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자기가 꼰 새끼줄로 스스로를 묶는다는 뜻.
그리하여, '空'이란 이 <안경>이 내려지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 <안경>에 의한 왜곡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나'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모든 이름(名)과 상대적 분별(分別)을 떠나 있는 거기에는 그래서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부족'도 없고 '완전'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부처[깨달음]'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보리(菩提)'도 없고, '色'도 없고 '空'도 없다. 그 모든 상대적 분별들이 <텅 비어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道沖(도는 텅 비어 있고)……그렇게 우리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던 그 한 '생각', 그 한 '마음' ― 곧 <안경> ― 이 내려짐을 '일컬어' 道 혹은 '道沖'이라고 하고, 이미 처음부터 그 <안경>과는 무관하게 늘 그렇게 있는 그대로 존재해 왔던 모든 것들을 또한 '이름하여' 道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이제 세상에는 이미 처음부터 道 혹은 진리(眞理) 아님이 없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봄날 짝짓기를 하기 위해 하늘거리며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한 쌍의 나비가 곧 道요, 뜰 앞의 잣나무가 곧 道이며,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는 이 '나'가 또한 道인 것이다. 아아, 그렇듯 세상에는 道 아닌 것이 없기에 따로이 '道'라고 할 것도 없고, 道라고 할 것도 없기에 그냥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인 것이다.
而用之或不盈(아무리 써도 차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던 그 <안경>을 벗고 '나'를 보니 오호라! 나는 그냥 나일 뿐 ― I am who I am,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 아무것도 아니질 않는가! '나'는 중생(衆生)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며, 언제나 부족하고 못난 존재라고 여기며 괴로워하던 이 모습 이대로가 또한 이미 완전하질 않는가! 그토록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던, 그래서 어떻게든 버리고 싶었고 버리고 싶었던 만큼 그것은 '나'가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고 외면했던 내 안의 많은 것들 ― 이를테면 식욕, 성욕, 수면욕, 미움, 짜증, 분노, 이기심, 게으름, 교활함, 불안 등등(햐∼, 이런 걸 다 나열하려면 얼마나 많은지!) ― 도 사실은 어쩔 수 없는 '번뇌(煩惱)'가 아니라, 그 하나 하나가 올올이 '보리(菩提)'가 아닌가! 아아, 그리하여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녔던 '참나[眞我]'는 저기, 나 밖(外)에, 언젠가는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곤 하던 먼 미래의 무엇이 아니라, 이럴수가! 나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참나'가 아닌 적이 없으며, 언제나 '참나'로서 살아온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한바탕 꿈을 꾼 것인가……?
그렇게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던 <안경>이 내려진 '나'와 세계가 곧 道沖이요, 그 '나'가 그냥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곧 而用之或不盈이다. 아무리 써도 차지 않는다? 즉, <안경>이 없는 '나'는, 그리하여 이미 '부족'이니 '완전'이니 하는 등의 모든 상대적 규정 속에 있지 않는 '나'는, 이제는 그냥 아무런 무게 없이 살아가게 된 일상(日常)의 삶 속에서 때로 미워하고 때로 짜증내며, 때로 분노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 속에서 살지만,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물들거나 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온갖 것들이 오고 가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간택(揀擇)하지 않고 다만 고요히 비추기만 할 뿐인 거울처럼 말이다④.
④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이 지은 <신심명(信心銘)>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至道無難이니 唯嫌揀擇하라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 지극한 道은 어렵지 아니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것이라. 미워하고 사랑함만 없으면(분별심만 내려진다면) 문득 모든 것이 환하게 밝아지리라.
淵兮, 似萬物之宗(깊구나! 만물의 으뜸[實相] 같네)……道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얘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참으로 묘(妙)한 것이다. 그것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湛兮, 似或存], '만물의 으뜸'이니 '근원'이니 '실상(實相)'이니 해도 단지 이름하여 그렇다는 것일 뿐 근원이요 실상인 무엇이 따로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道는 '시간'의 연속선상에도 있지 않다. 道는 '시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도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내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나, 上帝보다 먼저인 것 같네)라고 말을 하지만, 이때의 '먼저(先)'라는 것도 사실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 빛을 감추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 그렇게 <안경>이 내려지고 나면,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던 상대적 분별 속에서 끝없이 끊임없이 끄달리던 자기분열(自己分裂)의 날카로움이 비로소 꺾이게 되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내면의 어지러움과 그 아뜩한 얽힘이 마침내 풀어지게 된다[挫其銳 解其紛].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어떻게 '나'에게 그토록 목말라 하던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으며, 꿈에도 그리던 '영혼의 쉼'이 왔는가? 그것은 <안경>이 가르쳐준 분별(分別)로써가 아니라, 그리하여 부족하고 못난 '나'를 못견뎌 하며 더 많이 채우려 하고 더욱 더 완전해지려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 문득 그 <안경>이 내려지면서, 있는 그대로의 이 '나'가 바로 '참나[眞我]'임을 밝히 알게 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和其光 同其塵]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먼저 내 안(內)의 부족하고 못나 보이는 '티끌'과 하나가 될 때 이윽고 '나' 밖(外)의 '티끌'과도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진실로 '티끌'과 하나가 될 때, 이제 거기엔 '티끌'이란 없고 오직 상생(相生)만 있다. 모두를 진정으로 살릴 수 있는 사랑의 상생(相生)이―! 아아, 모두가 알게 되기를, 이 진실한 도리(道理)를!
⑤ 중생(衆生)이 곧 부처요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이며, 색(色)이 곧 공(空)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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