示衆 10-7~11
〈10-7〉 《주해》 * 1) 시광가석(時光可惜) : 시간을 소중히 여겨서 아껴라. 안한(安閑)히 보내지 말라는 뜻. * 2) 방가파파지(傍家波波地) : 방가(傍家)는 도중(途中). 타향(他鄕), 비본래적인 자기. 파파(波波)는 촐싹거리는 모습. 지(地)는 상황을 설명하는 말의 접미어. * 3) 인명인구구불구조(認名認句求佛求祖) : 명구(名句)를 배우고 경론(經論)을 연구하는 것을 통해 불조(佛祖)를 구하거나 좌선수행(坐禪修行)함을 가리킨다. 모두 밖을 향하여 구하고 착하는 어리석음. 인(認)은 그 이름에 상당하는 실체를 찾는 것. * 4) 구선지식의도(求善知識意度) : 명사(名師)를 구하여 자신의 생각을 시험해 보고자 함. 의도(意度)는 추량(推量), 즉 통밥 잰다는 뜻. 종래에는 이 구절을, 「선지식을 구하여 가르침을 받으려는 의도」라고 읽었는데, 이것은 바르지 않다. * 5) 부모(父母) : 자기의 본원(本源)이라는 뜻. * 6) 반조(返照) : 비춤(照)을 돌이킨다.〔返〕. 밝게 비춰지는 빛을 자기에게 돌이켜 비춘다는 것.《능가사자기》에서는,「생사윤회를 자세히 통찰하는 데는 오직 반연(攀緣)의 마음이 있을 뿐, 반연의 마음을 반조하면 심성(心性)은 본래청정하고, 청정한 곳은 실은 유심(有心)이 아니고 적멸(寂滅)한 곳이다. 원래 동념(動念)이 없고 동처(動處)는 항상 적(寂)하고 염처(念處)는 항상 진(眞)이다」라고 설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반조(返照)의 철학은 당(唐)의 선불교가 낳은 특유한 입장을 나타낸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조용동시(照用同時) 역시 같은 입장이다. * 7) 고인운 연야달다실각두(古人云演若達多失却頭) 운운 :《수능엄경(首楞嚴經)》제4권에 나오는 이야기. 마가다국의 수도 스라바스티에 사는 야쥬냐닷타(yajn̄adatta)라는 미모의 장자(長子)는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자기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어 골똘한 나머지 미쳐서 스라바스티의 거리를 남김없이 찾아다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너의 얼굴은 너에게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 자아를 찾은 뒤에는 편안해졌다는 고사(故事).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서《남전어요(南泉語要)》, 종밀의《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1 상(上),《종경록》98의 태원(太原) 화상과 감전(甘泉) 화상,《전등록》30의 법등(法燈)선사의〈고경가(古鏡歌)〉에도 실려 있다. * 8) 막작모양(莫作模樣) : 모양은 주형(鑄型)의 뜻. 흉내를 내지 말라는 뜻. * 9) 유일반불식호오독노(有一般不識好惡禿奴) : 선악도 판단하지 못하는 눈먼 녀석이라는 뜻. 일반(一般)은 한 그룹의 뜻. 독노(禿奴)는 머리 깎은 녀석, 대머리. 승(僧)을 꾸짖는 말. * 10) 견신견귀(見神見鬼) 운운 : 이 구절은 당시 성행하던 도교(道敎)의 속신(俗信)을 비판하는 것. * 11) 저채(抵債) : 부채(負債)를 갚음. 빌린 것을 되돌려줌. * 12) 염로(閻老) : 지옥의 왕. 염(閻)은 염마(閻魔, yama)의 약칭. 로(老)는 경칭. * 13) 탄열철환(呑熱鐵丸) : 헛된 말로 남을 속인 사람은 지옥에서 불에 달군 쇠구슬을 삼키는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중아함경》12,《대지도론》16에 상세히 나와 있다. * 14) 호인가남녀(好人家男女) : 호인가는 좋은 집안. 남녀는 속어(俗語)로서 여기서는 일반 승려들을 가리킨다. * 15) 야호정매(野狐精魅) : 들여우와 도깨비 같은 사교(邪敎)의 무리들. * 16) 날괴(捏怪) : 날(捏)은 흙을 이겨 물건을 만드는 것. 여기서는 터무니없이 괴사한 것을 날조하는 것. * 17) 할루생(瞎屢生) : 바보 같은 녀석. 노예. 할(瞎)은 눈이 먼 것〔盲〕, 루(屢)는 어리석음. * 18) 색반전(索飯錢) : 일생 동안 먹은 밥값을 청구당한다는 말. 자신의 실존(實存)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 * 19) 유일재(有日在) : 그런 날이 틀림없이 올 것이다. 재(在)는 강하게 단정하는 구절 끝의 조사(助辭). *《사가어록(四家語錄)》은〈10-1〉,〈10-3〉을 이 어록의 중요 부분으로 보고 다른 설법에 병렬시켜 독립된 일단락으로 본다. 그러나 종연(宗演)은 이 부분을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긴 시중(示衆)의 앞에 두고〈14-14〉이하에 나오는 사빈주(四賓主)의 법어를 예상하고 있다. 제자들을 이끄는 임제의 태도는 이 사빈주로 크게 구별된다는 생각이, 지금까지의 법문을 시중(示衆)의 총서(總序)로 삼고 있는 데서도 보여준다. 