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 公孫丑問曰 夫子 加齊之卿相하샤 得行道焉하시면 雖由此覇王이라도 不異矣리니 如此則動心가 否乎잇가 孟子曰 否라 我는 四十이라 不動心호라
공손추 물어 가로대 “선생님께 제나라의 경대부와 재상의 지위가 더해져 (얻어) 왕도정치를 행하시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제나라 제후를) 패왕으로 만드는 업적을 이루더라도 괴이한 것이 아니리니 이와 같다면 마음에 동요가 있겠습니까?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 하니, 맹자 가로대 “아니라. 나는 사십이라. 不動心(마음이 동요되지 아니하다)이니라.”하니라. |
▲ 此는 承上章하야 又設問孟子 若得位而行道시면 則雖由此而成覇王之業이라도 亦不足怪리니 任大責重이 如此면 亦有所恐懼疑惑而動其心乎아 하니라 四十은 彊仕니 君子道明德立之時라 孔子四十而不惑도 亦不動心之謂니라
이는 앞 문장을 이어서 (공손추가) 또 가정하여 묻기를 “맹자가 만약 지위를 얻어서 왕도정치를 행하시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패왕의 업적을 이루더라도 (또한) 족히 괴이하지 않으니 책임이 크고 직책이 무거움이 이와 같으면 또한 두렵고 두려워하여 의혹하는 바가 있어서 그 마음에 동요가 있으시겠습니까” 하니라. 사십은(『예기』곡례에) ‘彊仕(강사)’라 했으니, 군자가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서는 때이라. 공자가 (『논어』위정편에서) 사십이 불혹(不惑)이라 한 것도 또한 마음이 동요되지 않음을 이름이니라.
○ 曰 若是則夫子 過孟賁이 遠矣샤소이다 曰 是不難하니 告子도 先我不動心하니라
(공손추) 가로대 “이와 같은즉 선생께서는 맹분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 하니, (맹자) 가로대 “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니 고자도 나보다 먼저 不動心하였느니라.” 하니라.
賁 : 빛날 비, 여기서는 ‘빛날 분’ |
<해설>
맹분은 쇠의 생뿔을 맨손으로 잡아 뽑은 秦나라 출신의 무사다. 공손추가 맹자의 不動心은 이러한 맹분의 용맹보다도 훨씬 더 강한 용맹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자는 맹자의 性善說이나 순자의 性惡說과는 대비되는 性勿善勿惡(성품은 선함도 악함도 없다)을 주장한 학자로서 맹자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에 고자는 성품을 물에 비유하여 환경에 따라 또는 개인의 기질에 따라 성품이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며 변화한다고 하였다. 물이 본래는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지만, 물길을 막으면 물은 위로 올라 흐르기도 하고 옆으로 새어 흐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맹자가 道를 잘 모르는 고자도 스승인 자신보다도 먼저 不動心을 하였으니 不動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
▲ 孟賁은 勇士라. 告子의 名은 不害라. 孟賁은 血氣之勇이니 丑蓋借之하야 以贊孟子不動心之難이라. 孟子言 告子 未爲知道오도 乃能先我不動心하니 則此未足爲難也라 하시니라.
맹분은 용맹한 사나이라. 고자의 이름은 불해라. 맹분은 혈기가 왕성하고 사나운 용맹을 말함이니, 공손추가 (대개) 이를 빌려 (써) 맹자의 부동심이 어려움을 칭찬함이라. 맹자가 ‘고자가 道를 알지 못하는데도 (이에) 능히 나보다 먼저 부동심을 했으니 곧 이는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님’을 말씀함이라.
▲ 程子曰 心有主면 則能不動矣라.
정자 가로대 “마음에 주장함(줏대)이 있으면 능히 동요되지 않느니라.”하니라.
○ 曰不動心이 有道乎잇가
曰 有하니라 北宮黝之養勇也난 不膚撓하며 不目逃하야 思以一毫ㅣ나 挫於人이어든 若撻之於市朝하야 不受於褐寬博하며 亦不受於萬乘之君하야 視刺萬乘之君호대 若刺褐夫하야 無嚴諸侯하야 惡聲이 至커든 必反之하니라
孟施舍之所養勇也난 曰 視不勝호대 猶勝也로니 量敵而後進하며 慮勝而後會하면 是는 畏三軍者也니 舍 豈能爲必勝哉리오 能無懼而已矣라 하니라
(이에 공손추) 가로대 “不動心에 道가 있습니까?” 하니,
(맹자) 가로대 “ 있음이라. 북궁유가 용맹을 키우는데는 (험악한 상황에서도) 살이 떨리지 아니하며 눈길을 피하지 아니하여 (본인) 생각에 (써) 한 터럭이라도 남에게 꺾이면 마치 조정과 저자거리에서 회초리를 맞는 모욕으로 여겨 갈관박(누더기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비렁뱅이)에게도 (모욕을) 당하지 아니하며, 또한 만승지군의 왕에게도 (모욕을) 당하지 아니하니, (이에) 만승의 인군인 왕을 죽이는 것을 마치 (시장통의) 비천한 자를 죽이는 것 같이 하여 제후를 두려워함이 없으니 험담하는 소리가 이르면 반드시 보복하니라. (또한) 맹시사가 용맹을 키우는 바로써 (스스로) 말하되 ‘이기지 못할 것 같음을 보더라도 이기는 것 같이 하여야 하는데, 적을 헤아린 뒤에 (싸우러) 나가며 이길 것을 염려한 후에야 싸우면 이는 삼군(대규모 군대)을 두려워함이니 (그래서야) 내(맹시사) 어찌 능히 반드시 이길 수 있겠는가? 다만 두려워하지 않을 따름이라’ 했느니라.” 하니라.
黝 : 검을 유 撓 : 흔들 요 逃 : 피할 도 挫 : 꺾을 좌 撻 : 종아리 달
褐 : 베옷 갈, 누더기 갈 刺 : 찌를 자 |
<해설>
공손추가 不動心을 용맹에 비유하며 맹분의 예를 들자, 맹자는 고자를 예로 들어 不動心을 얘기하였다. 이에 다시 공손추가 부동심에도 道가 있느냐고 묻자 맹자가 북궁유와 맹시사의 용맹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북궁유는 기어이 죽여서 그 죽는 소리가 나고 꼭 이기는 것을 용맹으로 아는 사람이다. 맹시사는 꼭 이기는 것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먹은 바 곧 줏대가 더욱 중요함을 따지는 사람이다. |
▲ 北宮은 姓이요 黝는 名이라. 膚撓는 肌膚被刺而撓屈也오. 目逃는 目被刺而轉睛逃避也라. 挫는 猶辱也라. 褐은 毛布요 寬博은 寬大之衣니 賤者之服也라. 不受者는 不受其挫也라. 刺는 殺也라. 嚴은 畏憚也니 言無可畏憚之諸侯也라. 黝는 蓋刺客之流니 而必勝으로 爲主하야 而不動心者也라. (睛 : 눈동자 정 肌 : 살 기)
북궁은 성이요, 유(黝)는 이름이라. 부요(膚撓)는 살이 찔림을 당하여 흔들리고 움츠러듬이오, 목도(目逃)는 눈이 찔림을 당하여 눈동자가 굴러서 도피함이라. 좌(挫)는 치욕과 같은 뜻이라. 갈(褐)은 모포요, 관박(寬博)은 헐렁하고 큰 옷이니 비천한 자의 옷이라. 불수자(不受者)는 그 치욕을 받지 않음이라. 자(刺)는 죽임이라. 엄(嚴)은 두려워하고 꺼림이니 (북궁유에게) 가히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제후가 없음을 말함이라. 유(黝)는 대개 자객의 부류이니 반드시 이김을 주장으로 삼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자이라.
