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

31

ria530 2013. 11. 12. 16:30

31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無妄之謂誠(무망지위성) : “털끝만큼의 거짓도 없는 것을 성이라 하고

不欺(불기) : 속이지 않는 것은

其次矣(기차의) : 그 다음 간다.”고 하셨다

 

32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沖漠無朕(충막무짐) : “태극은 깊숙하고 조용하여 아무런 조짐도 없으나

萬象森然已具(만상삼연이구) : 삼라만상이 이미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다

未應不是先(미응불시선) : 미응이 먼저가 아니요

已應不是後(이응불시후) : 이응이 뒤가 아니다

如百尺之木(여백척지목) : 백 척이나 되는 큰 나무가

自根本至枝葉(자근본지지엽) : 밑뿌리로부터 가지 끝 잎까지

皆是一貫(개시일관) : 다 하나로써 연결되어 있다

可不道上面一段事(가불도상면일단사) : 말하기 않을 수 있을까, 앞에 말한 일이 

無形無兆(무형무조) : 형태도 없고 조짐도 없는 것이

却待人旋安排(각대인선안배) : 사람이 억지로 안배하여

引入來敎入塗轍(인입래교입도철) : 끌어들여서 사리에 들어맞게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旣是塗轍(기시도철) : 이미 이것이 사리인 이상

却只是一箇塗轍(각지시일개도철) : 다만 하나의 사리만이 있을 뿐이다.”고 하셨다.

33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近取諸身(근취제신) : “가까이는 내 몸에서부터 이치를 취해 볼 것 같으면

百理皆具(백리개구) : 백 가지 이치가 다 그 안에 갖추어져 있다

屈伸往來之義(굴신왕래지의) : 구부리고 펴고 가고 오는 뜻을

只於鼻息之間見之(지어비식지간견지) : 다만 코로 호흡하는 사이에 찾아볼 수 있다

屈伸往來只是理(굴신왕래지시리) : 구부리고 펴고 가고 오는 것은 오직 이치일 뿐

不必將旣屈之氣(불필장기굴지기) : 반드시 이미 구부린 기운이

復爲方伸之氣(부위방신지기) : 다시 펴는 기운이 되는 것은 아니다

生生之理(생생지리) : 내고 또 내는 이치는

自然不息(자연불식) : 자연히 쉼이 없다

如復卦言七日來復(여복괘언칠일래복) : 복괘에 7월에 다시 온다고 말한 것과 같이

其間元不斷續(기간원불단속) : 그 사이는 원래 단속이 없는 것이니

陽已復生(양이부생) : 양이 이미 다시 생하고

物極必返(물극필반) : 물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본대로 돌아온다

其理須如此(기리수여차) : 그 이치는 이와 같으니

有生便有死(유생변유사) : 생이 있으면 곧 사가 있고

有始便有終(유시변유종) : 처음이 있으면 곧 끝이 있다.”고 하셨다.

 

34

明道先生曰(명도선생왈) : 명도 선생이 말하기를,

天地之間(천지지간) : “천지 사이에는

只有一箇感與應而已(지유일개감여응이이) : 단지 느끼는 감과 응이 있을 뿐이다

更有甚事(갱유심사) : 그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35

問仁(문인) : 인에 대하여 물으니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대답하기를,

此在諸公自思之(차재제공자사지) :

“그것은 묻는 사람들 스스로가 그것을 생각하는 데 있다.”고 하셨다

將聖賢所言仁處(장성현소언인처) : 성현이 인을 말한 것을 가지고

類聚觀之(류취관지) : 미루어서 종합하여 관찰하고

體認出來(체인출래) : 체득해 내야 한다

孟子曰(맹자왈) : 맹자는 말하기를.

惻隱之心仁也(측은지심인야) :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인이라”고 하였는데

後人遂以愛爲仁(후인수이애위인) : 나중 사람들은 사랑을 가지고 인이라 한다

愛自是情(애자시정) : 사랑은 그 자체가 정이요

仁自是性(인자시성) : 인 그 자체는 성이다

豈可專以愛爲仁(기가전이애위인) : 어찌 사랑만을 가지고 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孟子言(맹자언) : 맹자는 말하기를

惻隱之心(측은지심) :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仁之端也(인지단야) : 인의 실마리이다

旣曰仁之端(기왈인지단) : 이미 말한 바 인의 실마리라고 한 것은

則不可便謂之仁(칙불가변위지인) : 곧 인이라 말 할 수 없다

退之言(퇴지언) : 퇴지가 말한

博愛之謂仁非也(박애지위인비야) : 박애도 인이라 말할 수 없다

仁者固博愛(인자고박애) : 인이란 본래 박애이나

然便以博愛爲仁(연변이박애위인) : 박애를 갖고서 인이라 함은

則不可(칙불가) : 옳다고 할 수 없다.”고 하셨다.

 

36

問仁與心何異(문인여심하이) : 인과 마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물으니

曰心譬如穀種(왈심비여곡종) : 대답하기를, “마음을 비유한다면 곡식의 씨앗과 같다

生之性便是仁(생지성변시인) : 생의 성은 곧 인이요

陽氣發處乃情也(양기발처내정야) : 양기가 발한 것이 정이다.”고 하셨다

 

37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義訓宜(의훈의) : “의는 의로 풀이하고

禮訓別(예훈별) : 예는 별로 풀이하고

智訓知(지훈지) : 지는 지로 풀이한다

仁當何訓(인당하훈) : 그러면 인은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마땅할까

說者謂(설자위) : 논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訓覺訓人(훈각훈인) : 각’이라 풀이하고 ‘인’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皆非也(개비야) : 이것은 다 잘못이다

當合孔孟言仁處(당합공맹언인처) : 공자와 맹자가 인을 말한 것을 종합하여

大槪硏窮之(대개연궁지) : 그 대개를 연구해야 한다

二三歲得之(이삼세득지) : 2, 3년 걸려 그 뜻을 안다고 해도

未晩也(미만야) : 늦은 것은 아니다.”고 하셨다 .

38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性卽理也(성즉리야) : 본성은 곧 이치이다.

天下之理(천하지리) : 천하의 모든 이치를

原其所自(원기소자) : 그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보면

未有不善(미유불선) : 착하지 않은 것이 없다.

喜怒哀樂未發(희노애락미발) :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등이

아직 마음밖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何嘗不善(하상불선) : 어찌 일찍이 착하지 않았겠는가

發而中節(발이중절) :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맞으면

則無往而不善(즉무왕이불선) : 어떤 경우든 착하지 않음이 없다.

發不中節(발불중절) : 드러나서 절도에 맞지 않은 후에야

然後爲不善(연후위불선) : 비로소 착하지 않음이 있다.

故凡言善惡(고범언선악) : 그러므로 착함과 악함을 말할 때

皆先善而後惡(개선선이후악) : 모두 착함을 먼저 말하고 악함을 뒤에 말한다. ”고 하셨다

言吉凶(언길흉) : 또한 길흉을 말할 때에도

皆先吉而後凶(개선길이후흉) : 길함을 먼저 말하고 흉함을 뒤에 말하며,

言是非(언시비) : 옳음과 그름을 얘기 할 때도

皆先是而後非(개선시이후비) : 모두 옳음을 먼저 말하고 그름을 뒤에 말한다.

39

問心有善惡否(문심유선악부) : 묻기를, 마음에 착함과 악함이 있습니까

曰在天爲命(왈재천위명) : 답하기를, 하늘에 있는 것은 명령()이며,

在物爲理(재물위리) : 만물에 있는 것이 이()이며,

在人爲性(재인위성) : 사람에게 있는 것은 본성이고,

主於身爲心(주어신위심) : 사람의 몸에서 주인은 마음이지만

其實一也(기실일야) : 그 내용은 한 가지로 같다.