사실 고래(古來)로 이 일단(一段)은 임제의 설법이 갖는 특색을 잘 보여주는 것이지만, 임제가 깨달음에 대한 촉구를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설법의 하이라이트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일단의 법문은 임제의 독특한 시간론(時間論)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의 사료간〈10-1〉은 단순히 논리적인 사구분별(四句分別)이나 제자에 대한 접화(接化)의 방법을 분류한 것이 아니다. 불교에 있어 유시(有時)의 공부는 십이시(十二時)의 수행 속에 돈발(頓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임제와 동시대인인 조주의,「모든 사람은 십이시의 부림을 당하지만 노승(老僧)은 십이시를 부리고 있다」는 법어를 상기하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만참(晩參)의 시중(示衆)에 나오는,「스님께서 이에 이르시되〔師乃云〕라고 계속 이어지는 설법의 형태로 묶은 것은 종연(宗演)이다. 이 부분은 원래 독립된 시중으로서《전등록》제28권,《조당집》제19권,《종경록》제98권에서도 독립된 시중설법으로 보고 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선원(禪院)의 체제가 정비되자 시중(示衆)은 상당(上堂)에 계속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예전처럼 짧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길고 상세한 설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종연은 당시의 이러한 통례에 따라 어록의 체제를 개편하여 전단(前段)의 사료간(四料簡)과 함께 이 부분을 임제설법의 총론적(總論的)인 강요(綱要)로 보았던 것이다. 임제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진정한 견해를 얻고자 하거든 인혹(人惑)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그의 기나긴 설법도 이 한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진정한 견해는 스스로를 믿는 것이며, 인혹(人惑)이란 타인의 설(說)에 집착하여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요컨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혹인 것이다.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어떤 틀에 고정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며 특정한 믿음의 대상이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을 특정화(特定化)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신불급(信不及)이다. 이것은 다음의 시중에서 상세히 밝혀지겠지만, 임제는 주체〔人〕를 빼앗고 경계〔境〕를 빼앗지 않는다〔奪人不奪境〕는 입장을 통해, 주체는 경(境)에 대한 주체임을 강조하여 주체를 고정시키지 않고 있다. 진정한 견해는 임제가 후에 출가와 속가를 나누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13-1〉, 〈13-2〉. 여기서의 속가(俗家)란 재가(在家)의 동의어가 아니다. 거짓 출가를 속가라고 부르며, 속물(俗物)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견해를 깨닫는 것만이 참된 출가인 것이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수행하는 것이 참된 출가의 조건은 아닌 것이다. 좌선관행(坐禪觀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견해가 없다면 모두 머리 깎은 속인이며 눈먼 바보인 것이다. 마조(馬祖)는 육조 혜능의 제3세다. 그 중간에 남악산(南岳山) 속에 숨어 살고 있던 남악회양(南岳懷讓)이 있다. 젊은 날의 마조가 이 사람을 찾아가서 좌선에 열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전등록》제5권에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개원년대(開元年代), 사문(沙門)인 도일(道一)이라는 구도자가 전법원(傳法院)에 정착하여 매일 좌선하고 있었다. 회양(懷讓)은 그의 기량(器量)을 인정하고 찾아가서 질문했다. 「너는 좌선해서 어떻게 할 작정이냐?」 「부처가 될 것입니다」 회양은 거기서 한 장의 기와를 손에 쥐고 돌 위에다 갈기 시작했다. 의아하게 여긴 도일은 물었다. 「스님, 무엇을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었다.」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좌선해서 어떻게 부처가 될까 보냐?」