▲ 孟은 姓이오. 施는 發語聲이오. 舍는 名也라. 會는 合戰也라. 舍 自言其戰이 雖不勝이라도 亦無所懼니 若量敵慮勝而後에 進戰이면 則是無勇하야 而畏三軍矣라. 舍 蓋力戰之士니 以無懼로 爲主하야 而不動心者也라.
맹(孟)은 성이오, 시(施)는 말을 발하는 소리요, 사(舍)는 이름이라. 회(會)는 모여 싸우는 것이라. 맹시사가 스스로 말하기를 ‘그 싸움이 비록 이기지 못하더라도 (또한) 두려하는 바가 없으니 만약에 적을 헤아리고 이길 것을 염려한 뒤에 나아가 싸우면 이는 용맹이 없는 것으로 삼군(적의 대군)을 두려워함이라.’하니라. 맹시사는 대개 힘써 싸우는 사나이니 두려움이 없음으로써 주장을 삼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자라.
<참고로 맹시사의 본래 이름은 맹사이다. 맹과 사를 붙여 읽을 때 발음이 바로 그치기에 발음하기 좋게 ‘시’를 하나 더 넣었다.>
○ 孟施舍는 似曾子하고 北宮黝는 似子夏하니 夫二子之勇이 未知其孰賢이어니와 然而孟施舍는 守約也ㅣ니라
맹시사는 증자와 비슷하고 북궁유는 자하와 비슷하니, 무릇 두 사람의 용맹이 그 누가 뛰어난 지는 알지 못하거니와 그러나 맹시사는 지켜야 할 중요한 점을 잘 요약하니라. |
<해설>
맹자가 맹시사를 증자에 북궁유를 자하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증자는 ‘고기 어(魚)’자와 ‘노나라 로(魯)’자를 분별하지 못할 만큼(魚魯不辨)’ 어린 나이에 공자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자기 몸을 세 번씩 살펴(吾日 三省吾身『논어』 學而편) 공자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수약(守約)한 인물이다. 이에『대학』을 지어 공자의 도를 후대에 전하였다.
자하는 『논어』 學而편의 “事父母호대 能竭其力하며 事君호대 能致其身하며 與朋友交호매 言而有信이면 雖曰未學호대 吾必謂之學矣라(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다 바치며 붕우를 사귐에 말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자하)는 반드시 그를 일러 배웠다 하겠노라)”에서 보듯이 배운 바대로 매우 충직하게 실천하는 인물이다. |
|
▲ 黝는 務敵人하고 舍는 專守己하며 子夏는 篤信聖人하고 曾子는 反求諸己라. 故로 二子之與曾子子夏에 雖非等倫이나 然이나 論其氣象이면 則各有所似라. 賢은 猶勝也요 約은 要也라. 言論二子之勇이면 則未知誰勝이어니와 論其所守면 則舍比於黝에 爲得其要也니라.(倫: 비유할 륜)
북궁유(黝)는 사람을 대적하는데 힘쓰고, 맹시사(舍)는 오로지 몸을 지켰으며, 자하는 성인을 돈독히 믿고, 증자는 자기 몸에서 돌이켜 구하니라. 이에두 사람(맹시사와 북궁유)이 증자와 자하와 더불어 비록 동등한 무리가 아니나 그 기상으로 논하자면 각기 비슷한 바가 있느니라. 현(賢)은 더 낫다는 뜻이며 약(約)은 요약함이라. 두 사람의 용맹을 논하자면 누가 더 나은 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지키는 바로써 논하자면 맹시사가 북궁유에 비하여 그 요약함을 얻었다 할 것이니라.
○ 昔者에 曾子 謂子襄 曰 子好勇乎아 吾嘗聞大勇於夫子矣로니 自反而不縮이면 雖褐寬博이라도 吾不惴焉이어니와 自反而縮이면 雖千萬人이라도 吾往矣라 하시니라
孟施舍之守는 氣라 又不如曾子之守 約也니라
옛적에 증자가 자양에게 일러 가로대 “ 자네가 용맹을 좋아하는가, 내 일찍이 큰 용맹에 대해 공자 선생님께 들었으니 ‘스스로 돌이켜서 곧지 아니하면 비록 남루하고 비천한 자라도 내가 어찌 그를 두려워하지 않으리오마는 스스로 돌이켜서 곧으면 비록 천만 사람이라도 내가 가서 당당히 맛서겠노라’ 하셨노라.” 하니라. (縮 : 곧을 축 惴 : 두려워할 췌)
맹시사의 지킴은 기운이라. 또 증자의 지킴의 요약함만 같지 못하니라. |
<해설>
증자가 선생인 공자에게서 들은 ‘진정한 용맹이 무엇인가’를 제자 자양에게 해주고 있는 말을 맹자가 다시 인용하였다. 스스로 돌이켜(反求諸身 : 『중용』)행동과 마음이 곧지(縮) 아니하면 천한 사람조차 나를 하찮게 여길 것이며, 스스로 반성해 곧으면 천만 사람이 있는 곳이라도 떳떳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용맹이란 북궁유나 맹시사 같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곧으냐 곧지 않느냐’ 또는 ‘스스로 反求諸身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 此는 言曾子之勇也라. 子襄은 曾子弟子也 夫子는 孔子也라. 縮은 直也니 檀弓에 曰古者에 冠은 縮縫이러니 今也에는 衡縫이라 하고 又曰棺束을 縮二衡三이라 하니라. 惴는 恐懼之也라 往은 往而敵之也라.
이는 증자의 용맹을 말함이라. 자양은 증자 제자라. 부자(夫子)는 공자를 말함이라. 축(縮)은 곧음(강직함)이니 (『예기』) 단궁에 가로대 ‘옛적에 갓을 곧게(縮) 꿰매더니 오늘에는 옆으로 꿰맸다’ 하며 또 가로대 ‘관 묶는 것을 곧게(縮) 둘, 횡(衡)으로 셋을 묶었다’ 하니라. 췌(惴)는 두려워함이라. 왕(往)은 가서 대적함이라.
(縫 : 꿰맬 봉 衡 : 저울대 형, 여기서는 ‘비낄 횡’.)
▲ 言孟施舍 雖似曾子나 然이나 其所守는 乃一身之氣니 又不如曾子之反身循理하야 所守 尤得其要也라. 孟子之不動心은 其原이 蓋出於此하니 下文에 詳之하니라.
맹시사가 비록 증자와 비슷하나 그(맹시사) 지키는 바는 자기 한몸의 기개나 기상의 기운이며 (이)또한 증자의 反身循理(반신순리 : 몸을 반성하고 이치에 따름)하여 지키는 바의 더욱 그 요약함만 같지는 못함을 말함이라. 맹자가 말하는 不動心은 그 근원이 (대개) 증자의 수약(守約)으로부터 나왔으니 아랫글에 자세히 나타내니라.
○ 曰 敢問夫子之不動心과 與告子之不動心을 可得聞與잇가 告子曰 不得於言이어든 勿求於心하며 不得於心이어든 勿求於氣라 하니 不得於心이어든 勿求於氣는 可커니와 不得於言이어든 勿求於心은 不可하니 夫志는 氣之帥也오 氣는 體之充也니 夫志 至焉이오 氣 次焉이니 故로 曰 持其志오도 無暴其氣라 하니라
(공손추) 가로대 감히 묻자오니 “ 선생님(맹자)의 不動心과 고자의 不動心에 대해 (얻어) 들을 수 있겠습니까? ” 하니, (맹자 가로대) “ 고자가 가로대 ‘말로부터 얻지 못하거든 마음에 구하지 말며, 마음으로부터 얻지 못하거든 기운에 구하지 말라’ 하였으니, (내 생각에는) 마음으로부터 얻지 못하거든 기운에 구하지 말라 함은 옳거니와, 말로부터 얻지 못하거든 마음에 구하지 말라 함은 옳지 않으니라, 무릇 뜻은 기운의 장수요, 기운은 몸에 채워짐이니 무릇 뜻이 이르게 되면 기운은 그 다음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라” 하니라. 이에 (맹자) 가로대 “ 그 뜻을 굳게 지니되 그 기운에 대해 포악하게 하지 말라.” 하니라.
