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混而爲一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라고하다..... 이 '하나(一)'는 일반적으로 道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道의 나타난 모양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떠나 있는 道란 존재하지 않는다.
其上不교 其下不昧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이 또한 '밝다' '어둡다'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분별지(分別知)일 뿐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통 분노와 짜증, 미움, 게으름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昧)를 갖고 있어 그것에 저항하거나 극복하려고 한다. 반면 그에 반대되는 사랑과 덕스러움, 성실 등은 좋은 것(교)으로 여겨 그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극복하려하는 분노나 짜증, 미움, 게으름 등은 '매'가 아니다.그것이 '매'가 아닌 줄 알면 추구해야 할 '교'도 없음을 동시에 알게 된다. '매'니 '교'니 하는 것 자체가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이 만들어낸 허구(虛構)임을 노자는 밝히고 있는 것이다.
繩繩兮不可名 끈임없이 이어져 오는데, 어떤 이름(名)도 붙일 수가 없구나.... '끊임없이 이어져 온다(繩繩兮)라는 이 문장을 읽을때, 사람들은 곧장 '태초(太初)'를 연상한다. 道란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오는 무엇이라는것이다. 노우(no) 아니다!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태초'라는 것은 관념이다. 道는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道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그럼 '승승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리의 '오늘'의 삶을 생각해 보자.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아니 꿈속에서 조차 온갖 생각과 감정과 느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어져 온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승승혜'요 그 하나 하나가 다 道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道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그 하나 하나가 다 道라고 한다면 도 아님이 없으니, 따로이 道라고 할 게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살면 되는 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다(不可名)는 것은 도덕경 1장에서 밝혀 놓았듯이 만물(萬物)은 본래로 이름(名)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분노'다, '짜증'이다, '미움'이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붙여진 이름일 뿐, 사실은 그 모두가 자연스런 '생명에너지의 발현'일 뿐이다. 어린 아이가 때로 짜증내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누가 그것을 '짜증'이니, '분노'니, 슬픔'이니 라고 이름하는가? 어린 아이는 그냥 그렇게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살고 있을 뿐>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게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복음 11:25~26)
復歸於無物 다시 아무것도 없는 無로 돌아가나니.....이것은 불가(佛家)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것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實體)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오늘'의 이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그 어떤 감정과, 느낌과, 생각과 상태도 다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냥 가만히 내어버려 두라(let it be!), 나서서 간택(揀擇)하여 어떤 것을 취(取)하거나 버리지(捨)말라. 조금만 기다리면 그것은 곧 사라져 없어지고, 다음 순간 다른 감정과 느낌과 생각이 내 안을 채운다. 이것이 '復歸於無物'이며, 또한 이를 일컬어 형상(形狀)없는 형상이라 하고, 모양 없는 모양이라 하며, 또한 일컬어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그 순간 너무나도 분명히 있는것(惚恍)'이라 한다.(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그렇듯 물 흐르듯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살라.
迎之不見其首 隨之不絹其後 앞에 맞이하여도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 가면서 보아도, 그 뒷모습을 볼 수가 없구나.... 이 또한 앞의 '其上不교 其下不昧'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주객미분(主客未分)으로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니 따로이 봐야 할 게 무에 있는가?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옛 도를 잡고서 오늘의 있음(有)를 다스리나니..... 사실은 '옛'도 없고 '고정된 '지금'도 없으며, '미래'도 없다(過去心不加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만이 있다. 따라서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있으라. 그것이 '執古之道'이며, 그 <현재를 삶>이 곧 '以御今之有'이다.
能知古始 是謂道紀 능히 옛 비롯함을 앎, 이를 일컬어 道의 벼리(道紀)라 한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삶 존재의 그 새로운 눈뜸, 그것이 진정한 '能知古始'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道의 벼리(道紀)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