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스크랩] 도덕경-15 제6장 ― 진리에 이르는 문(門)

ria530 2013. 5. 6. 09:06

도덕경-15 제6장 ― 진리에 이르는 문(門)
6장 ― 진리에 이르는 문(門)

     谷神不死, (곡신불사)
    是謂玄牝. (시위현빈)
    玄牝之門, (현빈지문)
    是謂天地根. (시위천지근)
    綿綿若存, (면면약존)
    用之不勤. (용불불근)

    谷―골 곡, 牝―암컷 빈, 골짜기 빈, 綿―연이을 면, 솜 면, 얽힐 면, 若―같을 약, 만약 약, 반야 야, 勤―수고로울 근, 부지런할 근

     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玄妙)한 암컷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면면히 이어져 있는 듯하니,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 뜻풀이 >
    이 장(章)의 제목을 나는 '진리에 이르는 문(門)'이라고 붙여 보았다. 진리에 이르는 문이라……햐! 이런 말만 들어도 내 가슴은 벌써 이렇게도 뛰누나! 문(門)이란,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방이나 혹은 집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반드시 그 문을 통해 어떤 방이나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듯이, 우리가 진리에 이르는 데에도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길[道]이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장(章)은 바로 그 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진리에 이르는 문은 분명코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바로 그 문 앞에 서 있다. 삶의 어느 한 순간 문득 그 진리의 문이 열려, 언제나 어느 때나 나누고 분별(分別)하고 구별짓고 간택(揀擇)하던 이제까지의 그 모오든 몸짓들이 멈추고,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이 숨막히도록 역동적인 삶을, 그 어느 것도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온전히 '삶'과 하나 되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아아,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 것도 되지 않아도, 단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슴 벅차 오르고 행복할 수 있을텐데……!

    자, 그렇다면 이제 그 문을 두드려 보자.
    谷神不死 是謂玄牝
(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
'골짜기'와 '암컷'은 노자가 도(道)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썼다. 골짜기는 '텅 비어 있음'을, 암컷은 '여성적 수동성'을 각각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둘 다가 '신비롭고' 또한 '현묘(玄妙)하다'고 한다. 신비롭고 또한 현묘하다……?

    '텅 비어 있음'에 대해서는 도덕경 4장에서 '道沖(도는 텅 비어 있다)'을 얘기할 때, 색즉시공(色卽是空)의 '空'을 언급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본다. 텅 비어 있음의 신비로움……사실이 그러하다. '나'가 텅 비어 있으면 '삶'이 텅 비게 되고, 동시에 세상과 우주가 텅 비게 된다. 일체 모든 것이 '空'하게 되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 텅 비어 있음은 또한 얼마나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그 텅 비어 있는 세계(世界)와 '나'와 '삶'은 또한 너무도 평범한 것이지만, 그러나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한지! 故常無欲以觀其妙!(그러므로 언제나 텅 비어 있으면 그 오묘함을 보게 된다…도덕경 1장) 그리하여 언제나 새롭고, 항상적이며, 끊임없이 샘솟듯 하는 존재의 이 무한한 생명력이여[谷神不死]―!

    그런데 노자는 다시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玄牝)'이라고 말한다. '암컷'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여성적 수동성'을 의미한다. 왜 '암컷'이며, 그리하여 왜 '여성적'인가? 우리가 보통 '남성적'이라고 하면 으레 '적극적', '능동적', '진취적', '힘[力]', '動', '자기 개선의 강한 의지' 등등을 연상하게 되는 반면, '여성적'이라고 하면 '소극적', '수동적', '부드러움', '弱', '靜', '순종적 받아들임' 등등을 떠올리게 된다.

동시에 '남성적'인 여러 속성들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거나, 삶에 있어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자세들이라고 여기는 반면, '여성성' 혹은 '여성적'인 속성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부시켜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극복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의 노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삶은 오히려 '여성적'일 때 진정 꽃필 수 있으며, 그때에야 비로소 삶이 지닌 그 모오든 에너지와 생명력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게 되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바로 그때 우리는 '참된 것'이랄까, '영원한 것', 혹은 '진리'라고 말해질 수 있는 무언가를 맛볼 수 있다.)

그렇다. 삶에 있어서의 '여성성' 혹은 '여성적 수동성'은 우리를 진리에로 인도하는 문(門)이다. 그런데 이때, '수동성'이란 '소극성' 혹은 '소극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오히려 '수동성'은 삶에 대한 가장 깊고도 완전한 '적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수동성'이란 뭘까? 무엇을 의미할까?

    '수동성(受動性)'은, 사전적 의미로는, '다른 것으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성질'을 말하며, 이에 반대되는 능동성(能動性)은 '스스로(제 힘으로) 다른 것에 작용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수동성'은 제 스스로 나서서 무언가를 <변형>시키거나 <개선>하거나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적 수동성[玄牝]'이란 다름 아닌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무위(無爲)'를 뜻함이 아닌가!

    벌써 두어 해 전의 일이다. 대구에 계신 어떤 선생님 한 분이 인터넷을 통해 연락이 와서는 한 번 만나고 싶다며 찾아오셨다. 그리곤 대뜸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면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신지 좀 더 설명을 해달라고 했더니, 자신은 삶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여러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어떤 경우에도 진정 자신답지 않고 무언가 항상 떠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대할 때에도 자신은 진정 교사다운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지, 또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이것저것 애써보지만 이게 과연 아버지다운 모습인지,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서, 가장(家長)으로서, 자식으로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역할에 있어서도 자신은 항상 아직 그 무엇에도 닿아있지 않은 듯하고 턱없이 부족한 듯하여 그때마다 늘상 입술이 타는 듯한데, 언제까지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이젠 그야말로 하루 하루가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그분은 '불안'이라고 표현했는데, 단 한 순간만이라도 불안하지 않고 자신답게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애틋한 마음으로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다시는 불안하지 않고 당당하게, 또한 언제나 자신답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은 진정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진정 불안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싶으시다면, 불안하지 않고 당당한 사람이 되려는 그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으십시오. 그냥 불안하라는 말입니다. 불안을 떨쳐버리고 당당한 사람이 되려는 일체의 노력과 마음들을 정지하고, 그냥 지금 선생님에게 찾아온 그 불안을 사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진실로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 다시는 선생님의 삶 속에서 '불안'이라는 것을 목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성적 수동성'으로써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라는 말이다.

    햐! 그런데 어찌 이 말을 믿을 수 있나? 불안을 못 견뎌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 함에 더 나은 방법을 찾고 더욱 더한 열심을 내어도 부족할 판에, 아니, 그 마음을 버리라니! 그냥 불안하라니! 그러면 차라리 죽으라는 말인가? 그렇다. 죽으라는 말이다.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는 말이다.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無爲]! 불안이 오면 불안을 살고 짜증이 오면 짜증을 살며 분노가 오면 그냥 그 분노를 사는 것, 그러한 '지금' '여기'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비교>나 <분별(分別)>로써 간택(揀擇)하지 않고 다만 그대로를 사는 것, 끊임없이 나서서 그러한 것들을 <변형>시키고 <개선>하려는 그 마음의 작용이 정지해 버리는 것, 그리하여 진정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바로 '나'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①

출처 : 전주향교(全州鄕校)
글쓴이 : 鶴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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