持 : 가질지 帥 : 장수 수 暴 : 서운할 포 |
<해설>
맹자가 고자의 말을 예로 들어 마음(心志)과 바깥으로 드러난 말(言)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氣(기운)와의 상호 관계를 말하고 있다. 아울러 맹자는 고자가 말한 ‘不得於言, 勿求於心’이라는 말이 뜻하는 ‘不動心’이 결국에는 북궁유와 맹시사의 용맹과 같이 맹목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말(言)은 心中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마음(心)과 상관없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발설되는 경우도 많다. 말(言)과 마음(心)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뜻이 바로 서지 않아 말이 잘못되었거나, 뜻은 바로 섰으나 실수로 말이 잘못 나온 경우가 있는데, 이때 이 말을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있어, 맹자와 고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는 맹자와 고자의 ‘不動心’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자가 말한 ‘不得於言, 勿求於心’은 이미 잘못된 말(자신의 말이든 남의 말이든)에 대해 이를 수습하느라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느니, 차라리 마음의 동요를 막기 위해 아예 처음부터 마음으로 이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주어 담을 생각말고 생각을 떨쳐버리란 뜻이다. 맹자는 이를 고자의 ‘不動心’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맹자는 마음과 뜻(心志)을 바로 세우면(縮) 잘못된 말이라도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맹자가 인용한 증자의 ‘守約’이나 ‘日日三省’ 또는 ‘反求諸身’이 그것이다. 이에 맹자는 단정적으로 고자의 ‘不得於言, 勿求於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대신에 맹자는 고자의 ‘不得於心 勿求於氣’에 대해서는 받아 들이되 이를 통해 志와 氣와 관련하여 독창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맹자는 心志가 氣를 통솔하고 조정한다고(志는 氣之帥也) 보는 입장이다. 즉 ‘心志’가 本이라면 ‘氣’는 末에 해당한다. 또는 ‘心志’가 體라면 氣는 用이다.
이에 맹자는 뜻(志)이 바로 서지 않았거나 또는 마음먹은(心) 바대로 일이 되지 않았다고 하여, 이를 자신의 기운에 의하여 해결하거나 수습할 수는 없다고 본다. 자신의 기운에 못이겨 주먹을 발끈 쥐고 윽박지르는 등 무모하게 氣槪(기개) 또는 氣象(기상)이 발동하는 경우를 말한다. 心志가 기운을 통솔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꾸로 기운이 心志를 바로 잡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에 맹자는 고자가 말한 ‘不得於心 勿求於氣’는 옳다고 하였다. 반면에 그렇다고 心志로 기운을 함부로 막 휘두르지(暴)는 말라고 하였다. |
▲ 此一節은 公孫丑之問에 孟子誦告子之言하시고 又斷以己意而告之也시니라. 告子 謂於言에 有所不達이어든 則當舍置其言하고 而不必反求其理於心하며 於心에 有所不安이어든 則當力制其心하고 而不必更求其助於氣라 하니 此所以固守其心하야 而不動之速也라.
이 한 마디는 공손추의 물음에 맹자가 고자의 말씀을 외우시고 또 자기의 뜻으로써 판단하여 깨우쳐주심이라. 고자가 이르되 ‘말에 이르지 못한 바가 있거든 (곧) 마땅히 그 말을 내버려 두고 반드시 돌아가 그 이치를 마음에 서 구하지 말 것이며 마음에 편안하지 못한 바가 있거든 (곧) 마땅히 그 마음을 힘껏 제어하고는 반드시 (다시) 기운에다 그 도움을 구하지 아니한다’ 하니, (이로써) 진실로 그 마음을 지켜서 빨리 동요하지 않음이라.
▲ 孟子 旣誦其言而斷之하사 曰彼謂不得於心이어든 而勿求諸氣者는 急於本而緩其末이니 猶之可也어니와 謂不得於言이어든 而不求諸心은 則旣失於外하야 而遂遺其內하니 其不可也 必矣로다.
맹자가 이미 그 말을 외우시고 판단하시어 가로대 저(고자) 이르기를 ‘마음에 얻지 못하거든 저 기운에 구하지 말라’ 함은 근본에 급하고 그 끄트머리에 누그럽게 함이니 (이는) 오히려 옳거니와, ‘말에 얻지 못하거든 저 마음에 구하지 아니함’은 곧 이미 밖에서 잃고 드디어 그 안까지 버림이니 이는 반드시 옳지 않음이라.
▲ 然이나 凡曰 可者는 亦僅可而有所未盡之辭耳라 若論其極이면 則志 固心之所之요 而爲氣之將帥라. 然이나 氣亦人之所以充滿於身하야 而爲志之卒徒者也라
그러나 무릇 가로대 옳다한 것은 또한 어느 정도(겨우) 옳다는 것이지 다하지 않은 바가 있는 말이라. 만약에 그 지극함으로 논하자면 뜻은 (진실로) 마음의 가는 바요 기운의 장수가 됨이라. 그러나 기운 또한 사람의 (써) 몸에 충만하여 뜻의 부하가 됨이라.
▲ 故로 志固爲至極이요 而氣卽次之니 人固當敬守其志나 然이나 亦不可不致養其氣하니 蓋其內外本末이 交相培養이니라. 此則孟子之心에 所以未嘗必其不動이나 而自然不動之大略也라
이에 뜻은 진실로 지극함이 되고 기운은 곧 그 다음으로 나아가니, 사람이 진실로 마땅히 그 뜻을 공경하고 지켜야 하나 또한 가히 그 기운도 길러 이르도록 하여야 하니 (이는) (대개) 그 내외본말이 서로 사귀어 북돋아 기름이니라. 이는 곧 맹자의 마음에 (써한 바) 일찍부터 꼭 움직여온 바이나 또한 자연히 (마음의) 동요가 없는 큰 요체이라.
○ 旣曰 志至焉이오 氣次焉이라 하시고 又曰 持其志오도 無暴其氣者는 何也잇고 曰 志壹則動氣하고 氣壹則動志也니 今夫蹶者趍者 是氣也而反動其心이니라
(공손추 가로대) “ 이미 (선생께서) 가로대 ‘뜻이 이르고 기운은 그 다음이라’ 하셨는데 또 가로대 ‘ 그 뜻을 세우되 그 기운에 대해 사납게 하지 말라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하니,
(맹자) 가로대 “뜻이 오로지한즉 기운이 움직이고 , 기운이 오로지한즉 뜻이 움직이니, 이제 무릇 넘어지는 자, 뛰는 자에게는 이 기운이 도리어 그 마음을 동요시키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蹶 : 넘어질 궐 趍 : 달아날 추, |
▲ 公孫丑 見孟子 言志至而氣次라. 故로 問如此則專持其志 可矣어늘 又言無暴其氣는 何也오 하니라. 壹은 專一也라. 蹶은 顚躓也라. 趍는 走也라. (顚 : 엎어질 전 躓 : 미끄러질 지)
공손추가 맹자가 뜻이 지극하고 기운은 그 다음이라고 한 말씀을 보니 이에 (공손추가) 묻기를 “이와 같은즉 그 뜻을 오로지 가짐이 옳거늘 (또) 그 기운에 포악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은 어째서입니까?” 하니라. 일(壹)은 오로지 하나라. 궐(蹶)은 엎어지고 미끄러짐이라. 추(趍)는 달림이라.