心本善(심본선) : 마음은 본래 착하지만,

發於思慮則有善有不善(발어사려칙유선유불선) :

그 마음이 다양한 생각과 의도에 따라서 나타나게 되면 착함도 있고 착하지 않음도 있게 된다.

 

若旣發(약기발) : 만약 이미 나타났으면

則可謂之情(칙가위지정) :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고

不可謂之心(불가위지심) :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譬如水(비여수) : 비유하면, 물과 같은 것을

只可謂之水(지가위지수) : 다만 물이라고만 말할 수 있지만

至如流而爲派(지여류이위파) : 물결이 되어 지류를 형성하여

或行於東(혹행어동) : 혹 동쪽으로 흐르고

或行於西(혹행어서) : 혹 서쪽으로 흐르게 되면

却謂之流也(각위지류야) : 곧 흐름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다.

40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性出於天(성출어천) : “본성은 하늘에서 나오고

才出於氣(재출어기) : 재질은 기()에서 나온다.

氣淸則才淸(기청칙재청) : 기가 맑으면 재질도 맑아지고

氣濁則才濁(기탁칙재탁) : 기가 탁하면 재질도 탁해진다.

才則有善有不善(재칙유선유불선) : 재질에는 착함과 착하지 않음이 있지만

性則無不善(성칙무불선) : 본성에는 착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셨다

 

41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性者自然完具(성자자연완구) : “성은 자연히 인의예지의 네 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信只是有此者也(신지시유차자야) : 신이 네 덕 안에 들어 있다

故四端不言信(고사단불언신) : 그러므로 사단에서 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42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心生道也(심생도야) : “마음은 낳은 도이다

有是心(유시심) : 이 마음이 있으면

斯具是形以生惻隱之心(사구시형이생측은지심) : 여기에 형태를 갖추어 비로소 생하게 된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人之生道也(인지생도야) : 사람에게 생기는 도인 것이다.”고 하셨다

43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氣坱然太虛(기앙연태허) : “시는 성대하게 허공에 가득히 차 있어서

昇降飛揚(승강비양) : 오르고 내리며 날아 퍼지는 것이

未嘗止息(미상지식) : 일찍이 잠시도 머무르거나 그쳐 본 적이 없다

此虛實動靜之機(차허실동정지기) :

이 기는 텅 비고 꼭 차며 움직이고 고요히 멈추는 기틀이며

陰陽强柔之始(음양강유지시) : 음양강유의 시초이다

浮而上者陽之淸(부이상자양지청) : 떠서 올라가는 것은 양의 맑음이요

降而下者陰之濁(강이하자음지탁) : 가라앉아 내려가는 것은 음의 흐림이다

氣感遇聚結(기감우취결) : 기가 서로 느껴 만나고 모여들어 맺힘으로써

爲風雨(위풍우) : 비와 바람이 되고

爲霜雪(위상설) : 서리와 눈이 된다

萬品之流形(만품지류형) : 만가지로 변하는 형태와

山川之融結(산천지융결) : 산천의 융결과

糟粕煨燼(조박외신) : 기의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無非敎也(무비교야) : 기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셨다

44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游氣紛擾(유기분요) : “다니는 기가 흐트려져 섞여 있다가

合而成質者(합이성질자) : 합하면서 엉키어지면

生人物之萬殊(생인물지만수) : 사람과 만물이 여러 가지로 다르게 생성되며

其陰陽兩端循環不已者(기음양양단순환불이자) :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서로 머금으며 순환이 계속되어

立天地之大義(입천지지대의) : 천지의 대의를 세운다.”고 하셨다

 

45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天體物不遺(천체물불유) : “하늘은 물의 체가 되어 빠지는 것이 없으니

猶仁體事而無不在也(유인체사이무불재야) :

인이 일의 체로서 어디에나 있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禮儀三百(례의삼백) : 예의 3백 가지와

威儀三千(위의삼천) : 위의 3천 가지 가운데

無一物而非仁也(무일물이비인야) : 그 어느 한 가지라도 인을 체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

昊天曰明(호천왈명) : 시경에 ‘하늘의 도는 밝아

及爾出王(급이출왕) : 사람의 출유를 비추고

昊天曰旦(호천왈단) : 하늘의 도는 밝으니

及爾游衍(급이유연) : 사람의 유락을 비춘다.’는 말이 있으니

無一物之不體也(무일물지불체야) : 한가지라도 천도를 체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다

 

46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鬼神者(귀신자) : “귀신이라는 것은

二氣之良能也(이기지양능야) : 두 기운 즉 음양 양능인 것이다.”고 하셨다

 

47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物之初生(물지초생) : “만물이 처음 생겨나면

氣日至而滋息(기일지이자식) : 기가 날로 이르러 번성하고 자란다

物生旣盈(물생기영) : 물체의 생이 이미 가득 차면

氣日反而游散(기일반이유산) : 기는 처음으로 되돌아가 흩어지고 없어진다

至之謂神(지지위신) : 기가 이르러 왕성하게 되는 것을 신이라 하니

以其伸也(이기신야) : 이것은 편다는 신의 뜻이고

反之謂鬼(반지위귀) : 기가 다시 돌아가 소멸하는 것을 귀라고 하니

以其歸也(이기귀야) : 이는 될아간다는 귀의 뜻이다.”고 하셨다

 

48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性者(성자) : “성이라는 것은

萬物之一源(만물지일원) : 만물의 한 가지 근원으로

非有我之得私也(비유아지득사야) : 나만이 사사로이 얻어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惟大人爲能盡其道(유대인위능진기도) : 오직 덕 있는 사람만이 그러한 도리를 끝까지 터득하여 지킬 수 있다

是故立必俱立(시고입필구립) : 그러므로 자기가 서면 남과 같이 서고

知必周知(지필주지) : 알면 반드시 두루 알며

愛必兼愛(애필겸애) : 사랑하면 반드시 다같이 사랑하며

成不獨成(성불독성) : 이루는 것은 홀로 하지 않는다

彼自蔽塞而不知順吾理者(피자폐색이불지순오리자) : 그 스스로를 가리고 막아서 내 근본 이치에 따라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則亦末如之何矣(칙역말여지하의) : 그 어떠한 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다

 

49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一故神(일고신) : “하나인 까닭에 신이다

臂之人身(비지인신) : 이것을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四體皆一物(사체개일물) : 사체는 다 하나의 물건인 것으로

故觸之而無不覺(고촉지이무불각) : 사지의 어는 곳을 찔러도 그것을 다 느끼게 된다

不待心使至此而後覺也(불대심사지차이후각야) : 즉 마음이 거기에 이른 뒤에 비로소 느끼는 것이 아니다

此所謂感而遂通(차소위감이수통) : 이것이 이른바 느껴 통한다는 감이수통인 것이다

不行而至(불행이지) : 가지 않고 이르며

不疾而速也(불질이속야) : 달리지 않고 빠른 것이라 하겠다.”고 하셨다

 

50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心統性情者也(심통성정자야) : “마음은 성정을 통괄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51

橫渠先生曰(횡거선생왈) :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凡物莫不有是性(범물막불유시성) : “무릇 물이란 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由通蔽開塞(유통폐개색) : 다만 통하고 가리워지고 열리고 막혀짐에 따라

所以有人物之別(소이유인물지별) : 인물의 구별이 있게 된다

由蔽有厚薄(유폐유후박) : 또 가려짐에 있어 두껍고 엷게 가려지므로

故有知愚之別(고유지우지별) :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구별이 있게 된다

塞者牢不可開(색자뢰불가개) : 꼭 막힘이란 굳게 닫혀 열 수 없는 것이다

厚者可以開(후자가이개) : 두텁게 가리운 것은 열 수가 있으나

而開之也難(이개지야난) : 그것은 열기가 매우 어렵다

薄者開之也易(박자개지야이) : 엷게 가리운 것은 열기가 쉽다

開則達于天道(개칙달우천도) : 그러나 열 수만 있다면 천도에 도달하게 되어

與聖人一(여성인일) : 성인과 하나가 된다.”고 하셨다

2권 爲學類(위학류) < 111 >

爲學 凡百十一條

 

[爲學001]

濂溪先生曰, 聖希天, 賢希聖, 士希賢. 伊尹顔淵大賢也. 伊尹恥其君不爲堯舜, 一夫不得其所,

若撻于市. 顔淵不遷怒, 不貳過, 三月不違仁. 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 過則聖, 及則賢,

不及則亦不失於令名.

