래서 치자(治者)가 먼저 모범을 보이고 청렴하면 백성들도 그를 본받아 온 나라가 태평(太平)하게 되니, 모름지기 다스리는 자는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읽어도 맞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읽으면 이 장(章)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나' ― 우리 각자 자신 ―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글이 되고, 따라서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의(眞義)를 크게 놓쳐버리고 만다. 경전(經典) ― 이 도덕경(道德經)을 포함하여 성경이나 불경(佛經), 논어(論語) 등등 ― 은 그렇게 읽어서는 안된다. 경전은 전적으로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마음'에 관해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경전에 나오는 어떤 글들도 다 '나'를 두고 한 말이지,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직접적이고도 실제적인 관련이 없는 글은 적어도 경전 속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심불반조(心不反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라 하지 않던가? 마음을 돌이켜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않으면 경(經)을 읽음이 무익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눈은 책을 향하되 마음으로는 자기 자신을 봐야 한다. 그랬을 때 경전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나'를 밝히는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덕경도 결국 '마음 밝히는 책'이다.

    나는 이러한 맥락으로 이 3장을 풀고 싶다. 어떻게? 다만 우리 자신 안으로, 우리 내면으로 들어가 이 글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뜻밖에도 이 3장은 우리를 진리(眞理)에로, 자유에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된다. 사실 이 3장이, 특히 맨 처음의 '불상현(不尙賢)'이라는 세 글자가 이후 81장까지의 도덕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核)이다.

    그리하여 이 '불상현(不尙賢)'의 참뜻이 우리 자신과 삶 속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그때 우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존재의 비약(飛躍)이 와 마침내 우리 영혼에는 쉼이, 우리 삶 속에는 평화가 깃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생(生)의 모든 방황과 메마름과 갈증이 영원히 끝이 나고, 마침내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므로 이제 이 3장을 읽어나감에 있어 '불상현(不尙賢)'의 참뜻이 곧바로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한 번 읽어보자.

    "不尙賢 使民不爭(현賢을 높이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되고)……"로 시작되는 이 3장을 우리 안으로 가져가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읽었을 때, 그러면 치자(治者)는 '나' ― 우리 각자 자신 ― 가 되고, 백성은 '내 안의 백성'이 된다. 내 안에도 '백성'들이 참 많은 것이다. 이를테면 미움, 짜증, 분노, 게으름, 기쁨, 슬픔, 불안, 교활함, 이기심 등등 이름하여 오욕칠정(五慾七情)이라 불리기도 하고 번뇌(煩惱)라고도 하는 '내 안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이 글을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읽었을 때, 그러면 불상현(不尙賢)의 '현(賢)'은 '나' 밖(外)에 있는 어떤 어진 사람이나 현자(賢者)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내 안의 백성들 가운데 <∼보다 나은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우리의 내면은 언제나 둘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부족하고 못난 자신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면에 있어서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남들로부터 비난이나 욕을 듣기보다는 인정과 칭찬을 듣기를 원하며, 게으르기보다는 성실하고 싶고, 무지(無知)보다는 지혜를, 너무나 쉽게 분노하고 짜증내면서 작은 이기(利己)에 매달리는 작디작은 자신보다는 넉넉하고 여유로우며 가슴이 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만큼 미움보다는 사랑을, 회의(懷疑)보다는 확신을, 번뇌(煩惱)보다는 보리(菩提)를, 중생(衆生)보다는 부처[깨달음]를 우리는 내면 깊이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족하고 못난 현재의 자신보다는 미래의 보다 더 나은 '나' ― 이것이 내가 말하는 '현(賢)'의 의미이다 ― 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노력과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또한 마땅히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만이 진정 인생을 참답게 사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노력과 관심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가)         (나)
    게으름 → 성실함
    불안 → 당당함
    무지 → 지혜
    미움 → 사랑
    분노·짜증 → 자비로운 마음
    이기(利己) → 이타(利他)
    부족 → 완전함
    번뇌(煩惱) → 보리(菩提)
    중생(衆生) → 부처[깨달음]
    죄인 → 의인
    지금 여기 → 미래

    그렇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가)보다는 (나)가 더 나아 보인다. 그래서 삶의 매 순간 언제나 (가)보다는 (나)를 더 높이면서, 또한 (나)에 자신의 삶의 많은 의미와 가치와 무게를 부여하면서 (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오직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과 삶의 가치를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자기완성에로 나아가 진정한 자유에로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서 말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삶의 방식과 방향은 언제나 '상현(尙賢)'의 형태를 띤다. 그렇지 않은가?

    아아, 그러나 그 일이 마음먹은 대로 그리 잘 되던가? 타는 목마름으로 (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발을 동동거리며 몸부림쳐 보지만, 그 애틋함 만큼이나 다시 목마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와 '쉼'이 문득 찾아와 주던가?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결국 채워져 있지 않는 자신의 내면의 갈증과 아픔만을 거듭 거듭 목격하게 되지 않던가? 아아, 그리하여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존재의 이 분열감(分裂感)과 '쉼' 없는 영혼의 갈증이여―!

    그러나, 보라! 불상현(不尙賢)! 여기에 길[道]이 있다! 삶의 깊디깊은 방황과 그 모든 허허로움에 종지부를 찍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상현(不尙賢)! '현(賢)'하려 하지 말라! 이젠 제발 '현(賢)'하고자 하는, 즉 (가)를 버리고 (나)에로 가려고만 하는 그 마음을 쉬어라! 우리는 언제나 그와 같이 '상현(尙賢)'을 통하여 삶의 완성에로 나아가려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현(賢)하고자 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간절하게 그것을 원한다 할지라도 결단코 그 자리에 갈 수가 없다. <현(賢)하려 하는 한> 우리는 결코 현(賢)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바 ― 자기완성, 깨달음, 진정한 자유 등. 이름하여 '현(賢)' ― 를 이루어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대, 현(賢)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賢)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不尙賢]! 현(賢)하고자 해서는 결단코 그 자리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내면 깊이 이해하고, (나)를 향해 가던 그 발걸음을 (가)에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 곧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다①. 믿기지 않겠지만, 진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 곧 (가)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①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이다. '회개'란 울고 불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3:2) 라고.

    우리가 그토록 찾고 목말라 하는 참된 자유와 행복, 진정한 자기완성[眞我], 완전한 깨달음이란 저기, '나' 밖(外) 어딘가에, 더구나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는 미래의 언젠가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뜻밖에도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이 자리, 우리가 진리와 깨달음과 온전함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하는 바로 그 자리, 그리하여 너무나도 부족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이 '나'와 '현재' 속에 온전하고도 올올이 있다.

    따라서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대) 우리가 진리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함으로써 진리에 이르려는 그 한 마음만 쉬어라. 그러면 바로 그때 우리에게는 전혀 뜻밖의 존재의 비약과 해방(解放)이 와, '나'를 포함하여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진리의 자리요, 어느 자리인들 진리 아님이 없음을 알게 된다. 진리는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음을 알게 되어 비로소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작 버려야 할 것은 (가)가 아니라 바로 (나)이다! (나)는 온갖 욕망과 두려움과 '군림(君臨)에의 욕구'가 짜깁기해 만들어놓은 허구(虛構)일 뿐이다.


출처 : 전주향교(全州鄕校)
글쓴이 : 鶴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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