▲ 孟子言 志之所向이 專一則氣固從之나 然이나 氣之所在 專一則志亦反爲之動하니 如人이 顚躓趍走이면 則氣專在是하야 而反動其心焉하니 所以旣持其志오도 而又必無暴其氣也라 하시니라.
맹자가 말씀하기를 “뜻의 향하는 바가 전일한즉 기운이 그 뜻을 진실로 따르나 그러나 기운의 있는 바가 전일한즉 뜻이 또한 도리어 (기운을) (위하여) 동요하니, 마치 사람이 엎어지고 미끄러지고 뛰고 달리면 기운이 오로지 이에 있어서 도리어 그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과 같으니라. (이에) (써한 바) 이미 그 뜻을 세우고서는 (또한) (반드시) 그 기운에 대해 포악하게 하지 말라” 하니라.
▲ 程子曰 志動氣者는 什에 九요 氣動志者는 什에 一이라.
정자 가로대 “뜻이 氣를 움직이는 것은 십에 아홉이오, 氣가 뜻을 움직이는 것은 십에 하나니라.”하니라.
○ 敢問 夫子는 惡乎長이시니잇고 曰 我는 知言하며
我는 善養 吾의 浩然之氣하노라
(공손추 가로대) 감히 묻자오니 “선생님께서는 무엇에 뛰어나십니까?” 하니, (맹자) 가로대 ”나는 말을 알며(知言)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르노라 “ 하니라. |
▲ 公孫丑 復問孟子之不動心이 所以異於告子如此者는 有何所長而能然고 한대 而孟子 又詳告之以其故也라. 知言者는 盡心知性이니 於凡天下之言에 無不有以究極其理요 而識其是非得失之所以然也라.
공손추가 다시 묻기를 맹자의 부동심이 (써한 바) 고자와 다름이 이와 같다는 것은 무엇에 뛰어나서 (능히) 그러합니까? 하니, 맹자 또한 그 원인으로써 자세히 가르쳐주심이라. 말을 안다(知言)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아는 것이니, 무릇 천하의 말에 (써) 그 이치를 지극한데까지 연구하여 그 시비와 득실이 생기는 까닭을 알지 않음이 없느니라.
▲ 浩然은 盛大流行之貌라. 氣는 則所謂體之充者라. 本自浩然이나 失養故로 餒라. 惟孟子 爲善養之하사 以復其初也시니라.
호연(浩然)은 성대히 흘러가는 모양이라. 기(氣)는 (곧) (이른바) 몸을 채우는 것이라. 본래는 스스로 (타고났으나) 浩然을 길러냄을 잃었기 때문에 메마르는 것이라. 오직 맹자만이 (浩然을) 잘 길러 (써) 그 처음을 회복하시니라.
▲ 蓋惟知言이면 則有以明夫道義 而於天下之事에 無所疑요 養氣이면 則有以配夫道義 而於天下之事에 無所懼니 此其所以當大任而不動心也라. 告子之學이 與此로 正相反하니 其不動心이 殆亦冥然無覺하고 悍然不顧而已爾라.
대개 ‘知言’이면 무릇 道義를 밝혀서 천하의 일에 의심할 바가 없음이오, 기운을 기르면(養氣) (써) 무릇 道義와 짝이 맞아 천하의 일에 두려운 바가 없음이니 이는 (그) (써한 바)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하고 마음이 동요되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고자의 학문은 이와 더불어 정히 반대가 되니 그 不動心이 자못 (또한) 어두어져 깨닫지 못하고 사납기만 하고 돌아봄이 없을 뿐이니라.
○ 敢問 何謂浩然之氣잇고 曰 難言也ㅣ니라
(공손추 말하대) “감히 묻자오니 무엇을 일러 浩然之氣라 합니까?” 하니 (맹자) 가로대 “말하기 어려우니라” 하니라. |
▲ 孟子 先言知言이시어늘 而丑 先問養氣者는 承上文 方論志氣而言也라. 難言者는 蓋其心所獨得而無形聲之驗이니 有未易以言語로 形容者라. 故로 程子 曰觀此一言이면 則孟子之實有是氣를 可知矣로다.
맹자가 먼저 ‘知言’을 말씀하셨는데 공손추가 먼저 ‘養氣’를 물은 것은 앞 문장에 이어 (바야흐로) 志와 氣를 논하여 말함이라. 말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대개 그 마음이 홀로 얻은 바이어서 형태나 소리 등의 증험이 없으니 언어로써 쉽게 표현하지 못함이라. 이에 정자 가로대 “이 한 말(難言)을 보면 (곧) 맹자에게 실지로 이 기운(호연지기)이 있음을 가히 알 만하다.”하니라.
○ 其爲氣也 至大至剛하니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이니라 其爲氣也 配義與道하니 無是면 餒也니라
(맹자 가로대) “그 氣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곧음으로 기르되 해침이 없으면 (곧) (호연지기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되니라” 하며, (또한) “그 氣됨이 義와 더불어 道에 짝하니 이것이 없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리느니라(말라붙느니라)” 하니라. |
▲ 至大는 初無限量이오 至剛은 不可屈撓라. 蓋天地之正氣요 而人得以生者니 其體段이 本如是也니라. 惟其自反而縮이면 則得其所養이오 而又無所作爲以害之면 則其本體 不虧而充塞無間矣라.
지대(至大)는 애당초 한량이 없음이오, 지강(至剛)은 가히 굽히고 흔들리지 아니함이라. 대개 (호연지기는) 천지의 바른 기운이오, 사람이 (날때부터) (얻어) (써) 생겨난 것이니 그 특성이 본래 이와 같음이라. 오직 그 스스로 돌이켜서 곧으면 (곧) 그 기르는 바를 얻음이오 또 인위적으로 (써) (호연지기를) 해롭게 함이 없으면 그 본체가 이지러지지 않고 꽉 차서 틈이 없으리라.
▲ 程子曰 天人은 一也라. 更不分別이니 浩然之氣는 乃吾氣也라. 養而無害면 則塞于天地요 一爲私意所蔽면 則欿然而餒하야 知其小也라.
정자 가로대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기에 (다시) 나누어 떨어트리지 않으니 호연지지는 이에 나의 기운이라. (호연지기를) 길러서 해롭게 함이 없으면 천지에 꽉 찰 것이오, 하나라도 사사로운 뜻이 가리는 바(폐단)가 있다면 흠결이 생겨 (호연지기가) 말라 붙으니 그 작은 것도 앎이라. (段 : 조각 단 欿 : 구덩이 감)
▲ 配者는 合而有助之意라. 義者는 人心之裁制요 道者는 天理之自然이라. 餒는 飢乏而氣不充體也라. (乏 : 가난할 핍)
배(配)는 합하여 도움이 있는 뜻이라. 義는 사람 마음을 마름하고 지음이요 道는 하늘의 자연한 이치라. 뇌(餒)는 굶주리고 결핍하여 기운이 몸에 차지 못함이라.
▲ 言人能養成此氣이면 則其氣合乎道義而爲之助하야 使其行之勇決하야 無所疑憚이오. 若無此氣이면 則其一時所爲가 雖未必不出於道義나 然이나 其體 有所不充이면 則亦不免於疑懼요 而不足以有爲矣라.
(이는) 사람이 능히 이 기운을 길러 완성하면 그 기운이 道義와 합해져서 道義를 위해 도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도의를) 행함이 용감하고 결단하여 의심되고 꺼리는 바가 없음이라. (그런데) 만약 이 호연지기가 없으면 (그) 한 때에 하는 바가 비록 반드시 도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을지라도 그 전체가 꽉 차지 못하면 (또한) 의심과 두려움을 면치 못하여 족히 써 할 바를 두지 못함을 말함이라.
