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용아화상(龍牙和尙)의 한 노래가 있어 문득 그것을 읊고 싶구나!
深念門前樹 能令鳥泊棲 來者無心喚 去者不慕歸 若人心似樹 與道不相違
문 앞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노라. 선선히 새들에게 그 둥지를 내어주고 오는 자 무심(無心)히 맞아주며 가는 자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만약 사람의 마음이 이 나무와 같다면 道와 더불어 어긋나지 않으리.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어 또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와 메추라기>에 관한 이야기인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 종되었던 곳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가던 도중 광야에서의 일이다. 그렇듯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의 몸에서 놓여나게 해주었건만, 그들은 그들의 행로(行路)에 어떤 자그마한 어려움이라도 닥치면 곧 모세를 원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이스라엘 온 회중(會衆)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2∼3)
이러한 거듭되는 원망의 소리를 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하는데,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오는 다음의 말씀들이 참 재미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애굽기 16:15∼20)
성경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얘기는 뭘까? 자, 성경을 <다시> 보자. 성경은 결코 이스라엘의 역사서가 아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얘기도 아니다. <모양>과 <그림>은 그러하나, 성경은 전적으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와 '마음'에 관한 얘기이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 앞의 출애굽기 말씀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까?
'애굽 땅 종되었던 집'은 분별심(分別心) ― 4장에서 말한 <안경> ― 에 사로잡힌 '나'의 모습이다. 우리가 그 '생각[思考]' 혹은 분별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 분별심 혹은 한 '생각'이 내려지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마음의 상태 ― 空 ― 를 말한다.
그리고 특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지는 장면에서 보면,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이 만나와 메추라기는 앞에서 노자를 얘기할 때 말한 '내 안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렇게 늘 때로 미워하고 때로 짜증내며, 때로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 눈물짓기도 하면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존재요 '생명'인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성경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참으로 읽을수록 기가 막히고, 전율할 만큼 오묘하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는 곧 '내 안의 백성'이며, 그것은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아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내 안의 온갖 백성들을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내어버려 두지 못하고 끝없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이 <구별>하고 <간택(揀擇)>했듯이, 어떤 것은 가려 "아침까지 두는" 이 어리석음이여―! 그것은 필연적으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되어 있다!
오오, 그러니, 그냥 두라! 그냥 그대로를 살라! 그와 같은 끊임없는 간택(揀擇)을 통하여 내가 나를 <질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그렇게 '내 안의 백성'들을 내어버려 두고(Let it be) 무위(無爲)할 수만 있다면, 그때, 천지(天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온전한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게 했듯이, 우주적인 생명의 기운이 '나'를 살리고 '나'를 질서잡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평화롭고 행복하리라. 아아, 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어마어마한 힘이여―!
天地之間 其猶탁약乎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나 피리와도 같구나!)……
그렇게 '나'라고 하는 이 천지가 무위(無爲)로써 텅 빌 때, '내 안의 백성'들은 여전히 제 각각의 존재와 생명의 빛깔대로 다함 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나[虛而不屈 動而愈出], 오! '나'는 아름다운 피리소리 되어 세상과 삶과 일상(日常)을 연주하는구나!
多言數窮 不如守中! 긴 말 하면 숨만 차고 그런데 마지막의 이 문장을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 지나니, 그러므로 그 '중(中)'을 지킴만 같지 못하다.'라고 교훈적으로 해석하여, '중(中)' 혹은 '중도(中道)'를 찾으려 하거나 지키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어긋난다. 왜냐하면 '중(中)'은 찾을 수도, 잡을 수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사고(思考)'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그 한 '생각[思考]' 혹은 '마음'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만 내려지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리라, 이 세상에는 온통 '중(中)'밖에 없음을, 그리하여 따로이 '중(中)'이라고 할 것도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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