 

염계선생이 말씀하시길, 성인은 하늘을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바라며,

선비는 현인을 바란다. 이윤과 안연은 큰 현인이다. (그러하기에) 이윤은 그의 군주가 요임금,

순임금과 같이 하지 않아서 부끄러워했고, 한사람의 필부가 그 거처를 얻지 못하면 마치

시전에서 매질을 맞는 것처럼 (부끄러워) 하였다. 안연은 화냄을 옮기지 않았으며,

과실을 거듭하지 않았으니 삼개월 동안이나 인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윤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가 배운 바를 배워 지나면 성인이고, 미치면 현인이고,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훌륭한 이름(명예)은 잃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爲學002]

聖人之道, 入乎耳, 存乎心. 蘊之爲德行, 行之爲事業. 彼以文辭而已者, 陋矣.

 

성인의 도는 귀로 들어와서 마음에 보존되고, 쌓아가면 덕행이 되고,

행하면 사업이 되는 것이니, 저 문장과 말 뿐인 자들은 비루한 것이다.

[爲學003]

或問, 聖人之門, 其徒三千, 獨稱顔子爲好學. 夫詩書六藝三千子, 非不習而通也. 然則顔子所獨好者,

혹문, 성인지문, 기도산천, 독칭안자위호학, 부시서육예삼천자, 비불습이통야, 연칙안자소독호자,

何學也. 伊川先生曰, 學以至聖人之道也. 聖人可學而至歟. ,. 學之道如何. 得五行之秀者爲人,

하학야, 이천선생왈, 학이지성인지도야, 성인가학이지여, 왈연,  학지도여하,

其本也, 眞而靜, 其未發也, 五性具焉. 曰仁義禮智信. 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其中矣.

기본야, 진이정, 기미발야, 오성구언, 일인의예지신, 형기생의, 외물촉기형이동기중의.

其中動而七情出焉. 曰喜怒哀樂愛惡欲. 情旣熾而益蕩, 其性鑿矣. 是故覺者, 約其情使合於中, 正其心,

 

養其性. 愚者則不知制之, 縱其情而至於邪僻, 梏其性而亡之. 然學之道, 必先明諸心, 知所養, 然後力行以求至. 所謂自明而誠也. 誠之之道, 在乎信道篤. 信道篤, 則行之果. 行之果, 則守之固. 仁義忠信不離乎心.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出處語必於是. 久而弗失, 則居之安, 動容周旋中禮, 而邪僻之心, 無自生矣. 故顔子所事, 則曰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仲尼稱之, 則曰得一善則拳拳服膺而不失之矣. 又曰, 不遷怒, 不貳過.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也. 此其好之篤, 學之之道也. 然聖人則不思而得, 不勉而中. 顔子則必思而後得, 必勉而後中. 其與聖人相去一息. 所未至者, 守之也, 非化之也. 以其好學之心, 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後人不達, 以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爲學之道遂失. 不求諸己而求諸外, 以博聞强記, 巧文麗辭爲工, 榮華其言, 鮮有至於道者. 則今之學, 與顔子所好異矣.

 

혹자가 묻기를, 성인(공자)의 문하에 그 문도가 3천명 이었는데 유독 안자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시서와 육예를 3천명의 제자가 익히고 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안자가 유독 좋아한 것은 어떤 배움입니까? 이천선생이 대답하기를, 배움으로써 성인의 도에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성인은 배움으로써 이룰 수 있습니까?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배움의 길은 어떠합니까? 묻자, 천지의 精이 응집되어 오행의 빼어난 정기를 얻은 것이 사람이니, 그 근본이 참되고 고요하며 그 미발한 때에 오성이 갖추워져 있으니, 말하기를 인의예지신이라 한다. 형체가 이미 생기면 그 형체가 바깥 물건과 접촉하여 움직임이 그 속에 있게 되니, 그 속의 움직임에서 철정이 나오게 되는 바 말하기를 희노애락애오욕이라 한다. 情이 이미 성해져서 더욱 방탕해지면 性이 뚫리게 된다. 이런 까닭에 깨달은 자는 그 情에 묶여서 합함이 중도이니, 그 마음이 바르고, 그 性을 기른다. 우매한 자는 절제할 줄을 몰라 그 情에 늘여져서 삿되고 편벽함에 이르러 性을 질곡하여 잃게 된다. 그리하여 배움의 길은 반드시 먼저 마음을 밝혀서 기르는 바를 알고난 연후에 힘써 행하며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니, 이른바 밝음으로부터 정성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정성으로 가는 길은 도를 믿고 도탑게 함에 있으니, 도를 믿어 돈독히 하면 행함이 과단성 있게 되고, 행함에 과단성이 있으면 지킴이 견고해진다. 인의와 충심을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 조차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며, 전패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며, 출처와 어묵에도 이렇게 하며, 오래도록 잃지 않는다면 거처함이 편안하여 움직임을 용납하고 두루 배풀음이 예 속에 있게되니, 삿되고 편벽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자가 일삼은 바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기를 한 가지 선을 얻으면 권권히 가슴속에 두어서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성냄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거듭하지 않으며, 불선함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고, 알면 일찍이 다시 행한 적이 없다 하였으니, 그 좋아함이 독실한 것이고 배워가는 길(방도)이다. 그러나 성인은 생각하지 않아도 터득하고, 힘쓰지 않아도 중도인데, 안자는 필히 생각한 후에 터득하고, 필히 힘쓴 이후에 중도이니, 성인과 더불어 서로 한 번 숨쉴 거리가 있고, 아직 이르지 못하는 바가 있어 (힘써) 지킨 것이니 (성인에) 化한 것은 아니다. 그 배움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령 몇 년 더 지킬 수 있었다면 몇일 못되어 (성인에) 化하였을 것이다. 후인들은 이를 통달하지 못하고 이르기를 성인은 본래 나면서 아는 것이니, 배워서 가히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니, 배움의 길을 마침내는 잃게 되어,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고 밖에서만 구한다. 이로써 많이 듣고, 잘 기억하고, 문장을 잘 짓고, 말만 화려하게 하는 것을 공부로 여기니, 그 말들이 영화로우나 道에 이르는 자가 드문 것이다. 오늘날에 배움음은 안자가 좋아 했던 바와는 다른 것이다.