○ 是集義所生者라 非義 襲而取之也니 行有不慊於心則餒矣니 我 故로 曰 告子 未嘗知義라 하노니 以其外之也일새니라
이것은 (호연지기는) 義가 모아져서 생겨나는 바라. 義가 (갑자기) 엄습해서 (호연지기를) 취함이 아니니, (義를) 행함에 마음에 족하지 못함이 있은즉 (호연지기가) 굶주리니라(마르니라). 내(맹자)가 이에 가로대 ‘고자가 일찍이 義를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이는 義를 바깥으로 하기 때문이니라. (慊 : 족할 겸) |
▲ 集義는 猶言積善이니 蓋欲事事 皆合於義也라. 襲은 掩取也니 如齊侯襲莒之襲이라. (莒 :감자 거, 나라이름 거)
집의(集義)는 善을 쌓는다는 말과 같음이니 대개 일마다 다 義에 합하고자 함이라. 습(襲)은 숨겨 취함이니 제나라 후가 거(莒)나라를 엄습했다는 습과 같음이라.
▲ 言氣雖可以配乎道義나 而其養之之始에 乃由事皆合義하야 自反常直이라. 是以로 無所愧怍하야 而此氣 自然發生於中이요 非由只行一事가 偶合於義하야 便可掩襲於外而得之也니라.
(이는) ‘氣가 비록 (가히 써) 道義에 배합하여 그 氣를 기르는 처음에는 (이에) 일이 다 義에 합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돌이켜 항상 곧음이라. 이로써 괴작하는(愧怍 : 부끄럽고 부끄러워 함) 바가 없어 이 기운이 자연히 마음속에서 발생하나니, 다만 한 가지 일을 행함이 우연히 義에 합함으로 말미암아 는다고 해서 문득 가히 밖으로부터 엄습해서 (호연지기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함이라.
▲ 慊은 快也며 足也라. 言所行이 一有不合於義而自反不直이면 則不足於心而其體有所不充矣라.
겸(慊)은 흔쾌함이며 족함이라. ‘행하는 바가 하나라도 의리에 합하지 못함이 있어 스스로 돌이켜 곧지 못하면 마음에 족하지 못하고 그 전체가 차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말함이라.
▲ 然則義豈在外哉리오 告子 不知此理하고 乃曰仁內義外라 하야 而不復以義爲事하니 則必不能集義하야 以生浩然之氣矣라. 上文에 不得於言이어든 勿求於心이 則外義之意니 詳見告子上篇하니라.
그런즉 의가 어찌 밖에 있으리오. 고자가 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이에 가로대 仁은 안에 있고 義는 바깥이라 하여, 다시는 義로써 일을 삼지 아니하니 그런즉 필히 (능히) 義를 모아서 (써) 호연지기를 생겨나게 하지 못하느니라. 윗글에 나오는 말에 얻지 못하거든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는(不得於言이어든 勿求於心) 것은 곧 義를 바깥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니 (이 내용은) 고자 상편에 자세히 나타나니라.
○ 必有事焉而勿正하야 心勿忘하며 勿助長也하야 無若宋人然이어다 宋人이 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러니 芒芒然歸하야 謂其人曰 今日에 病矣와라 予 助苗長矣와라 하야날 其子 趨而往視之하니 苗則槁矣리라 天下之不助苗長者 寡矣니 以爲無益而舍之者는 不耘苗者也오 助之長者는 揠苗者也니 非徒無益이라 而又害之니라
반드시 일을 둘진대(호연지기를 기르거나 義를 쌓는 일) (그 효과를 미리) 기약하지 말며, 마음으로는 잊지 말고(새겨 두고), (또한) 억지로 助長하는 일을 하지 말지니 가령 송나라 사람하듯이 하지 말지어다.
송나라 사람중에 (그) 싹이 잘 자라나지 않음을 민망히 여겨 (그 싹을 약간) 뽑은(들어 올린) 자가 있으니, (그가) 넋나간듯이(멍청하게)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사람(집식구)에게 일러 가로대 “오늘 피곤하다, 내가 싹이 잘 자라나게 도왔노라” 하니, 그 자식이 뛰어가 보니 싹이 (곧) 말라 버렸음이라.
(이렇듯) 천하에 助長하는(싹을 자라나게 한다고 억지로 뽑아 올리는) 일을 하지 않는 자가 적으니 (써) 유익함이 없다 하여 그것을 버리는 자는 밭작물에 김을 매지 않는 자요, (소위 ‘잘 자라도록 돕는다’고) 助長하는 자는 싹을 뽑는 자이니 (이 모두) 한갓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로움이라.
正 : 꼭 그렇게 된다는 뜻의 ‘예기할 정’ 揠 : 뽑을 알 芒 : 풀 망 槁 : 마를 고, 原字는 槀 舍 : 버릴 사 徒 : 한갓 도 |
<해설>
가만히 두어도 될 일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해악만 불러일으킨다는 뜻의 유명한 故事이다. 성질이 매우 급한 송나라 사람이 빨리 자라게 한답시고 작물의 싹을 모두 잡아 뽑아 올렸다. 그 자식이 연유를 물어보니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왔다(助苗長)는 것이다. 이에 자식이 논에 나가 보았더니 싹이 말라 죽어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를 앞 문장과도 연결해 보면 천하의 많은 사람들이 마치 호연지기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키워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맹자가 이는 ‘助苗長’의 어리석음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자기가 쌓은 공은 생각지 않고 조급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나무라고 있는 셈이다. 호연지기는 어느날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道義가 쌓여서 키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 必有事焉而勿正은 趙氏 程子 以七字로 爲句하고 近世에 或幷下文心字讀之者도 亦通이라. 必有事焉은 有所事也니 如有事於顓臾之有事라. 正은 預期也니 春秋傳에 曰 戰不正勝이 是也라. 如作正心義亦同하나 此與大學之所謂正心者와는 語意自不同也라.
‘必有事焉而勿正’은 조씨와 정자가 일곱 자로써 한 구절을 삼고 근세(주자때)에 와서 혹 아래글의 ‘心’을 (붙여) 함께 읽는 것(必有事焉而勿正心)도 또한 통하니라. ‘必有事焉’은 일하는 바를 둠이니 ‘有事於顓臾(전유라는 곳에 전쟁이 있다, 사건이 있다)’에서의 ‘有事’와 같음이라. 정(正)은 미리 기약함이니 『춘추전』에 일러 ‘전쟁에는 이김을 예기치 못한다’ 함이 이것이라. ‘正心’이라고 지은 것도 뜻이 또한 같으나 이는 『대학』에 나오는 이른바 ‘正心’과는 (더불어) 말뜻이 (스스로) 같지 않음이라. (顓 : 땅이름 전, 어리석을 전 臾 : 잠깐 유 顓臾 : 여기서는 땅이름)
▲ 此는 言養氣者 必以集義爲事하고 而勿預期其效하며 其或未充이어든 則但當勿忘其所有事요 而不可作爲하야 以助其長이니 乃集義養氣之節度也라.
이는 ‘養氣’라는 것은 반드시 義를 모음으로써 일을 삼되 효력을 예기치 말며, (호연지기가) 혹 차지 못하더라도 (곧) (다만) 마땅히 그 일을 둔 바를 잊지 말며 가히 억지로 (써) 싹이 자라도록 돕지 말야야 함‘을 말함이니 이는 義를 쌓아 호연지기를 키우는 절도이니라.
▲ 閔은 憂也라. 揠은 拔也라. 芒芒은 無知之貌라. 其人은 家人也라. 病은 疲倦也라. 舍之而不耘者는 忘其所有事요 揠而助之長者는 正之不得하야 而妄有作爲者也라.