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사람이 우차(牛車)에 타고 있으나 나아가지 않을 때 수레를 치겠는가, 소를 치겠는가?」 도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회양은 가르친다. 「너는 좌선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앉아 있는 붓다의 흉내를 내고 있느냐? 좌선이면 선(禪)은 좌와(坐臥)에 구애되지 않고, 앉아 있는 붓다는 선정(禪定)에 구애되지 않는다. 진리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 일부러 취사(取捨)해서는 안 된다. 너는 앉아 있는 붓다를 흉내내어 붓다를 죽이고 있다. 좌선에 사로잡히는 것은 선(禪)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남악의 설법과 같이 임제의 설법도 요컨대 아무것도 흉내내지 않고 진정한 견해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승속(僧俗)의 체제도,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의 학습도,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도 그에게는 부정되고 만다. 다음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생사불염(生死不染)의 일구(一句)이다. 이것은 생사가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사에 물든다는 것이다. 생사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시중〈13-1〉에서의,「어떠한 경계에서도 잘못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설법과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진정한 견해이다. 생사도 해탈도 모두 진정한 견해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육조 혜능도,「나의 법문도 견성(見性)을 논하는 것이며, 선정해탈(禪定解脫)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임제는 견성(見性)이라는 언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견해가 견성이다. 마조의 제악불염(諸惡不染)도 역시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가리킨 것이며, 생사에 물들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자신의 올가미이며 일종의 인혹(人惑)이다. 다음으로 임제의,「옛부터 선덕(先德)은 모든 사람을 끌어내는 방법이 있었다」 (〈10-2〉)라는 법문을 주의해서 보기로 하자. 사람을 끌어낸다는 것은 생사의 질곡에 본래 더럽힘이 없는 참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정토교(淨土敎)의 조사로 우러름을 받고 있는 담란(曇鸞)은 그의《왕생론주(往生論註)》에서,「제불보살(諸佛菩薩)은 두 가지의 법신(法身)이 있다. 그 하나는 법성법신(法性法身)이며, 그 하나는 방편법신(方便法身)이다. 법성법신에 의해 방편법신을 일으키며, 방편법신에 의해 법성법신이 나온다」고 한다. 법성법신에 숨겨져 있는 방편법신을 나타낸다는 설명은 초기 선종의 안심법문(安心法問)과 같다. 달마는 이조 혜가(二祖慧可)가,「제자의 마음은 평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제자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십시오」라고 묻자,「어디 그대의 마음이라는 것을 가져오게. 그러면 그것을 진정시켜 주겠네」라고 답한다. 달마는 혜가의 불안한 마음, 그 실체를 내놓아 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에는 아이러니도, 유머도 없다. 그리고 궤변도 아니다. 달마는 인간을 불안의 질곡에서 끌어내는 법(法)을 중국에 전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방법은 달마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는 번뇌가 바로 보리(菩提)이며, 불안한 마음이 바로 안심(安心)의 뿌리라는 법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는다는〔不斷煩惱得涅槃〕사상은 대승불교의 기본이다. 중국 민족이 불교에 관심을 가진 직접적인 계기의 하나가 바로 이 일구(一句)의 법문이었다. 40세까지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대승불교를 공부해 온 혜가(慧可)는 이 법문에 숨어 있는 가르침을 충분히 체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부단번뇌득열반」의 사상만으로는 자신의 신심(身心)을 이끌어 낼 방법을 실현할 수가 없다. 