 

 

댓글 1 | 손님댓글 0

0

스크랩 0

인쇄 | 신고

 

[爲學004]

橫渠先生問於明道先生曰, 定性未能不動, 猶累於外物, 何如. 明道先生曰, 所謂定者, 動亦定, 靜亦定,

횡거선생문어명도선생왈, 정성미능불동, 유누어외물, 하여, 명도선생왈, 소위정자, 동역정, 정역정

無將迎, 無內外. 苟以外物爲外, 牽己而從之, 是以己性爲有內外也. 且以性爲隨物於外, 則當其在外時,

무장영, ,무내외 구이외물위외, 견기이종지, 시이기성위유내외야, 차이성위수물어외, 칙당기재외시,

何者爲在內. 是有意於絶外誘, 而不知性之無內外也. 旣以內外爲二本, 則又烏可遽語定哉. 夫天地之常,

하자위재내, 시유의어절외유, 이불지성지무내외야, 기이내외위이본, 칙우오가거어정재, 부천지지상,

以其心普萬物而無心. 聖人之常, 以其情順萬事而無情. 故君子之學, 莫若擴然而大公, 物來而順應. 易曰,

이기심보만물이무심, 성인지상, 이기정순만사이무정, 고군자지학, 막약확연이대공, 물래이순응, 역왈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苟規規於外誘之除, 將見滅於東而生於西也. 非惟日之不足. 顧其端無窮,

정길회망, 동동왕래, 붕종이사, 구규규어외유지제, 장견멸어동이생어서야, 비유일지불족, 고기단무궁,

不可得而除也. 人之情各有所蔽, 故不能適道. 大率患在於自私而用智. 自私則不能以有爲爲應迹,

불가득이제야, 인지정각유소폐, 고불능적도, 대솔환재어자사이용지, 자사칙불능이유위위응적,

用智則不能以明覺爲自然. 今以惡外物之心, 而求照無物之地, 是反鑑而索照也. 易曰, 艮其背, 不獲其身,

용지칙불능이명각위자연, 금이악외물지심, 이구조무물지지, 시반감이삭조야, 역왈, 간기배, 불획기신

行其庭, 不見其人. 孟子亦曰, 所惡於智者, 爲其鑿也. 與其非外而是內, 不若內外之兩忘也.

행기정, 불견기인, 맹자역왈, 소오어지자, 위기착야, 여기비외이시내, 불약내외지양망야,

兩忘則澄然無事矣. 無事則定, 定則明. 明則尙何應物之爲累哉. 聖人之喜, 以物之當喜, 聖人之怒,

양망칙징연무사의, 무사칙정, 정칙명, 명칙상하응물지위누재, 성인지희, 이물지당희, 성인지노,

以物之當怒. 是聖人之喜怒, 不繫於心, 而繫於物也. 是則聖人豈不應於物哉. 烏得以從外者爲非,

이물지당노, 시성인지희노, 불계어심, 이계어물야, 시칙성인기불응어물재, 오득이종외자위비,

而更求在內之爲是也. 今以自私用智之喜怒, 而視聖人喜怒之正, 爲何如哉. 夫人之情, 易發而難制者,

이경구재내지위시야, 금이자사용지지희노, 이시성인희노지정, 위하여재, 부인지전, 이발이난제자,

惟怒爲甚,. 第能於怒時, 遽忘其怒, 而觀理之是非, 亦可見外誘之不足惡, 而於道亦思過半矣.

유노위심, 제능어노시,  거망기노, 이관리지시비, 역가견외유지불족악, 이어도역사과반의.

 

횡거선생이 명도선생에게 물어 말하길, 성을 定할 적에 동하지 않을 수 없어 유독 바깥 물건에 얽매이니 어찌 해야 합니까? 명도선생이 답하기를, 이른바 定이란 것은 動하여도 定하고, 靜하여도 定하니 보내고 맞이함이 없고 내외가 없는 것이다. 만약 외물을 밖이라 여기고 자신을 이끌어 쫓아간다면 이것은 자신의 性에 내외가 있게 된다. 또한 性으로써 바깥 물건에 따른다면 마땅히 그 바깥에 있을 때에 어떤 것이 안에 있게 되겠는가. 이것은 바깥의 유혹을 끊는데에 마음을 둠으로써 性에 안팎이 없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외로써 두 근본을 삼는다면 또한 어떻게 갑자기 定이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천지의 항상함은 그 마음이 만물에 두루하여 무심함이고, 성인의 항상함은 그 情이 만사에 순응하고 무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게 크고 공정하지 않음이 없어 물건이 오면 순응하는 것이다. 역에 이르기를 바르고 길하여 후회가 없을 것이니, 자주자주 오고가면 벗이 너의 생각을 따른다 하였으니, 바깥의 유혹을 제거하는데에 급급하게 되면 장차 동쪽에서 없어졌다가 서쪽에서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니, 날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단서들이 끝이 없어서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情은 각기 가려진 바가 있어서 능히 도에 나아가지 못하니, 대체로 근심함을 제 스스로 사사로이 하고, 지혜를 씀을 쫓게 된다. 스스로 사사로우면 유위로써 자취에 응하지 못하고, 지혜를 쓰면 명각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다. 지금, 외물을 싫어하는 마음으로서 외물이 없는 곳을 비추고 구하려 한다면 이는 거울을 뒤집어 가려서 비추는 것이다. 역에 이르길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에서 행하여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 하였고, 맹자 또한 말하기를, 지혜를 미워하는 바는 그 천착함 때문이다 하였으니, 밖은 그르고 안은 옳다고 하기 보다는 내외가 아님을 아울러 잊어버리고, 둘을 잊을 잊으면 맑아지고 자연히 일 없을 것이다. 일이 없으니 定해지고, 定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진즉 오히려 어찌 물건에 응함에 얽매임이 있겠는가. 성인의 기뻐함은 물건에 마땅히 기뻐함이요, 성인의 노여움은 물건에 마땅히 노여워 함이니, 이는 성인의 희노는 마음에 매임이 아니라 물건에 매임이다. 이와같은즉 성인이 어찌 물건에 응하지 않겠는가. 어찌 바깥 것들을 쫓아 얻어진 것은 그릇 되고, 다시금 안에 있는 것을 구하여 옳다 하겠는가. 지금 스스로 사사롭고, 지혜를 쓰면서 기뻐하고 성냄으로, 성인이 살피신 희노의 바름을 견준다면 어떠하겠는가. 무릇 사람의 情이 쉽게 나타나고 어렵게 제어되는 것은 오직 성냄이 깊기 때문이니, 다만 성낼 때에 재빨리 그 노여움을 잊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관찰하면 역시 바깥의 유혹이 미워할 것이 못됨을 알 것이니, 道에 있어서도 또한 사려함이 반을 넘을 것이다.

[爲學005]

伊川先生答朱長文書曰, 聖賢之言, 不得已也. 蓋有是言, 則是理明, 無是言, 則天下之理有闕焉. 如彼耒陶冶之器, 一不制, 則生人之道有不足矣. 聖賢之言, 雖欲已 得乎, 然其包涵盡天下之理, 亦甚約也. 後之人, 始執券, 則以文章爲先, 平生所爲, 動多於聖人. 然有之無所補, 無之靡所闕. 乃無用之贅言也. 不止贅而已, 旣不得其要, 則離眞失正, 反害於道, 必矣. 來書所謂欲使後人見其不忘乎善, 此乃世人之私心也. 夫子疾沒世而名不稱焉者, 疾沒身無善可稱云爾. 非謂疾無名也. 名者可以厲中人, 君子所存, 非所汲汲.