민(閔)은 근심이라. 알(揠)은 빼냄이라. 망망(芒芒)은 무지한 모양이라. ‘其人’은 집사람이라. 병(病)은 피로하고 권태로움이라. 버리고 김매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마땅히 일해야 하는 바를 잊어버림이오(호연지기를 버리는 사람이오), (싹을) 뽑아서 자라도록 돕는다는 것은 바름을 얻지 못해 망령되이 억지로 함이 있음이라.
▲ 然이나 不耘則失養而已요 揠則反以害之니 無是二者면 則氣得其養而無所害矣라. 如告子는 不能集義하고 而欲彊制其心이면 則必不能免於正助之病이니 其於所謂浩然者에 蓋不惟不善養이라 而又害之矣라.
그러나 김을 매지 않은즉 키움을 잃을 뿐이오, 뽑은 즉 오히려 해가 되니, 이 둘이 없으면 氣가 키워짐을 얻고 또한 해로운 바도 없음이라. 고자같은 이는 능히 義를 쌓지 아니하고는 강제로 그 마음을 제재하고자 하면 반드시 (능히) 미리 기약하고 억지로 助長해서 생기는 병을 면치 못하리니 (그) 이른바 호연지기를 잘 기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또한 호연지기를 해침이니라.
○ 何謂知言이니잇고 曰 詖辭애 知其所蔽하며 淫辭애 知其所陷하며 邪辭애 知其所離하며 遁辭애 知其所窮이니 生於其心하야 害於其政하며 發於其政하야 害於其事하나니 聖人이 復起사도 必從吾言矣시리라
(공손추 가로대) “무엇을 知言이라 이릅니까?” 하니, (맹자) 가로대 “ 편벽된 말에서 그 가리운 바를 알며, 음탕한 말에서 그 빠져 있는 바를 알며, 간사한 말에서 그 떠나가는 바를 알며, 도망하는 말에 그 곤궁한 바를 아니, 그 마음에서 생겨나 그 정사에 해를 끼치며, 그 정사에서 발하여 그 일을 해치나니, 성인이 다시 나오셔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르시리라.” 하니라.
詖 : 편벽될 피, 치우칠 피 遁 : 도망할 둔 |
<해설>
인간사회에는 무수히 많은 말이 오고 간다. 말로써 모든 일(政事)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온갖 뜻과 의도와 속셈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이에 맹자는 그 말속에 들어 있는 나쁜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을 ‘知言’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정사를 해치는 나쁜 말에는 ‘편벽된 말(詖辭)’ ‘음탕한 말(淫辭’) ‘간사한 말(邪辭)’ ‘회피하는 말(遁辭)’ 등이 있다고 보았다.
이에 편벽된 말(詖辭)이 나오는데는 막히고 가려진 바가 있기 때문이며, 음탕한 말(淫辭)은 잘못 빠져든 바가 있기 때문이며, 간사한 말(邪辭)은 그 마음이 이반했기 때문이며, 회피하는 말(遁辭)은 횡설수설하여 궁색한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맹자는 정사를 펼치는 자가 이러한 말을 잘 구분한다면 천하에 더 할 일이 없다고 보고 있다.
공자 또한 『주역』 계사하전에서 ‘知言’과 관련하여
“將叛者는 其辭 慙하고 中心疑者는 其辭 枝하고 吉人之辭는 寡하고 躁人之辭는 多하고 誣善之人은 其辭 游하고 失其守者는 其辭 屈하니라(장차 배반할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속마음에서 의심하는 자는 그 말이 가지하고(가지가 돋고), 길한 사람의 말은 적고,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고, 착한 것을 속이는 사람은 그 말이 놀고, 그 지킴을 잃은 자는 그 말이 비굴하니라)” 하였다. |
▲ 此는 公孫丑 復問而孟子 答之也라. 詖는 偏陂也오 淫은 放蕩也오 邪는 邪僻也오 遁은 逃避也니 四者 相因은 言之病也라. 蔽는 遮隔也오 陷은 沈溺也오 離는 叛去也오 窮은 困屈也니 四者 亦相因은 則心之失也라.
이는 공손추가 다시 묻고 맹자가 대답하심이라. 피(詖)는 편벽되고 언덕짐이오, 음(淫)은 방탕함이오, 사(邪)는 간사스럽고 궁벽함이오, 둔(遁)은 도피함이니, 네 가지(詖, 淫, 邪, 遁)가 서로 원인이 되어 말의 병이 됨이라. 폐(蔽)는 가리고 막힘이오, 함(陷)은 잠기고 빠짐이오, 리(離)는 배반해서 감이오, 궁(窮)은 곤하고 굴함이니 네 가지(蔽, 陷, 離, 窮)가 또한 서로 원인이 되어 (곧) 마음을 잃어버림이라.
▲ 人之有言이 皆出於心하니 其心이 明乎正理而無蔽然後에 其言이 平正通達而無病이오 苟爲不然이면 則必有是四者之病矣리라.
사람이 말을 둠에 다 마음에서 나오니 그 마음이 바른 이치에 밝고 가리워짐이 없은 연후에 그 말이 평평하고 바르고 통하고 달해서 병이 없을 것이오, 진실로 그러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이 네 가지의 병이 있으리라.
▲ 卽其言之病而知其心之失하고 又知其害於政事之決然而不可易者 如此하니 非心通於道 而無疑於天下之理하면 其孰能之리오.
그 말의 병에 나아가서 그 마음을 잃어버림을 알고 또 정사를 해침이 결정적이어서 가히 바꿀 수 없음을 앎이 이와 같으니 마음이 도에 통해 천하의 이치를 의심하지 않는 이가 아니면 그 누가 이에 능하리오.
▲ 彼告子者는 不得於言이어든 而不肯求之於心이라 하야 至爲義外之說하니 則自不免於四者之病이라. 其何以知天下之言而無所疑哉리오
저 고자는 ‘말에 얻지 못하거든 즐기어 마음에서 구하지 아니한다’ 하여 義를 바깥에 두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곧) 스스로 네 가지 병을 면하지 못하리라. (이를 두고) 어찌 (써) 천하의 말을 알아서 의심하는 바가 없다 할 수 있으리오.
▲ 程子曰 心通乎道然後에 能辨是非如持權衡以較輕重이니 孟子所謂知言이 是也라. 又曰 孟子知言은 正如人在堂上이라야 方能辨堂下人曲直이니 若猶未免雜於堂下衆人之中이면 則不能辨決矣리라.
정자 가로대 “마음이 도에 통한 연후에야 능히 시비를 분별함이 저울과 저울대를 가지고 (써) 경중을 비교함과 같으니 맹자 이르신 바 ‘知言’이라고 이른 바가 이것이라.” 하고 또 가로대 “맹자의 ‘知言’은 정히 사람이 당 위에 있어야 바야흐로 능히 당 아래 사람의 曲直을 분별함과 같으니 만약 오히려 (자신이) 당 아래 뭇사람 가운데 섞여 있음을 면치 못하면 곧 능히 분별하고 결단하지 못하리라.” 하니라.
○ 宰我子貢은 善爲說辭하고 冉牛閔子顔淵은 善言德行이러니 孔子 兼之하샤대 曰 我 於辭命則不能也로라 하시니 然則夫子는 旣聖矣乎신뎌
(공손추 가로대) “재아 자공은 설사(말)를 잘 하였고, 염백우 민자건 안연은 덕행을 잘 말하더니, 공자는 (두 가지를) 겸하셨는데 말씀하시기는 ‘내(공자)가 사명에는 능치 못하노라’ 하셨으니 그렇다면 선생님(맹자)께서는 이미 성인이시겠군요!” 하니라.
|
▲ 此一節은 林氏 以爲皆公孫丑之問이라 하니 是也로다. 說辭는 言語也오 德行은 得於心而見於行事者也라. 三子 善言德行者는 身有之故로 言之親切而有味也라.