달마는 이 방법을 전해왔던 것이다. 선(禪)은 참사람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그것은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法)이 있다. 임제는,「그대들은 붓다이신 조사〔祖佛〕를 알고자 하는가? 그는 바로 그의 면전에서 가르침을 듣는 그대 자신들이다」라고 설파한다. 임제는 자신의 설법을 듣는 사람들에게 절대 무조건의 자유를 부르짖고「그대 자신들이 바로 붓다」라고 외치고 있다. 조불(祖佛)은 유교(儒敎)에서의 성인(聖人)과 같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성인의 자격이나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그대로가 바로 붓다와 같은 상태라고 선언한다.「일체중생실유불성(一體衆生悉有佛性)」이라는 법어를, 어떤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면 임제의 원래 의도와는 백운만리(百雲萬里)이다. 도원(道元)은, 실유(悉有)는 불성(佛性)이며, 일체불성(一切佛性)이 실유중생(悉有衆生)이라고 한다. 임제의 주장은 사백 년을 지나서 지음(知音)을 얻은 것이다. 임제의 설법이 갖는 매력은 그의 법문이 가장 근원적이자 형이상학적이면서도 무엇 하나 추상화시키지 않고 가장 구체적인 현상을 적시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무위(無位)의 진인(眞人)은 형이상화(形而上化)되고 구체화되지만 요괴변화(妖怪變化)는 아니다. 그것은 항상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임제의 붓다는 항상 눈앞에서 활발발(活潑潑)하게 전체작용을 하는 인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설법하고 청법(聽法)하는 인간 이외에 진불(眞佛)은 없다. 여기에는 젊은 날의 임제가 공부했던 법상유식(法相唯識)에의 비판도 들어 있다고 보여준다. 불성은 사람 사람의 일상적인 작용이다. 이것은 남종선(南宗禪)의 입장이다. 황벽의 유명한 설법을 보자.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은 중생도, 불(佛)도, 천지(天地)․산천(山川), 유상(有相)․무상(無相)도 시방세계에 확대되어 있어, 절대적인 평등을 구현하고 있어 그 무엇에의 차별도 없다. 이 본원청정심은 항상 그 자체가 완전하고 분명해서 널리 비추고 있다. 범부(凡夫)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본심(本心)이라 생각하여 견문각지에 가려짐으로써 정명(精明)의 본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저 무심(無心)하면 본체는 확실히 모습을 나타낸다. 예컨대 큰 태양(大日輪)이 허공에 떠오르면 시방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비추어 전연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들(학도인〔學道人〕)은 견문각지에 마음이 팔려 시위동작(施爲動作)하면 마음의 순일(純一)함이 흩어져 생각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견문각지가 있는 곳에 본심이 있다고 알면 좋다. 그러나 본심은 견문각지에 지배되는 일도 없고, 또 견문각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견문각지 위해 분별을 일으키거나, 견문각지 위에 염(念)을 움직이거나 하지 않고, 견문각지와는 별도로 본심을 찾거나, 견문각지를 끊어 버리고 진리를 추정해서는 안 된다.「부즉불리(不即不離)」로 태도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온누리가 자유롭고 어디든지 마음 닦는 도량 아님이 없다」(《전심법요)》 여기서 황벽의 견문각지는 임제의 목전역력저(目前歷歷底)로 변한다. 견문각지가 그대로 불성(佛性)이라는 지적은 견문각지의 본체를 초월적인 허무의 세계에 상정하여 놓고 밖에서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쉽다. 임제는 이것을 옛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잘못 좇는 것이라고 한다. 십지만심(十地滿心)도, 등각(等覺)․묘각(妙覺), 나한벽지(羅漢辟支)도 보리열반(菩提涅槃)도 그것이 일상목전(日常目前)의 작용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묶어 버리게 된다. 계박(繫縛)이란, 가치와 반가치(反價値)를 고정화시켜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마음이 만들어 내고 마음이 선택한다. 마음을 벗어난 가치가 고정화될 때 가치는 인간을 구속하게 된다. 황벽에서 임제에 이르면 마음은 이미 신체 깊숙이 숨어 있는 신비로운 무엇이 아니다. 임제의 설법을 계속 들어 보자.