 

이천선생이 주장문에게 답한 서한에서 말하기를, 성현의 말씀은 부득이 해서 하신 것(들 뿐)이다. 대개 이 말씀이 있으므로 이 이치가 밝아지고, 이러한 말씀이 없으면 천하의 이치에 빠진 부분이 있게 되니, 마치 저 쟁기자루와 쟁기의 머리처럼, 옹이장이와 대장장이가 기구들을 하나도 만들지 않은 것처럼 사람이 사는 도에 부족함이 있게 된다. 성현은 말씀을 비록 그치려 하나 만족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포함하면서도 천하의 이치를 다함이 있으니 또한 깊은 요약이 있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처음 책을 잡으면 문장을 우선시 함으로써 평생토록 하고자 하는 바가 성인보다 움직임이 많으나 있어도 더할게 없고, 없어도 부족한 바가 없으니 이내 쓸데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군더더기에 그칠 뿐만 아니라 이미 요점을 얻지 못한 것이니 참됨을 떠나고 바름을 잃은 것이어서 오히려 도를 해칠 것이 틀림없다. 보내온 서한에서 이른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선행을 잊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함은 바로 후인들의 사사로운 마음인 것이다. 공자께서 평생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괴로워하신 것은 종신토록 가히 일컬어질만한 선행이 없음으로 괴로워하신 것 뿐이니, 이름(명예)이 없음을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다. 이름이란 것이 가히 뭇 사람들 속에서는 괴로운 것이지만 군자에게 있어서는 급급할 바가 아니니다.

 

[爲學006]

內積忠信, 所以進德也. 擇言篤志, 所以居業也. 知至至之, 致知也. 求知所至而後至之, 知之在先. 故可與幾. 所謂始條理者, 智之事也. 知終終之, 力行也. 旣知所終, 則力進而終之, 守之在後. 故可與存義. 所謂終條理者 聖之事也. 此學之始終也.

 

안으로 충과 신을 쌓음은 덕으로 나아감이고, 말을 가리고 뜻을 돈독히 함은 업을 닦는 것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는 것은 치지이니, 이를 데를 알아 구한 후에 이르는 것이다. 아는 것이 앞에 있기에 가히 기미와 더불 수 있으니 이른바 시조리는 智의 일인 것이다. 마침내 마칠 때를 아는 것은 힘써 행함이며, 이미 마칠 데를 안다면 힘써 나아가 마치는 것이다. 지킴은 뒤에 있으므로 가히 더불어 義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른바 종조리라는 것은 聖의 일인 것이다. 이것이 배움의 시작과 마침이다.

 

[爲學007]

君子主敬以直其內, 守義以方其外. 敬立而內直, 義形而外方. 義形於外, 非在外也. 敬義旣立, 其德盛矣, 不期大而大矣. 德不孤也. 無所用而不周, 無所施而不利. 孰爲疑乎.

 

군자는 敬을 주장함으로써 그 안을 곧게 하고, 義를 지킴으로써 그 밖을 방정하게 한다. 敬이 서면 안이 곧아지고, 義가 나타나면 밖이 방정해지니, 의가 바깥으로 나타나나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경과 의가 이미 서면, 그 덕이 성해진다. 커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커지니 덕은 외롭지 않은 것이다. 쓰는 곳마다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배푸는 곳마다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누가 의심하겠는가.

 

[爲學008]

動以天爲無妄, 動以人欲, 則妄矣. 無妄之義大矣哉. 雖無邪心, 苟不合正理, 則妄也, 乃邪心也. 旣已無妄, 不宜有往. 往則妄也. 故無妄之彖曰, 其匪正有眚. 不利有攸往.

 

動하기를 하늘처럼 하면 망령됨이 없고, 動하기를 사람처럼 하고자 하면 망령되어진다. 무망의 뜻이 크도다. 비록 삿된 마음이 없을지라도 바른 이치로써 계합하지 않으면 망령되어지니, 이것이 삿된 마음이다. 이미 망령되지 않음을 버렸다면 갈 바를 두어서는 마땅치 않으니, 가면 망령되어진다. 그러므로 무망()의 단전에 바르지 않으면 재앙이 있으니 가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한 것이다.

 

[爲學009]

人之蘊蓄, 由學而大. 在多聞前古聖賢之言與行. 考蹟以觀其用, 察言以求其心. 識而得之, 以蓄成其德.

 

사람이 많이 쌓음은 배움으로 말미암아 커진다. 옛 성현의 말씀과 행실을 많이 듣고, 자취를 상고하고 그 쓰임을 살피며, 말씀을 생각해 봄으로써 그 마음을 구한다면 지혜를 얻을 것이니, 쌓음으로써 그 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大畜之象曰 天在山中이 大畜이니 君子ㅣ 以하야 多識前言往行하야 以畜其德하나니라. 상에 가로되 하늘이 산 가운데 있음이 大畜이니, 군자가 이로써 앞의 말과 간 행실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쌓느니라.)

[爲學010]

咸之象曰, 君子以虛受人. 傳曰, 中無私主, 則無感不通. 以量而容之, 擇合而受之, 非聖人有感必通之道也. 其九四曰,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傳曰, 感者, 人之動也, 故咸皆就人身取象. 四當心位而不言咸其心, 感乃心也. 感之道無所不通, 有所私係, 則害於感通. 所謂悔也. 聖人感天下之心, 如寒暑雨暘, 無不通無不應者, 亦貞而已矣. 貞者, 虛中無我之謂也. 若往來憧憧然, 用其私心以感物, 則思之所及者, 有能感而動, 所不及者, 不能感也. 以有係之私心, 旣主於一隅一事, 豈能廓然無所不通乎.

 

함괘의 상전에 군자가 이로써 비움으로 사람을 받아들인다 하였다. 역전에서 마음으로 사사로움을 주장하지 않으면 감동하고 통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자신의) 도량으로서 수용하고, 가려서 계합해 가는 것은 감동함에 있어 반드시 통하는 성인의 도가 아니다 하였다. 함괘 구사효에 바르게 하면 길하야 후회가 없을 것이니 자주자주 왕래하면 벗이 너의 생각을 따를 것이다 하였는데, 전에서 말하기를 함괘는 사람의 동함이다. 그러므로 함괘는 모두 사람의 몸에서 상을 취하여 이루어졌다. 구사는 마음의 위치에 해당하고 그 마음으로 느낀다 말하지 않음은 느낀다는 것이 이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감동하는 도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사사로이 매이는 바가 있으면 감통함을 해치니 이른바 후회함이 된다. 성인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킴은 마치 춥고, 덥고, 비오고, 화창한 것처럼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 또한 바르다는 것일 뿐이다. 바르다는 것은 비어서 그 마음에 내가(사사로움이) 없음을 이른다. 만일 오고가기를 자주 자주하고 그 사사로운 마음을 씀으로써 물건마다 감동한다면 생각이 미치는 바에는 능히 감동할 것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는 능히 감동시키지 못하니, 사사로운 마음에 매여서 이윽고 한 구석 한가지 일만을 주장한다면 어찌 능히 확연하게 통하지 않는 바가 없겠는가.

[爲學011]

君子之遇艱阻, 必自省於身, 有失而致之乎. 有所未善, 則改之, 無歉於心, 則加勉. 乃自修其德也.

 군자가 어려움과 막힘을 만나면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살펴 잘못이 있는지 힘써야 한다. 잘못한 바가 있으면 고쳐가고, 마음에 부족함이 없어도 더욱 힘써서 이내 스스로 그 덕을 닦는 것이다.

 

[爲學012]

非明, 則動無所之, 非動, 則明無所用.

 밝음이 아니면 동함이 갈 곳이 없으며, 동함이 아니면 밝음을 쓸 곳도 없다.

 

[爲學013]

, 重習也. 時復思繹, 浹洽於中, 則說也. 以善及人, 而信從者衆, 故可樂也. 雖樂於及人, 不見是而無悶, 乃所謂君子.

