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3장에서 뱀의 유혹을 받고 있는 하와에게서는 약간 다르게 대답되어 나온다. 즉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와에게서는 어느새 "죽을까 하노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참 미묘한 차이이지만,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뱀이 유혹해 들어온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그렇듯 우리 '내면의 뱀' 곧 우리의 '생각[思考]'과 '마음'은 빈틈없이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너무나 그럴듯한 모양으로 우리를 집어삼켜 버린다.
보라, 뱀이 뭐라고 대답하느냐 하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고! 햐―! 그러니,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가 없는 것이다. 그 너무도 확신에 찬 뱀의 말을 듣고 하와가 문득 선악과를 봤을 때,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하와의 눈에 들어온다. 정말 그것을 먹는 날에는 뱀의 말대로 자신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 같이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와는 망설임 없이, 어쩌면 커다란 기대와 설렘마저 갖고서 그것을 따먹는다.
아아, 그런데 '상현(尙賢)'에의 욕구로 가득 찬 우리 눈에도 앞에서 말한 (가)보다는 (나)쪽이 얼마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가! 그래서 얼마나 (나)를 열망하며 (나)의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가! 뿐만 아니라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말로 유혹했을 때 그들이 망설이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었듯이, 우리도 똑같이 우리 '내면의 뱀'에 속아 "내가 (나)에 이르러 (나)의 사람이 되는 날에는 내 눈이 밝아 마침내 자유하리라……"라며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가)를 떠나 (나)에로 가고 있는가!
이 '태초'의 얘기가 얼마나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흡사한가!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던가? 정말 뱀의 말처럼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존재의 비약(飛躍)이 왔던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눈에 비친 것과는 정반대의 삶이 갑자기 그들 앞에 펼쳐져 버렸다!
보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맨처음 보인 반응은 자신들의 벗었음을 알고 부끄러워하며, 두려워하고,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 자신들을 가리고, 또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다. 오, 이런! 갑자기 인간은 당당해지기는커녕 너무나 초라하고 궁색해져 버렸다! 이는 뱀의 유혹을 받기 전인 창세기 2장 마지막 절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2:25)라고 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것은 정확히 (가)를 떠나 (나)에로 가려고 하는 동안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이 아닌가! 우리도 끊임없이 (가)쪽에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그런 자신이 남들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며 숨고, 또한 온갖 그럴싸한 것들로 자신을 가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엇보다도, 하와의 눈이 하와를 바르게 인도했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쪽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럽게' 보아 끊임없이 (가)를 버리고 (나)에로 가려는 우리들의 맹목적인 믿음과 노력이 과연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고 마침내 우리를 자유케 할까? 노우(No),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태초'의 그 어리석음을 '지금'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뭐냐면,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자,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는데, 그 말을 듣고 다시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기가 막히도록 절묘하다.
즉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Who told you that you were naked)?"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네가 벗은 줄을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해야 할텐데, 성경에는 이상하게도 '누가(Who)'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누가(Who)……!" 그런데 이 '누가'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뱀'이 아닌가! 바로 우리 내면의 뱀!
보라, 창세기 2장25절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고 했던 것처럼,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벌거벗고 있었고, 따먹은 후에도 벌거벗고 있었다. '벌거벗었다'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도, 뱀이 불어넣은 한 '생각'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이 들어오니 조금 전까지 편안하던 그들의 '벌거벗었음'이 대번에 부끄럽고 두려우며 숨기고픈 무엇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벌거벗었음'이 잘못되었는가, 아니면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만든 그 '생각'이 잘못되었는가? 만약에 '벌거벗었다'라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그들은 이미 처음부터 부끄러워해야 했을 것이다.
이때 '벌거벗었다'라는 것은 어떤 가식이나 거짓, 왜곡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모습 ― 곧 (가)에 있는 ― 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것을 부끄럽고 두려워하며 숨기고픈 무엇으로 보이게끔 한 것은 바로 그 '생각'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에게 잘못된 것은 오직 하나, 바로 그 '생각'이건만, 오히려 우리는 그 '생각'에 속아 그 '생각'이 가리키는 대로 끊임없이 (가)를 버리고 (나)로만 가려고만 하니, 이 무슨 안타까운 아이러니인가! 그러므로 오직 그 한 '생각'만 내려지면―!
불상현(不尙賢)! 현(賢)하려 하지 말라! 그리하여 만약 현(賢)하고자 하는 마음의 어리석음을 진실로 깨닫고,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보잘것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면, 그때에도 여전히 '부족함'이라든가 '불완전' 혹은 '보잘것없음'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 '나'를 괴롭힐까? '나'는 여전히 그런 존재일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전혀 뜻밖에도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존재의 비약(飛躍)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그토록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던 그 모든 구속과 마음의 짐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예를 들어, 여기 '빨간색'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빨간색이 빨간색일 수 있는 것은 빨간색이 아닌 다른 색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만약 빨간색만 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빨간색'이라고 인식할 수 없으며, 나아가 '색'이라는 개념 자체도 성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진실로 진실로 우리의 내면에서 '현(賢)'하고자 하는 마음의 작용이 정지한다면, 그리하여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보잘것없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신만 남게 된다면, 아아 그때는 알게 되리라, '나'는 이미 완전하며, 이미 현(賢)하며, 이미 이대로가 부처[깨달음]라는 것을!②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혼의 '쉼'은 찾아오고―!
② 그러나 위에서 든 예에서처럼, 빨간색만 있을 경우 '색'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듯이, 사실은 이때는 '완전'이니 '현(賢)'이니, '부처[깨달음]'니 하는 것들도 없다. 다만 이름하여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불상현(不尙賢)! 그리하여 진실로 현(賢)하려 하지 않게 되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괴롭히던 내면의 모든 자기분열(自己分裂)은 끝이 난다. 드디어 내 안의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되는 것이다[使民不爭]. 이 이후에 나오는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니, 不見可欲 使民心不亂이니 하는 것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결국은 '마음'의 문제이지, 탐하는 '마음'이 없다면 '귀한 재물'이니 '욕심낼 만한 것'이니 하는 것들도 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언제나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며[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언제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혜안(慧眼)을 열어주어 자족(自足)할 줄 알게 하며,
'현(賢)'하고자 하고 또한 '현(賢)'해야만 자신의 삶이 의미있고 가치있을 것 같아 애타하던 그 모든 몸짓들이 사실은 한바탕 꿈이었음을 눈뜨게 하여[弱其志],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삶,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지금 여기에서의 하루 하루의 현실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하며[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그렇듯 성인의 가르침은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쌓고 노력함으로써 ― 현(賢)하려 함으로써 ― 비롯되는 지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올바로 앎으로써 비롯되는 그 무한한 지혜에 눈뜨게 하여, 다시 의문(疑問)하지 않으며[自證], 다시 목마르지 않으며[自存], 스스로 알며[自明], 스스로 그러한[自然] 삶을 살게 한다.
아아, 모두가 알지니, '현(賢)'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다스려지지 않는 바가 없는 이 도리를[爲無爲則無不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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