〈11〉 ≪주해≫ * 1. 이 일단은 임제의 四照用이라고 한다. 宋版 『續刊古尊宿語錄』와 『임제록』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明版『古尊宿語錄』에서 보충한다.『人天眼目』제1권에도 수록하고 있다. 朝比奈宗源『임제록』(岩波書店,1935년간행)과 入矢義高 譯註『임제록』(일본 岩波文庫本)에는 이 일단을 수록하고 있다. 柳田聖山 역주 『임제록』에는 수록하지 않고 있다. * 2. 照와 用의 四句분별에 의거하여 모든 사실을 설하고 있는 것. 照는 寂照(黙照)로서 지혜의 본체이며 用은 작용으로 지혜의 활동작용. 임제는 體와 用 그 어디에도 걸림 없는 一體의 입장에 있으면서 학인들의 근기에 맞추어 어떤 때는 體를 먼저 用을 뒤에, 어떤 때는 用을 먼저하고 體을 뒤에 하며, 어떤 때는 體用을 同時에, 어떤 때는 體用不同時로 자유자재롭게 염롱하고 있는 것. 어떠한 경우에도 임제의 입장에서는 진실된 것임. * 3. 照는 상대방의 내실을 파악하는 안목(지혜)의 비춤 작용을 말함. 불성 본체의 지혜 寂照(黙照).『금강경의해』에「言卽非一切法. 心無能所, 寂而常照, 定慧齊行, 體用一致, 是故名一切法.」이라고 하며, 『선종영가집』에도「生滅滅已 寂照現前.」이라고 함. 灌頂의 『대반열반경소』 제11권에 「佛智란 黙照인 것.」(『大正藏』38권 103쪽, 下)이라고 지극히 실천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黙照란 말은 승조의『조론』(答劉遺民書)에 처음 보이는 말. 돈황본『육조단경』에도 「智慧觀照」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 4. 用은 상대방에게 내 던지는 행동적인 작용. 불성의 지혜작용. * 5.『전등록』 제13권 「분주선조선사」 전에 다음과 같이 「照用」을 설법하고 있다. 「上堂하여 대중에게 설법했다. “대개 一句의 말에는 반드시 三玄門을 구족해야 하며, 一玄門마다 반드시 三要를 갖추어야 한다. 비춤(照)도 있고 작용(用)도 있어야 하며, 혹은 먼저 비추고 나중에 작용하며, 혹은 먼저 작용하고 나중에 비추며, 혹은 비춤과 작용이 동시에 있으며, 혹은 비춤과 작용이 동시에 있지 않다. 먼저 비추고 나중에 작용함은 그대들과 같이 상의하면 되겠지만, 먼저 작용하고 나중에 비춤은 그대들이 반드시 그러한 사람(箇人)이어야 한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에 있음은 어떻게 대항하겠는가? 또 비춤과 작용이 동시에 있지 않음에는 어떻게 머무르려(湊泊)로 하는가?”」(『大正藏』51권 305쪽, 上) * 6) 湊泊 : 항구에 배를 의지한다는 뜻. 그렇게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가 머무를 항구가 있어야 한다. 배를 항구에 대는 것을 주박이라고 한다. 선지식이 어떤 배라도 댈 수 있는 역량과 항구가 있느냐는 것이다. * 7) 駈耕夫之牛 云云 : 농부에게 가장 중요한 소인데, 그 소를 빼앗는 것은 궁극적인 경지를 빼앗는 것이다. 또한 주린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밥 한 그릇인데 그 밥을 빼앗는 것은 궁극적인 절실한 경지를 빼앗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소나 밥은 중생이 집착하고 있는 번뇌망념이며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조당집』 제8권 조산장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듣건대 甘泉화상이 말하기를 “밭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다라고 했는데, 어떤 것이 밭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는 것입니까?” 