습은 거듭 익히는 것이다. 때때로 다시 생각하고 궁구히 하여 마음에 두루 배어들면 기쁨이요, 선함이 남에게 미치면 믿고 따르는 자가 많아지니 즐거운 것이요, 비록 즐거움이 남에게 미치지 않을지라도 옳다고 보여지지 않아도(인정받지 못하여도) 번민하지 않으면 이내 군자라 이른다.

 

[爲學014]

古之學者爲己, 欲得之於己也. 今之學者爲人, 欲見知於人也.

옛날에 배우는 자들이 자신을 위함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자 함을 얻고자 함이고, 지금에 배우는 자들이 남을 위함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래서이다.

 

[爲學015]

伊川先生謂方道輔曰, 聖人之道, 坦如大路. 學者病不得其門耳. 得其門, 無遠之不可到也. 求入其門, 不由於經乎. 今之治經者, 亦衆矣. 然而買櫝還珠之弊, 人人皆是. 經所以載道也. 誦其言辭, 解其訓詁, 而不及道, 乃無用之槽粕耳. 覬足下由經以求道. 勉之又勉, 異日見卓爾有立於前, 然後不知手之舞足之蹈, 不加勉而不能自止矣.

이천선생이 방도보에게 일러 말하기를, 성인의 도는 평탄하여 큰 길과 같다. 배우는 자들이 그 문을 찾지 못하는 것이 병통일 뿐이다. 그 문을 찾으면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문에 들기를 바란다면 경전을 말미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에 경전을 다루는 자들이 또한 많으나 궤짝만 사고 (그 속에) 진주는 되돌려 주는 병폐로 사람들이 모두 이렇다. 경전에 도가 실려 있기에 그 언사를 외우고, 그 가르침을 해석한다 해도 道에는 미치지 못해서 이내 쓸모없는 지게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바라건대 족하는 경전으로 말미암아 道를 구하고, 힘쓰고 또 힘쓰면 훗날 탁월하게 그대가 앞에 서 있음을 볼 것이니, 그런 후에 부지불식간에 손으로는 춤추고 발로는 밟아갈 것이니, 더는 힘쓰지 않아도 스스로 그칠 수가 없을 것이다.

 

[爲學016]

明道先生曰, 修辭立其誠, 不可不子細理會. 言能修省言辭, 便是要立誠. 若只是修飾言辭爲心, 只是爲僞也. 若修其言辭, 正爲立己之誠意, 乃是體當自家敬以直內義以方外之實事. 道之浩浩, 何處下手. 惟立誠纔有可居之處. 有可居之處, 則可以修業也. 終日乾乾, 大小大事. 却只是忠信所以進德, 爲實下手處, 修辭立其誠, 爲實修業處.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경전의) 말씀을 닦음은 그 誠을 세움이니 자세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능히 언사를 닦고 살펴서 誠을 세워야 함을 말한 것이다. 만약 단지 이러한 닦음이 언사를 꾸미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다만 거짓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언사를 (바르게) 닦으면 곧 자신의 성의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내 자신 스스로 공경함이 그 안에서 곧아지고 의리가 바깥으로 방정해지는 참된 일을 체득함에 해당한다. 도는 크고 광대하니 어느 곳부터 손을 써야 하는가. 오직 誠意을 세워야 겨우 의지할 곳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의지처가 있게 되면 곧 業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종일토록 굳세고 굳셈(부지런히 힘씀)은 매우 큰 일이니, 오직 忠信으로써 德으로 나아가야 진실로 손 쓸 곳이 되고, (경전의) 言辭를 닦아 그 誠을 세워야 실제로 業을 닦는 곳이 되는 것이다.

 

[爲學017]

伊川先生曰, 志道懇切, 固是誠意, 若迫切不中理, 則反爲不誠. 蓋實理中自有緩急, 不容如是之迫. 觀天地之化, 乃可知.

이천선생이 말씀하시길, 道에 뜻하기를 간절히 함이 진실한 성의이니, 만약 박절하여 道理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不誠하게 된다. 진실한 도리 속에는 자연한 완급이 있어서 이러한 박절함이 용납되지 않으니, 천지의 조화를 관찰하면 가히 알 수 있다.

 

[爲學018]

孟子才高, 學之無可依據. 學者當學顔子. 入聖人爲近, 有用力處. 又曰 學者要學得不錯, 須是學顔子.

맹자는 재기가 높아 배움에 의거할 곳이 없다(그만큼 배우기 어렵다).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안자를 배워야 한다. 성인에 들어감에 가까워서 힘 쓸 곳이 있다. 또한 말씀하시길 배우는 자들이 배움이 어지럽지 않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안자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爲學019]

明道先生曰, 且省外事, 但明乎善, 惟進誠心. 其文章雖不中不遠矣. 所守不約, 泛濫無功.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또 바깥 일을 줄여서 다만 善을 밝히고 오직 성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문장이 비록 (도리에) 맞지 않더라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지키는 바가 기약되지 않으면 범람하여 功이 없다.

 

[爲學020]

學者識得仁體, 實有諸己, 只要義理栽培. 如求經義, 皆栽培之意.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배우는 자가 인의 체를 얻게 되면 진실한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니, 다만 의리로서 심고 다듬어서 구해야 한다. 경전의 뜻을 구하는 것과 같이 모두 재배의 뜻이다.

 

[爲學021]

昔受學於周茂叔, 每令尋顔子仲尼樂處. 所樂何事.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옛날에 주무숙(주돈이)에게 수학할 때, 매번 (나에게) 안자와 중니께서 즐거워하신 곳이 어디인지, 어떤 일에 즐거워 했는지를 찾게 하셨다.

[爲學022]

所見所期, 不可不遠且大. 然行之, 亦須量力有漸. 志大心勞, 力小任重, 恐終敗事.

 

보는 바와 기약하는 바를 원대하게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행해 갈 때에는 역량을 헤아려 점진적이어야 한다. 뜻만 크고 마음만 수고로우며, 역량은 적은데 맡은 일이 무거우면 마침내는 일을 그르칠까 두렵다.

 

[爲學023]

朋友講習, 更莫如相觀而善工夫多.

 

친구와 벗하여 강습함은 다시금 서로를 살펴서 선하게 하는 공부를 넓히는 것 만한게 없다.

 

[爲學024]

須是大其心使開闊. 譬如爲九層之臺, 須大做脚, 始得.

 

모름지기 그 마음을 열어 활연히 넓혀야 하니, 비유하면 9층짜리 돈대를 만드는 것과 같이 마땅히 다리(기단)를 크게 만들어야 비로소 얻어지는(만들어지는) 것이다.

 

[爲學025]

明道先生曰, 自舜發於畎畝之中, 至孫叔敖擧於海, 若要熟也, 須從這裏過.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순임금이 畎畝 속에서 몸을 일으키심으로 부터 손숙오가 바닷가에서 천거됨에 이르기까지 완숙하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그 속에 재앙(시련)들을 넘어서 좇아야 한다.

 

[爲學026]

參也 竟以魯得之.

 

曾參은 끝내 노둔(미련)함으로 도에 이르렀다.

 

[爲學027]

明道先生以記誦博識爲玩物喪志.

 

명도선생은 잘 기억하고 외며 박식함은 완물상지라 하였다.