이 한 마디는 임씨(임지기)가 (써) (다) 공손추의 물음이라 하니 옳도다. 설사(說辭)는 언어(言은 말의 통칭이고 語는 남의 말에 대답하는 말)요. 덕행은 마음에 얻어 일을 행하는데 나타나는 것이라. 삼자가 덕행을 잘 말하는 것은 몸에 둔(자신이 직접 실천하는) 고로 (그) 말이 친절하고 맛이 있느니라.
▲公孫丑 言數子 各有所長而孔子兼之하시나 然이나 猶自謂不能於辭命이어시늘 今孟子 乃自謂我能知言하시고 又善養氣라 하시니 則是兼言語德行而有之시니 然則豈不旣聖矣乎아 하니라. 此夫子는 指孟子也라
공손추가 말하기를 “몇 사람들이(재아, 자공, 염우, 민자, 안연 등) 각각 장점이 있고 공자는 (이 모두를) 겸하셨으나 오히려 스스로 사명(辭命)에는 능치 못하다 (말씀)하시거늘 이제 맹자가 (이에) 스스로 일러 ‘내 능히 말을 안다’ 하시고 또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말)하셨으니 즉 (이) 언어와 덕행을 겸하여 두신다 하셨으니 그런즉 어찌 이미 성인이 아니시랴” 하니라. 여기서 夫子는 맹자를 가르침이라.
▲ 程子曰 孔子 自謂不能於辭命者는 欲使學者로 務本而已시니라
정자 가로대 “공자 스스로 이르시기를 사명에 능하지 못하다고 하심은 배우는 자로 하여금 근본에 힘쓰게 하고자 하실 따름이니라.” 하니라.
○ 曰 惡라 是何言也오 昔者애 子貢이 問於孔子 曰 夫子는 聖矣乎신뎌 孔子曰 聖則吾不能이어니와 我는 學不厭而敎不倦也로라 子貢이 曰 學不厭은 智也오 敎不倦은 仁也니 仁且智하시니 夫子는 旣聖矣신뎌하니 夫聖은 孔子도 不居하시니 是何言也오
(맹자) 가로대 “아니라. 이 어찌된 말인고. 옛적에 자공이 공자에게 물어 가로대 ‘선생님(공자)께서는 (분명) 성인이십니다.’ 하니, 공자 가라사대 ‘성인은 내가 능치 못하거니와 나는 배움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가르침을 게을리 아니하노라.’ 하니라. 자공이 가로대 ‘배움을 싫어하지 않음은 智이고 가르침을 게을리 아니 함은 仁이니, 仁하고 또 智하시니 선생님께서는 이미 성인이십니다.’ 하였느니, (이로 보아) 무릇 성인은 공자께서도 자처하지 않으셨는데 이 무슨 말인고.” 하니라. |
▲ 惡는 驚歎辭也라. 昔者以下는 孟子 不敢當丑之言하시고 而引孔子子貢問答之辭하사 以告之也시니라. 此夫子는 指孔子也라. 學不厭者는 智之所以自明이오 敎不倦者는 仁之所以及物이니 再言是何言也하사 以深拒之시니라.
오(惡)는 경탄하는 말이라. ‘昔者’ 이하는 맹자가 감히 공손추의 말을 감당치 못하고, 공자와 자공이 문답한 말을 이끌어서 (써) 깨우쳐 주심이라. 여기 夫子는 공자를 가리킴이라. 배움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智가 (써) 스스로 밝음이오 가르침을 게을리 아니함은 仁의 (써한 바) 물건에 미치는 것이니, (맹자가) 두 번이나 ‘이 무슨 말인고’를 말하여 (써) 깊이 거절함이라.
○ 昔者애 竊聞之호니 子夏子游子張은 皆有聖人之一體하고 冉牛閔子顔淵은 則具體而微라 하니 敢問所安하노이다
(공손추 가로대) “옛적에 그윽히 들으니 자하 자유 자장은 다 성인의 부분을 지녔고 염백우 민자건 안연은 곧 (성인의) 전체를 갖추었으되 미약하다 하니 (선생님께서는) (누구를) 자처하시는 지를 감히 묻사오니이다.” 하니라. |
▲ 此一節은 林氏 亦以爲皆公孫丑之問이라 하니 是也로다. 一體는 猶一肢也라. 具體而微는 謂有其全體로대 但未廣耳라. 安은 處也라. 公孫丑 復問孟子 旣不敢比孔子시면 則於此數子에 欲何所處也오 하니라.
이 한마디는 임씨가 또한 (써하되) 다 공손추의 물음이라 하니 옳도다. 일체는 일지(四肢의 4분의 1)와 같으니라. 몸뚱이를 갖추고도 미약함은 이르되 그 전체를 두었으되 다만 넓지 못함이라. 안(安)은 (자)처해 있음이라. 공손추가 다시 묻기를 맹자가 이미 감히 공자께 비교하지 못하시면 (이) (다른) 여러 사람들중에 누구를 자처하고자 하시는지를 묻는 것이라.
○ 曰 姑舍是하라
(맹자) 가로대 “우선 이를 놔두어라” 하니라. |
▲ 孟子言 且置是者는 不欲以數子所至者로 自處也라.
맹자가 또한 이를 놔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여러 사람이 이른 바로써 자처하고자 함이 아님이라.
○ 曰 伯夷伊尹은 何如하니잇고 曰不同道하니 非其君不事하며 非其民不使하야 治則進하고 亂則退는 伯夷也오 何事非君이며 何使非民이리오 하야 治亦進하며 亂亦進은 伊尹也오 可以仕則仕하며 可以止則止하며 可以久則久하며 可以速則速은 孔子也시니 皆古聖人也라 吾未能有行焉이어니와 乃所願則學孔子也로라
(공손추) 가로대 “ 백이와 이윤은 어떻습니까?” 하니, (맹자) 가로대 “道가 같지 아니하니 그 인군이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며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아니해서 다스린즉 나아가고 어지러운즉 물러간 이는 백이요, 누구를 섬긴들 인군이 아니며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리오 하며 다스려도 또한 나가며 어지러워도 또한 나간 이는 이윤이라.
(가히 써) 벼슬을 할만하면 벼슬하며, (가히 써) 그칠 만하면 그치며, (가히 써) 오래할 만하면 오래하며, (가히 써) 빨리 떠날만 하면 빨리 떠나신 이는 공자이시니 다 옛적 성인이라. 내 능히 행함이 있지 못하거니와 이에 원하는 바인즉 공자를 배우고 싶구나.“ 하니라 |
▲ 伯夷는 孤竹君之長子니 兄弟遜國하고 避紂隱居라가 聞文王之德而歸之러니 及武王이 伐紂에 去而餓死하니라. 伊尹은 有莘之處士니 湯이 聘而用之하사 使之就桀한대 桀이 不能用이어늘 復歸於湯하니 如是者五에 乃相湯而伐桀也라. 三聖人事는 詳見此篇之末及萬章下篇하니라
백이는 고죽군의 장자이니 형제가 나라를 사양하고 (은나라) 주왕를 피하여 숨어 살다가 문왕의 덕을 듣고 (문왕께) 돌아가더니 (주나라) 무왕이 주왕를 치는데 이르러서는 떠나가서 굶어 죽으니라. 이윤은 유신이라는 지역에 (은둔하고 있던) 처사인데 탕왕이 불러서 쓰사 (이윤으로) 하여금 (하나라) 걸왕에게 나아가게 한대 걸왕이 능히 (이윤을) 쓰지 않거늘 다시 탕왕에게 돌아가니 이와 같이 다섯 번을 함에 이에 탕왕을 도와서 걸왕을 정벌함이라. 세 성인(백이 이윤 공자)의 일은 이 책의 끝 만장 하편에 자세히 나타나니라.
