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지는 장구[영원]하다. 천지가 능히 장구한 까닭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능히 오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자생(不自生)'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고, 바로 이것이 '진정 살 수 있는 길[道]'이기 때문이다. 不自生!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말라! 죽어야 진정 살리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 3:7) 그렇다면 이 '不自生'이란 뭘까? 무엇을 의미할까? 노자는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천장지구(天長地久)……"로 시작되는 이 장(章)에서 '不自生'이란, 천지(天地)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천지는 만물(萬物)을 언제나 그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내어버려 둔다. 어떤 것이 부족하다 하여 그것을 채우려 하지도 않고, 어떤 것이 약하다 하여 억지로 강하게 하려 하지도 않는다.
화사한 봄날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피어오르던 목련꽃의 한 순간의 낙화(落花)를 추하다 하여 멀리 하지도 않고, 이 가을 때때로 나를 얼어붙게 하는 황홀한 일몰(日沒)을 아름답다 하여 그것을 연장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또한 살아있음이 좋다 하여 방금 태어난 누(gnu)① 새끼가 사자밥이 되는 것을 막아주지도 않으며, 풍년(豊年)이 좋다 하여 가뭄과 홍수가 오지 못하게 하지도 않는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 하여 그것을 길게 늘이려 하지도 않으며, 학의 다리가 길다 하여 그것을 자르려고 하지도 않는다. 천지는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더 나은' 천지를 위해 노력하거나, '더 완벽한' 천지의 모습을 이루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것은 천지에게는 있지도 않다! 천지는 다만 천지로서, 스스로 그러할[自然] 뿐인 것이다. 그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삶이 곧 '不自生'이다. 그런데도 보라, 천지는 장구[영원]하다!(天長地久)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크낙한 질서와 조화 속에서 만물을 번성케 하는구나!
① 포유류 소목[偶蹄目] 소과(科)에 속하는 영양의 한 종. 소같이 앞으로 흰 뿔과 갈리, 꼬리에 긴 솜털이 있어서 뿔말이라고도 한다. 먹이의 98%가 풀이며, 새로운 풀을 찾아 건기(乾期)에는 1,600km가 넘는 거리를 대이동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천지 가운데의 한 존재로서, 천지가 그러하듯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음[不自生]으로써 오히려 진정으로 사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기는커녕 끊임없이 '더 나은' 자신을 위하여 ― 이것이 바로 '스스로 살고자 함[自生]'이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 안(內)의 물오리들의 다리를 짧다 하여 늘이려 하거나, 내면의 학의 다리를 길다 하여 힘겨워 하면서 그것을 자르고 있지는 않은가?
② 케피소스(Kephisos) 강가에 침대를 하나 놓아두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그 침대에 누이고는 침대보다 키가 크면 잘라 죽이고 작으면 늘여 죽이던 프로크루스테스(Prokroustes)처럼③, 우리도 우리 내면에 '보다 완전한 나'라는 침대를 하나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나그네 곧 그때 그때의 우리 자신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과 말 등등을 이리저리 재어보고 헤아려 보고는 어떤 것은 길다고 잘라내고 어떤 것은 짧다고 애써 늘이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지 않는가?
아, 그렇게 타는 목마름으로 '자기 완성'과 '자기 해방'을 위해 그 오랜 세월 몸부림쳐 왔건만, 아직 끝나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이 내면의 갈증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기 완성'과 '자기 해방'을 위해 나아가는 우리의 방향과 방법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이미 처음부터, 다시 말해, '자기 완성'과 '자기 해방'의 그 지난(至難)한 길로 우리를 들어서게 한 어떤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녕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② 3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가)를 버리고 (나)로 가려고 하는―! ③ 그랬던 그도 바로 그 침대에서 테세우스에 의해 잘려 죽는다.
'자기 완성'과 '자기 해방'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현재(現在)의 자신이 무언가 '부족한' 미완(未完)의 존재라는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 '부족하다'라는 전제는 <사실>인가, 아니면 우리의 무지(無知)와 분별심(分別心)이 만들어낸 허구적이고 잘못된 <자기규정>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미처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따져보기도 전에 벌써 '자기 완성'을 향한 그 모호하고 힘겨운 길 위를 헐떡이며 달려가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달려가다 보면, 때로 열심이 부족할 때 채찍에 채찍을 더하다 보면 언젠가는, 아아 언젠가는, 이 질기고도 오랜 갈증이 끝날 때가 있겠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직 그 '완전'을 향한 노력만이 자신을 구제해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오직 그 방향만이 선(善)이요 '진정 사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서 말이다.
그런데, 진실(眞實) ― 참된 실재(實在) ― 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하늘의 이치와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매양 서로 반대될 뿐일지도 모르며(天理人欲之間每相反而已矣),
우리 눈에는 분명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보이는 그것이 사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일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완전'을 향한 '나'의 이 눈물겨운 노력은 뭐란 말인가!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그렇다. 진리(眞理)는, 도(道)는, 진정한 '자기 완성'은 저기, 나 밖(外)에, '완전'을 향한 우리의 무한대의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전혀 뜻밖에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내 안에 있다. 내가 이미 <그것>이다(I am That)!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아니, 오직 이것만이 <사실>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완전'을 이루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 다만 '지금' '여기'에 머물라. 오직 '현재'를 살라. 미래의 '완전'을 향해 달려나가던 그 마음을 돌이켜, 다만 지금 현재의 그 '부족'을 살라. 그 '부족' 위에 머물라.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그 '부족'을 믿어주고, 그것을 그냥 살아내어 보라.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해 보라.
'깨달음'이랄까 혹은 '진리(眞理)'는 그러한 <돌이킴> 속에서 이윽고 그 소박하고 투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면 스스로 알게 되리라, 현재(現在)는 '부족'하지 않으며, '나'와 '삶'과 '세상'은 이미 처음부터 '완전'했음을―!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현재'로의 <돌이킴>이 바로 '不自生'이며, 그것은 '완전'을 향해 달려나가던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지식과 믿음과 노력의 포기,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아 죽어야 진정 살리라! 不自生!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 ― 곧 참된 실재(實在) ― 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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