 

玩物喪志 : 쓸 데 없는 물건(物件)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精神)이 팔려 소중(所重)한 자기(自己)의 의지(意志)를 잃는다는 뜻으로, 물질(物質)에만 너무 집착(執着)한다면 마음 속의 빈곤(貧困)을 가져와 본심(本心)을 잃게 됨을 비유(比喩)한 말

고사유래 : ()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에게 서역에서 진귀한 개 한 마리를 보내 왔을 때, 신하인 소공(召公)이 무왕을 훈계하여 한 말 이라고 함

출전 : 서경(書經)

 

[爲學028]

禮樂只在進反之間, 便得性情之正.

 

예악은 다만 나아가고 돌아오는 사이에 있는 것이니 바로 성정의 올바름을 깨우쳐야 한다.

 

[爲學029]

父子君臣, 天下之定理, 無所逃於天地之間. 安得天分, 不有私心, 則行一不義, 殺一不辜, 有所不爲. 有分毫私, 便不是王者事.

 

아비와 자식, 임금과 신하는 천하의 정해진 이치로서 천지간에 달아날 곳이 없는 것이다. 편안히 하늘이 내린 분수를 깨우쳐 사사로운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한다. 곧 한가지라도 의롭지 않은 일을 행하거나, 한 사람이라도 무고한 이를 죽이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으면 곧 다스리는 자의 일이 아니게 된다.

 

[爲學030]

論性不論氣不備, 論氣不論性不明. 二之則不是.

 

性을 논하고 氣를 논하지 않음은 갖추지 못함이요, 氣를 논하고 性을 논하지 않음은 밝지 않음이니, 둘로 나누면 옳지 않다.

[爲學031]

論學便要明理, 論治便須識體.

 

학문을 논할 때는 이치를 밝혀야 하고, 정치를 논할 때는 마땅히 예를 알아야 한다.

[爲學032]

曾點漆雕開已見大意, 故聖人與之

 

증점과 칠조개는 이미 대의를 보았기에 성인(공자)이 허여하신 것이다.

 

[爲學033]

根本須是先培壅, 然後可立趨向也. 趨向旣正, 所造淺深, 則有勉與不勉也.

 

근본을 마땅히 먼저 북돋은 연후에 가히 나아가는 방향이 서는 것이다. 추향이 이미 바로잡히면 조예의 얕고 깊음은 곧 힘쓰는가 힘쓰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爲學034]

敬義夾持直上, 達天德自此.

 

경과 의가 좌우에서 돕고 받쳐주면 곧바로 위로 올라갈 것이니 천덕에 도달함이 이것으로 부터이다.

 

[爲學035]

懈意一生, 便是自暴自棄.

 

게으른 뜻이 한 번 생기면 곧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爲學036]

不學, 便老而衰.

 

배우지 않으면 곧 늙어 쇠한다.

 

[爲學037]

人之學不進, 只是不勇.

 

사람들의 배움이 나아가지 못함은 다만 용맹스럽지 않아서다.

 

[爲學038]

學者爲氣所勝, 習所奪, 只可責志.

 

배우는 자들의 기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습관에 뺏기는 바 다만 뜻(立志)을 따져봐야 한다.

 

[爲學039]

內重則可以勝外之輕, 得深則可以見誘之小.

 

안이 무거우면 바깥(외물)의 가벼움을 이겨낼 수 있고, 얻음이 깊으면 유혹이 적음을 알 수 있다.

 

[爲學040]

董仲舒謂, 正其義,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 孫思邈曰, 膽欲大而心欲小, 智欲圓而行欲方, 可以爲法矣.

 

동중서씨가 이르기를 그 義를 바로잡고, 그 利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그 道가 밝아지며, 그 功을 계산하지 않는다. 손사막이 말하기를 담력을 크게 하고자 하고(용감), 마음을 적게 하고자 하며(치밀), 지혜를 원만히 하고자 하고(달통), 행실을 방정하게 하고자 하면 가히 본받을만 하다 하였다.

[爲學041]

 

大低學, 不言而自得者, 乃自得也. 有安排布置者, 皆非自得也.

대저 배움에서 말없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이내 자득이라 한다. 안배하고 배치하는 것은 모두 자득이 아니다.

 

[爲學042]

 

視聽思慮動作, 皆天也. 人但於其中, 要識得眞與妄爾.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임이 일어남은 모두 천리이다. 사람이라면 다만 그 속에서 참됨과 망령됨을 알아야 할 뿐이다.

 

[爲學043]

 

明道先生曰, 學只要鞭辟近裏著己而已. 故切問而近思, 則仁在其中矣.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立則行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 只此是學質美者, 明得盡渣滓, 便渾化, 却與天地同體. 其次惟莊敬持養, 及其至則一也.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배움에서 오직 중요한 것은 허물을 채찍질하여 자신의 몸에 가깝게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묻고 생각을 가까이 하면 仁이 그 가운데 있다. 말을 진실하고 미덥게 하고, 행실을 돈독하고 공경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일지라도 행해질 것이요, 말이 충신하지 못하고 독경하지 못하면 비록 이웃 마을이라해도 행해지겠는가. (충신독경이) 서면 그 앞에 참여됨을 보게 되고, 수레에 있으면 그 멍에에 의지함을 볼 것이니 무릇 그런 후에야 행해진다. 오직 이같이 배움의 바탕이 아름다운 자만이 밝음을 얻어 찌끼와 앙금이 다할 것이고, 문득 혼연히 화하여 곧 천지와 더불어 동체가 된다. 그 다음은 오직 장경을 길러 지켜야 하니, 그 지극함에 이르면 똑같다.

 

[爲學044]

 

忠信所以進德, 修辭立其誠所以居業者, 乾道也. 敬以直內義以方外者, 坤道也.

충신으로써 덕을 진전시키는 것과 언사를 닦아 그 성실함을 세워 업을 쌓는 것은 乾의 道이고, 敬으로써 그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바깥을 방정하게 함은 坤의 道이다.

 

[爲學045]

 

凡人才學, 便須知著力處, 旣學, 便須知得力處.

무릇 사람이 처음 배울 때는 모름지기 힘쓸 곳을 알아야 하고, 이미 배웠으면 마땅히 힘을 얻을 곳을 알아야 한다.

 

[爲學046]

 

有人治園圃, 役知力甚勞. 先生曰, 蠱之象, 君子以振民育德. 君子之事, 唯有此二者, 餘無他焉. 二者爲己爲人之道也.

어떤 사람이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힘쓰기를 매우 수고롭게 사역하고 있었다.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고괘 상전에 군자가 이로써 백성을 진작시키고 덕을 기른다 하였다. 군자의 일은 오직 이 두가지가 있을 뿐이다. 나머지 다른 것은 없다. 두가지는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도이다.

 

[爲學047]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何以言仁在其中矣. 學者要思得之, 了此, 便是徹上徹下之道.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간절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는 것을 어찌하여 인이 그 가운데 있다 하는 것인가. 배우는 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터득하야 하니, 이것을 마치면 곧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 방도이다.

 

[爲學048]

 

弘而不毅, 則難立, 毅而不弘, 則無以居之.

넓기만 하고 굳세지 못하면 서 있기 어렵고, 굳세기만 하고 넓지 않으면 머물 수 없는 것이다.

 

[爲學049]

 

伊川先生曰, 古之學者, 優柔厭飫, 有先後次序. 今之學者, 却只做一場話說, 務高而已. 常愛杜元凱語. 若江海之浸, 膏澤之潤, 渙然氷釋, 怡然理順, 然後爲得也. 今之學者, 往往以游夏爲小不足學. 然游夏一言一事, 却摠是實. 後之學者好高, 如人游心於千里之外, 然自身却只在此.

