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실 나는 물리학(物理學)의 세계를 잘 모른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나는 '물리' 혹은 생물'과목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띵해지고, 가슴이 답답해 지는 게, 도대체가 그 내용들이 내게는 그저 어렵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도덕경(道德經)의 이 章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물리학의 이론들을 들먹이는 것은, 나는 오직 삶과 인생과 인간과 자아(自我) 등에 관하여 관심이 많은데, 우연히 어떤 책을 읽다가 하이젠베르크이 불확정성의 원리의 그 짤막한 명제(命題)와 그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접하는 순간 문득 그것이 나에게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삶과 영혼의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너무나 절묘한 방편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바탕하여 여기에서 노자의 '귀근(歸根)'을 설명하고 싶은 것인데, 그러나 그때의 내 가슴을 울린 진동만큼이나 잘 설명 할 수 있을지!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하나의 입자(粒子)는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치'라는 관점에서 볼라치면 '운동량'의 측정이 불확실해지고, 반대로 '운동량'의 관점에서 보면 '위치'가 불분명해져,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인데, 이를 그대로 우리 자신과 삶에 적용해 보면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과 삶 그 자체에도 분명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가지 성질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운동량이라는 측면에서만 자기 자신과 삶을 들여다보고, '위치'라는 관점을 놓쳐버렸기에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에건 자기답지 못하고 '자신다움'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부초(浮草)처럼 떠다니게 되는 것이다.
여기 한 점(點) -우리 '존재'와 삶'이 현재 점하고 있는 어떤위치- 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우리는 살아오면서 언제나 그것을 다른 점들과의 비교선상에서만 바라보도록 오랫동안 조건지어져 왔으며, 또한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그래서 이젠 아예 그 점을 그점 자체로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려 어떤 것이든 다만 비교선상의 한 점으로 밖에 불 수 없게 되었으며, 나아가 삶과 세계가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다고 믿어버리게 된것이다. 말하자면 비교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비교선상에서만 자기 자신과 삶을 보아왔고, 또한 그런 측면에서만 인관과 '관계'들을 이해해 왔기에 단 한 순간도 진정으로 '자기자신'과 '삶'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언제나 두리번거리며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운동량'에 주목하면 '위치'가 불분명해져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꼭 같다.
그러나 하나의 입자(粒子)가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닌 것처럼, 우리네 '삶'과 '존재'도 다만 비교선상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어떤 '절대(絶代)의 창(窓)'을 지금 이 순간 <동시에>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언제나 '비교선상의' 자신만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우리 대부분에게 있어서 잊혀져버린 이 창(窓) -'비교'가 끝이 난, 그래서 다만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서 바라보고, 과거나 미래와의 비교 속에서가 아니라 '현재'를 다만 '현재'로서 바라보는 - 이 삶의 어느 순간 다시 열리기만 하면, 그 순간 우리 안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이 뜨여져, 그토록 나를 지치게 화고, 힘들게 하던, 그 모든 '갈증'이 끝이 나고, 비로소 있는 글대로의 자기 자신과 삶에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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