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내가 조금 각색해 본 '미운 아기오리' 이야기 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미운 아기오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몇 가지 점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조금 돌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부터 지적해 두고 싶다. 우리는 대개 '백조'라고 하면 우아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눈부시기까지 한 어떤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오리'라고 하면 볼품 없고, 더러우며,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집오리들을 연상하게 되는데, 나는 그런 전제위에서 '미운 아기오리'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한 우열(優劣)의 분별(分別)은 전적으로 우리들의 몫이며, '백조'와 '오리'에게는 있지 않다. 나는 단지 그들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우선 '미운 아기오리'의 고뇌를 보자.
그가 그 알을 깨고 나왔을 때,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엄마를 비롯한 오리들이었다. 그는 너무도 당연히 자신도 한 마리 오리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모든 가치와 무게와 존재감을 오리에게 두게 된다. 이것은 뭐냐하면 '미운 아기오리'는 이후의 자신의 모든 삶속에서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오리의 관점에서, 오리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기준과 잣대는 그 순간 오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오리의 관점에서 오리의 눈으로 오리의 잣대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니, 자신은, 자신은 언제나 부족하고, 못나고, 보잘것없으며,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장애(病身)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삶이 얼나나 괴로웠을까?!
그런데 우리들도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상(自我像) - 이것은 대개 현재의 자신이 느끼는 부족감과 결핍 등이 대부분 극복된 충만하고 가득 찬 모습을 띠게 되는데- 을 온통 미래에다 투영해 놓고 언제나 그 관점과 그 기준에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 '아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왜 이모양일까?'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런 자신을 못견뎌 하면서, 그 자아상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 '미운 아기 오리'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번에는 '미운 아기오리'의 '變化(변화)'와 자유 그리고 그 행복한 비상(飛翔)을 보자. 그는 마침대 자유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자유라는 것이 '미운 아기오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온전한 오리'가 됨으로서 비롯되었는가? 그렇기는 커녕 자신을 바라보는 '눈(心)' 하나가 달리짐으로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그는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오리의 관점에서 오리의 잣대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봤고, 그 때문에 '온전한 오리'가 되어 있지 못한 자신이 바라봤고, 그 때문에 '온전한 오리'가 되어있지 못한 자신이 언제나 괴로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오리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신으로서 바라보게 되면서 '미운 아기오리'는 갑자기 자유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가 그토록 자신의 못남을 멋견뎌 하면서 괴로워할 때에도, 그 몸은 여전히 그 몸이었고, 그렇게 행복하게 날개를 활짝 펴고 아름답게 비상할 때에도 그 몸은 또한 여전히 그몸이었다.' 미운아기오리'의 몸은 처음부터 그 몸 그대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오직 자신을 바라보는 '눈(心)' 하나가 달라지니, 조금 전까지 온갖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하던 그 몸 그대로 지극한 행복(至福)과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깨달음'이라는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부족하고 못난 중생(衆生)이라고 여기고, 끊임없이 스스로 힘겨워하면서 '자기로부터의 행방(解放)'을 갈망하는데, 그러나 그 '부족하고 못난 중생'이라고 하는 자기규정과 판단 자체는 이미 -'미운 아기오리'의 경우에서 보듯이 보다 내밀이 드려다 보면- 자신이 바라보는 미래의 자아상(自我像)에서 현재의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오리'의 관점과 기준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자신으로서 바라보았을 때 '미운 아기오리'에게는 처음부터 아무런 문제 없었듯이, 미래의 바라는 자아상이라는 관점과 기준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다만 현재를 핸재로서 보면 '현재'는 부족하지 않으며, 거기에 중생(衆生)이라는 것도 없다. 그와 같이 우리는 '깨달음'이랄까, '자기로부터의 해방(解放)'을 향하는 그 처음부터 이미 우리 자신을 크게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묶여있지 않다. 우리는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깨달아야 할 무엇도 해방해야할 그 무엇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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