露地를 주지 않는 것(不與露地)이다. “ ”어떤 것이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것입니까?“ ”우유(醍醐)를 물리치는 것이다(去却醍醐).“」 (2-141)라는 일단이 보인다. 이 일단은『벽암록』 제20칙「龍牙西來無意」의 평창과 제3칙「馬祖不安」평창에도 「반드시 농부의 소를 뺏고, 굶주린 사람의 밥을 뺏는 수단이 있어야 비로소 마조대사가 사람들을 위하여 불법을 설한 경지를 알 수 있다.」라고 하고 있다. * 8) 敲骨取髓 : 『대반야경』 398권에 나오는 고사이다. 즉 상제보살이 법용보살의 처소에 가서 공양하고 깊은 반야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할 때 공양할 물건이 없어서 시중에 나가 자신의 몸을 팔았다. 그때 제석천이 몸을 바꾸어 바라문이 되어 그의 몸을 사서 하늘에 제사 지내려 하니, 상제보살이 손에 칼을 들고 가죽을 벗기고 살을 도려내고 골수를 들어내었다. 제석천이 기뻐하며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칭찬하며 담무덕성에 이르러 법용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하는 구법정신 이야기.『벽암록』96칙의 평창에도 언급하고 있다. 『법화경』「약왕보살본사품」에 나오는 소신(燒身)공양과 같은 이야기인데 이러한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정말 육체를 손상하고 붙태우면 안 된다. 여기서는 자기 자신의 가장 중요한 身命에 까지 집착을 떨쳐 버리는 無我無相의 실천이며 자기를 텅 비우는 공의 실천적인 입장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선에서 크게 한번 죽어야 한다는「大死一番」를 주장하고 있는 말과 같은 것인데, 진정한 구도자는 我相 人相이 있으면 올바른 반야의 지혜로운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대승불교나 보살도는 의미 없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9) 痛下鍼錐 : 바늘과 송곳으로 찌르는 아픔의 고통을 감수하며 수행해야 하는 구법정신을 말한다. * 10) 合水和泥 : 상대방이 빠져 있는 흙탕물에 이쪽도 함께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는 것. 和光同塵.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법문을 펼치는 응기설법을 말한다. 보살의 同事攝도 같은 의미이다. * 11) 過量人 :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은 사람. 拔群, 絶倫人.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사람. 깨달음의 경지에 사는 無位眞人. * 12) 猶較些子 : 些子는 약간, 조금이라는 의미. 그래도 아직 뭔가 부족한 경지.
|
'불가의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임제록주해7 (0) | 2015.06.18 |
---|---|
[스크랩] 임제록주해6 (0) | 2015.06.18 |
[스크랩] 임제록주해4 (0) | 2015.06.18 |
[스크랩] 임제록주해3 (0) | 2015.06.18 |
[스크랩] 임제록주해2 (0) | 2015.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