이천선생이 말씀하시길,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우유염어(오래도록 순일하고 질리지 않게)하여 앞뒤 순서가 있었다.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오히려 다만 일장연설만 하며 높아지고자 힘쓸 뿐이다. (나는) 일찍이 두원개가 말한 ‘강이 바다에 스며들듯 하고, 빗물이 적셔주듯 하며, 환연히 얼음이 풀리듯 하고, 기껍게 이치에 순한 연후에야 깨닳았다.’는 말을 좋아한다.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왕왕 子游와 子夏를 하찮게 여겨 배울게 못된다고 한다. 그러나 子游와 子夏는 한마디 말에도 한가지 일에 조차 모두 진실하였늗데, 후세에 배우는 자들은 높은 것만 좋아하여 마치 사람의 마음은 천리 밖에서 놀고 있으나 자기 몸은 다만 여기에 있는 것과 같이 한다.

 

[爲學050]

 

修養之所以引年, 國祚之所以祈天永命. 常人之至於聖賢, 皆工夫到這裏. 則有此應.

수양으로 수명이 늘고, 국운이 하늘의 영원한 명으로 기원되고, 보통 사람이 성현에 이르는 것은 모두 공부가 이 안에 주밀하여 이같은 응험함이 있는 것이다.

[爲學051]

忠恕所以公平. 造德則自忠恕, 其致則公平.

 

충서는 공평하게 하는 것이니, 덕에 나아감은 충서로부터 시작하고 이것이 지극하면 공평해진다.

 

[爲學052]

仁之道, 要之, 只消道一公字. 公只是仁之理, 不可將公便喚做仁. 公而以人體之, 故爲仁. 只爲公則物我兼照, 故仁所以能恕, 所以能愛. 恕則仁之施, 愛則仁之用也.

 

仁의 道는 요컨데 다만 道에는 부족하지만 公자 한 자로 말할 수 있다. 공은 다만 인의 이치로 마땅히 공이 곧 인이라 해서는 안된다. 공으로써 인간의 체로 삼아야 仁이 되는 것이다. 다만 공평하면 물건마다 나를 겸하여 비추게 된다. 그러므로 인은 능히 용서할 수 있고, 능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는 인을 배풂이고 사랑은 인의 쓰임이다.

 

[爲學053]

今之爲學者, 如登山麓, 方其迤邐, 莫不闊步. 及到峻處, 便止. 須是要剛決果敢以進.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마치 산기슭을 오르며 바야흐로 (처음엔) 줄지어 잘 가는 것이 활보하지 못함이 없으나 험준한 곳에 이르러서는 곧 멈춘다. 모름지기 중요한 것은 강하게 결단하고, 과감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爲學054]

人謂要力行, 亦只是淺近語. 人旣能知見一切事皆所當爲, 不必待著意, 纔著意, 便是有箇私心. 這一點意氣, 能得幾時了.

 

사람들이 힘써 행해야 함을 중요하다 말하는데 이 또한 단지 천근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일찍이 일체의 일들이 모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안다면 굳이 뜻을 붙여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뜻을 나타낸다면 곧 한낱 사심이 있게 된다. 저 한 점의 의기로 마칠 때를 얻을 수나 있겠는가.

 

[爲學055]

知之必好之, 好之必求之, 求之必得之. 古人此箇學是終身事. 果能顚沛造次必於是, 豈有不得道理.

 

알아 갈수록 반드시 좋아하게 되고, 좋아할수록 구하게 되며, 구해 갈수록 반드시 얻을 것이니 옛 사람들은 이러한 학문이 종신토록 해야할 일이었다. 과연 능히 엎어지고 넘어질지라도 반드시 이렇게 한다면 어찌 도리를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爲學056]

古之學者一, 今之學者三. 異端不與焉. 一曰文章之學, 二曰訓詁之學, 三曰儒者之學. 欲趨道, 舍儒者之學不可.

 

옛날에 배우는 것은 하나였지만 지금에 배우는 것은 세가지로 이단은 포함되지 않는다. 첫째는 문장학이고, 둘째는 훈고학이고, 셋째는 유자학이니 도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유자학을 버리고서는 안된다.

 

[爲學057]

, 作文害道否. 曰害也. 凡爲文, 不專意則不工, 若專意則志局於此. 又安能與天地同其大也. 書曰玩物喪志. 爲文亦玩物也. 呂與叔有詩云, 學如元凱方成癖, 文似相如台類俳. 獨立孔門無一事, 只輸顔氏得心齋 此詩甚好. 古之學者, 惟務養情性, 其他則不學. 今爲文者, 專務章句, 悅人耳目. 旣務悅人, 非俳優而何. 曰古者學爲文否. 曰人見六經, 便以謂聖人亦作文. 不知聖人亦攄發腦中所蘊, 自成文耳. 所謂有德者必有言也. 曰游夏稱文學何也. 曰游夏亦何嘗秉筆 學爲詞章也. 且如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 此豈詞章之文也.

 

묻기를, 글을 짓는 것이 도에 해롭습니까. 답하기를, 해롭다. 무릇 문장을 짓는 것은 한결같지 않으면 공이 없게 되고, 온전할지라도 뜻이 여기에 국한될터인데 또한 어찌 능히 천지와 더불어 그 크고 넓음이 같을 수 있겠는가. 서경에 완물상지(물건에 취하여 뜻을 잊다)라 하였으니 문장을 짓는 것도 또한 완물이다. 여여숙의 시에 배움은 원개(杜預)와 같으면 바야흐로 편벽해지고, 문장이 사마상여와 같으면 자못 장난스럽다. 오직 공자의 문하 앞에만 (그와같은) 한가지 일이 없으니, 다만 안회가 마음을 가지런히 함을 얻었음을 일러줄 뿐이다 하니 이 시가 매우 좋다. 엣날에 배우는 자들은 오직 情性을 기르는데 힘썼고 기타 다른 것은 배우지 않았다. 지금에 문장을 짓는 자들은 오직 장구에만 힘써서 사람들의 눈과 귀만 기쁘게하니, 처음부터 남을 기쁘게 하는데만 힘쓰니 俳優가 아니고 무엇이랴. 묻기를, 옛날에도 문장을 짓는 것을 배웠습니까. 답하기를, 사람들이 육경을 보고는 성인 또한 문장을 지었다 이르는데, 성인이 또한 흉중에 쌓인 것을 펼쳐놓은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이른바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묻기를 자유와 자하를 문학이라 칭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하기를, 자유와 자하도 또한 어찌 일찍이 붓을 잡고 문장을 짓는 것을 배웠겠는가. 또한 천문을 관찰하고 시변을 살피고 인문을 살펴서 천하의 교화를 이루겠는가. 이것이 어찌 문장하는 글이겠는가.

 

[爲學058]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함양함은 모름지기 경을 쓰는 것이고, 배움이 나아감은 치지에 있다.

 

[爲學059]

莫說道將第一等讓與別人, 且做第二等. 才如此說, 便是自棄. 雖與不能居仁由義者差等不同, 其自小 一也. 言學便以道爲志, 言人便以聖爲志.

 

道에서 장차 제일등(성인의 일)을 사양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 말하지 말라. 또한 제이등(현인의 일)도 만들지 말라. (=) 조금이라도 이같이 말한다면 곧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비록 인에 거하고 의를 행하지 못하는 자와는 차등이 있고 같지 않으나 그 스스로를 작게 여김은 한가지다. 학문에서 말하면 곧 도로써 뜻을 삼음이고, 사람에게서 말하면 곧 성인으로써 뜻을 삼아야 한다.

 

'근사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   (0) 2013.11.12
[爲學060]  (0) 2013.11.12
近思錄(근사록)  (0) 2013.11.12
[스크랩] 근사록(近思錄) - 주희·여조겸 저서 /目次  (0) 201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