遜 : 겸손할 손, 사양할 손 莘 : 나라 이름 신, 고을 이름 신
○ 伯夷伊尹이 於孔子애 若是班乎잇가 曰 否라 自有生民以來로 未有孔子也시니라
(공손추 가로대) “ 백이 이윤이 공자에 이와 같이 비등합니까?”하니, (맹자) 가로대 “아니라. 생민이 있은 이래로 공자만한 이가 있지 않으니라.” 하니라. ( 班 : 같을 반) |
班은 齊等之貌라. 公孫丑 問而孟子 答之以不同也시라.
반(班)은 가지런하고 동등한 모양이라. 공손추가 물음에 맹자가 같지 않다고 대답하심이라.
○ 曰 然則有同與잇가 曰 有하니 得百里之地而君之면 皆能以朝諸侯有天下어니와 行一不義하며 殺一不辜而得天下는 皆不爲也리니 是則同하니라
(공손추) 가로대 “그런즉 같은 점은 있습니까?” 하니, (맹자) 가로대 “있으니 백리의 땅을 얻어서 인군노릇을 하면 모두 능히 (써) 제후들에게 조회받고 천하를 둘 수 있거니와 한가지라도 의롭지 않음을 행하며 한명이라도 죄없는 이를 죽여서 천하를 얻는 일은 다 하지 않으리니 이것이 곧 같으니라.” 하니라. |
▲ 有는 言有同也라. 以百里而王天下는 德之盛也오 行一不義하며 殺一不辜而得天下를 有所不爲는 心之正也라. 聖人之所以爲聖人은 其根本節目之大者가 惟在於此하니 於此不同이면 則亦不足爲聖人矣라.
유(有)는 같은 점이 있음을 말함이라. 백리로써 천하에 왕노릇하는 것은 덕의 성함이오, 한가지라도 의롭지 않음을 행하며 한명이라도 죄없는 이를 죽여서 천하를 얻는 일을 하지 않는 바를 둔다는 것은 마음이 올바름이라. 성인이 (써한 바) 성인이 것은 그 근본과 절목의 큼이 오직 이에 있으니, 이와 같지 않으면 또한 족히 성인이 되지 못하니라.
○ 曰 敢問 其所以異하노이다 曰 宰我子貢有若은 智足以知聖人이니 汙不至阿其所好니라
(공손추) 가로대 “감히 그 (써한 바) 다른 점을 묻겠습니다.” 하니, (맹자)가로대 “ 재아 자공 유약은 지혜가 족히 (써) 성인을 알 정도이니 (이들이) 아래해도(지혜가 낮다해도) 그 좋아하는 바에 아첨하는데까지 이르지는 않느니라.” 하니라. (汙 : 아래 와, 더러울 와(오), 汚와 같음) |
▲ 汙는 下也라. 三子 智足以知夫子之道하니 假使汙下로 必不阿私所好하야 而空譽之니 明其言之可信也라.
와(汙)는 아래라. 삼자(재아 자공 유약)의 지혜가 족히 (써) 선생님(공자)의 도를 아나니 가령 맨 밑에 있어도 반드시 좋아하는 바에 사사로이 아첨해서 헛되게 영예롭게 하지는 아니하니 그 말이 가히 믿을만함을 밝힘이라.
<참고>
有若(기원전 509년~?)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13살 적으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有若似孔子)하여 공자 사후 문인들이 그를 스승으로 삼자고 했으나 증자가 반대했다.
○ 宰我 曰 以予觀於夫子컨댄 賢於堯舜이 遠矣샷다
재아가 가로대 “나로써 선생님을 보건대 요순보다 훨씬 훌륭하시도다.” 하니라. |
▲ 程子曰 語聖則不異하고 事功則有異하니 夫子 賢於堯舜은 語事功也라. 蓋堯舜은 治天下하시고 夫子는 又推其道하사 以垂敎萬世하시니 堯舜之道는 非得孔子면 則後世에 亦何所據哉리오.
정자 가로대 “성인으로 말한즉 다르지 아니하고 일과 공으로 (말한즉) 다름이 있나니 (공자) 선생님께서 요순보다 훌륭하다함은 일과 공을 말함이라. 대개 요순은 천하를 다스리시고 선생님께서는 또한 (그) 道를 미루어 (써) 만세에 가르침을 드리우셨으니 요순의 도가 공자를 얻지 아니했으면 후세에 (또한) 무엇을 근거로 삼았겠는가? ” 하니라.
○ 子貢이 曰 見其禮而知其政하며 聞其樂而知其德이니 由百世之後하야 等百世之王컨댄 莫之能違也니 自生民以來로 未有夫子也시니라
자공이 가로대 “ (선생님께서는) 그 禮를 보고 그 정사를 알며 그 음악을 듣고 그 덕을 아나니, 백세 뒤로부터 백세의 왕들을 차등하건댄 능히 어길 이가 없나니 생민이 있은 이래로 (공자) 선생님만한 이가 있지 않음이라.” 하니라. |
▲ 言大凡見人之禮면 則可以知其政이오. 聞人之樂이면 則可以知其德이니 是以로 我從百世之後하야 差等百世之王컨댄 無有能遁其情者니 而見其皆莫若夫子之盛也라.
‘대체로 사람의 禮를 보면 (가히 써) 그 정사를 알 것이오, 사람의 음악을 들으면 (가히 써) 그 덕을 아나니, 이로써 내가 백세 뒤를 좇아 백세의 왕을 차등해 보건데 능히 그 실정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없나니(실정대로 나타나건대) 그 모두 공자 선생님같이 盛한 이가 없음을 보게 됨’을 말함이라.
○ 有若이 曰 豈惟民哉리오 麒麟之於走獸와 鳳凰之於飛鳥와 泰山之於丘垤와 河海之於行潦애 類也며 聖人之於民에 亦類也시니 出於其類하며 拔乎其萃나 自生民以來로 未有盛於孔子也시니라
유약이 가로대 “ 어찌 오직 백성뿐이겠는가? 달리는 짐승에서는 기린과 같은 부류이며, 날아 다니는 새에 있어서는 봉황과 같으며, 언덕과 동산에 있어서는 태산과 같으며, 흐르는 물에 있어서는 河海와 같으니, 이는 사람에 있어서는 성인과 같은 부류이심이라. 그 무리에서 빼어나시며, 그 모임에서 높이 솟아났으니 생민이 있은 이래로 공자보다 성대한 이가 있지 아니하다.” 하니라. (垤 : 개밋둑 질 潦 : 물흐를 요, 개천 요 萃 : 모일 취) |
▲ 麒麟은 毛蟲之長이오 鳳凰은 羽蟲之長이라. 垤은 蟻封也라. 行潦는 道上無源之水也라. 出은 高出也오 拔은 特起也라. 萃는 聚也라. 言自古聖人이固皆異於衆人이나然이나未有如孔子之尤盛者也라. (蟻 : 개미 의)
기린은 털달린 짐승의 어른이오, 봉황은 깃달린 짐승의 어른이라. 질(垤)은 개미둑이라. 행료(行潦)는 길위에 근원없는 물이라. 출(出)은 높이 남이오, 발(拔)은 특별히 일어남이라. 취(萃)는 모임이라. (이는) ‘예로부터 성인이 진실로 (다) 일반 사람과 는 다르나 공자와 같이 더욱 성대한 이가 있지 않음’을 말함이라.
▲ 程子曰 孟子此章은 擴前聖所未發이시니 學者 所宜潛心而玩索也니라.
정자 가로대 “맹자의 이 장은 이전의 성인들이 미처 발표하지 못한 바를 넓히심이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을 잠기고 지긋이 찾아야 할 바이니라.” 하니라.
|